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1. 국왕의 권위
1) 중방정치와 국왕
고려의 전통적인 右文政策에 따른 武班에 대한 차별대우, 일반군인들의 불평불만 그리고 의종의 失政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마침내 武臣亂이 발발하였다. 그러나 무신란은 무신들의 상승된 지위328)를 전제로 하는 것이며 무력의 핵심을 이루는 일반군인들이 전적으로 동조하였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의종 24년(1170) 8월 鄭仲夫, 李義方 등이 주동이 된「庚寅의 亂」이 성공하자 집권무신들은 많은 문신을 살해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 국왕인 의종을 폐출하여 거제도로 유배하였으며 이어 王弟 명종을 새 국왕으로 추대하였 다. 명종 때에는 아직 무신정권이 안정되지 못한 상황이었기에 집권무신들 간의 정권다툼이 치열하였고, 정치 역시 고위 무신의 합좌기관인 重房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중방은 무신란 이후 정변 주역의 한 사람인 이의방이 강화시킴으로써 명종 때 집권무신들의 정치적 중심기구로 등장하게 된다.329)
무신집권기 중방의 기능은 군사는 물론 警察, 刑獄, 백관의 任면, 기타 諸規例의 판정 등 모든 정무에 간여하고 있었으며, 한편으로는 무신집정의 지위가 확고하지 못하여 집권무신들의 전횡을 억제하는 자기조절의 기능도 수행하였음을 간과할 수 없다.
≪高麗史節要≫권 12, 명종 때의 사료를 중심으로 중방의 권력행사에 대하여 규명해 보기로 하겠다.
1. 將軍 李永齡, 別將 高得時, 隊正 敦長 등이 이의방을 위하여 정중부에게 원수 갚기를 꾀하다가 일이 누설되니 중방에서 체포하여 먼 섬에 귀양보냈다(≪高麗史節要≫권 12, 명종 6년 9월).
2. 興王寺의 중이 중방에 와서 고하기를 ‘절의 중이 德水縣 사람과 함께 반란을 일으킬 음모를 하는 자가 있는데 散員 高子章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하니 중방에서 중과 子章을 체포하여 먼 섬에 귀양보내고 비밀히 사람을 보내어 강물에 던져 버렸다(≪高麗史節要≫권 12, 명종 8년 1월).
3. 어느 사람이 중방에 호소하기를 ‘修國史 文克謙이 의종이 시행당한 사실을 그대로 바로 썼는데 主上을 시해한 것은 천하의 大惡입니다. 마땅히 무관으로 하여금 수국사를 겸임시켜 사실을 바르게 쓰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하였다. …(문)극겸이 史堂에서 무관인 崔世輔와 농담하며 말하기를 ‘儒官으로 상장군이 된 것은 나로부터이고 무관으로 同修國史가 된 것은 역시 公으로부터 비롯되었다’면서 서로 한바탕 웃었다(≪高麗史節要≫권 12, 명종 16년 12월).
4. 재추·중방·대간이 奉恩寺에서 회합하여 시장의 물가를 정하고 말(斗)과 곡(斛)의 용량을 고르게 하며 위반하는 자는 섬에 귀양보내기로 하였다(≪高麗史節要≫권 12, 명종 11년 7월).
5. 여러 무신이 중방에 모여 문관으로 남아 있는 자를 모두 불렀는데 李高가 모두 죽이려고 하니 (정)중부가 말렸다(≪高麗史節要≫권 11, 명종 24년 9월).
6. 중방에서 동북 양계의 州·鎭 판관은 무관으로 임명하는 것을 허락하지 말기를 奏請하니 이를 聽從하였다. 이 논의를 주장한 자는 장군 洪仲方이었는데, 무관 金敦義 등 6명이 (홍)중방이 나오기를 기다려 길을 막고 (그 잘못을) 호소하니 중방에서 체포하여 墨刑하고 섬에 귀양보내었다(≪高麗史節要≫권 12, 명종 7년 4월).
위의 사료 가운데 1과 2는 중방이 경찰 내지 형옥의 권한을 행사하였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며, 3은 인사행정, 4는 시장가격을 사정하고 斗斛을 표준화하는 등의 條規를 제정하였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고, 특히 5와 6은 집권무인들의 전횡을 억제하는 자기조절의 기능을 수행하였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무신정권의 전기에 해당하는 명종 때에는 아직 무신집정의 위치가 확고하지 못하여 무신세력의 중심기구인 중방에 의지하여 무신정권을 보전하였으므로 중방은 무신정권에 대한 항거를 방지하는 중심체가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명종대는 문반에 대한 탄압과 견제가 가장 심한 때이기도 하다.
집권무신들에 의해 의종의 同母弟인 명종이 새로운 국왕으로 추대되었다는 사실은 한편으로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국왕의 통치영역을 그들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음을 뜻한다. 무신집정과 중방의 견제 속에서도 국왕은 정치의 구심점으로서 정무의 수행이 가능하였고 무신에 대한 銓注權 행사와 과거제 운용에 영향력을 발휘함으로써 문신세력을 기반으로 한 국왕 자신의 통치영역을 어느정도 유지할 수 있는 과도기적 시기였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대외적으로 金나라와의 외교관계를 주관하고 天命의 대행자인 군주의 기본적 책무로서 국가적 행사나 천재지변을 당하여는 詔書를 반포하거나 사면권을 행사하여 정치의 쇄신을 기하려 하였다. 또한 국가와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종교의식, 불교행사 등도 귀족정치기와 마찬가지로 빈번히 행하여졌다.
국왕은 銓政(인사행정)을 행함에 있어「政案」에 대한 최후의 결재자였을 뿐만 아니라 측근에 학식이 뛰어난 문신관료를 거느리고 있어 무신들의 간섭을 받지 않은 채 과거제를 운용하여 급제자를 배출시켰다.
명종이 潛邸에 있을 때 꿈에 본 인물과 닮아 차례를 뛰어 넘어 중용된 閔令謨330)나, 翼陽公府의 典籤으로 있던 崔汝海331)가 명종이 왕이 될 꿈을 꾼 것을 아뢰어 이것이 인연이 되어 결국 현달하게 된 것이나, 일찍이 翰林院에 있을 때에 글을 잘 지어 왕태후가 乳瘡을 앓고 있으므로 왕이 기도하는 글을 짓게 했더니 그의 뛰어난 글로 말미암아 특별히 총애를 받아 輪林學士에까지 승진한 李純佑332)의 경우 등은 비록 무신집권기이지만 문신들의 전주권 행사에 영향력이 컸음을 알게 하는 사례이다. 더욱이 명종이 인물을 등용할 때 嬖臣·宦者들과 더불어 의논하여 엽관 운동과 뇌물이 공공연하게 행해짐으로써 정치기강의 문란을 초래했다는 기록333)은 이를 입증해 준다.
무신집권기는 사회적 혼란과 儒風이 부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문신들의 벼슬길인 과거는 계속되었다. 시험관인 知貢擧와 급제자는 座主와 門生의 관계를 맺어 일생을 통하여 긴밀하게 연결되었고 이를 중심으로 하나의 사회적 집단이 형성되어 갔으며 그 정점에 국왕이 존재하고 있었다. 무신집권기 국왕의 권위가 유지될 수 있었던 배경은 왕실과 깊은 연관을 가진 문신세력의 꾸준한 진출이 있기 때문이었다.
명종 때에도 귀족정치기에서와 같이 국왕은 司祭로서 왕실(조상)에 대한 제사 및 종교행사 등을 관장하고 천재지변이나 국가적 행사 그리고 왕실의 慶吊행사에 사면권을 발동하여 德治와 권위를 내세울 수 있었다.
국왕이 사제로서 왕실에 대한 제전 및 종교의식 등을 주관하는 것은 귀족정치기에 있어서는 의례적인 행사였으나, 왕권이 크게 위축된 무신집권기에 와서는 묵시적으로 왕실의 권위를 내외에 표출하고 인정받는 구실을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를 살펴 보기로 하자.
정월 경오 초하루에 景靈殿에 알현하였다. 9월 을유에 昌陵(世祖陵)에 알현하였다(≪高麗史≫권 19, 世家 19, 명종 2년).
정월 을축 초하루에 景靈殿에 알현하였다. 4월 을축에 친히 大廟에 禘祭하고 宣旨를 내려 ‘…赦令을 내리고 무릇 禘禮에 참여하며 三陵에 배알한 자에게도 또한 선물을 내리라’고 하였다. 5월 병신에 端午이므로 景靈殿에 알현하였다(≪高麗史≫권 19, 世家 19, 명종 3년).
10월 을유에 왕이 친히 大廟에 祫祭를 지내고 죄수를 용서하였다(≪高麗史≫권 20, 世家 20, 명종 16년).
9월 경신에 重陽이므로 景靈殿에 제향하였다(≪高麗史≫권 20, 世家 20, 명종 20년).
위의 사료는 왕실(조상)에 대한 제사의 기록이고, 한편 불교행사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6월 무오에 왕이 보살계를 大觀殿에서 받았다. 10월 宣慶殿에 百高座를 설치하고 仁王經을 읽었다. 을사에 승려 3만명을 공양하였다(≪高麗史≫권 19, 世家 19, 명종 원년).
2월 계축에 燃燈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有司가 태조의 옛제도에 의하여 2월 보름날로 연등할 것을 청하니 왕이 그 청을 어기기 어려워 좇았으나 다음해부터는 다시 정월 대보름으로 하게 되었다. 3월 기사 초하루에 왕이 靈通寺에 행차하여 세조·태조·인종의 眞影을 배알하였다(≪高麗史≫권 19, 世家 19, 명종 2년).
11월 계묘에 八關會를 베풀고 法王寺에 행차하였다(≪高麗史≫19, 世家 19, 명종 3년).
10월 병진에 百座道場을 대관전에 베풀고 中外로 하여금 승려 3만명을 공양하게 하였다(≪高麗史≫권 19, 世家 19, 명종 8년).
10월 임술에 仁王道場을 대관전에 베풀고 승려 3만명을 毬庭에서 공양하였다(≪高麗史≫권 20, 世家 20, 명종 11년).
4월 임인에 華嚴法會를 洪圓寺에서 성대히 베풀고 경인·계사년간에 죽은 사람들의 명복을 빌었다(≪高麗史≫권 20, 世家 20, 명종 13년).
고려에서는 새롭게 왕이 즉위하면 大廟에 친히 제사지낸 후에 사면을 반포하였다. 사면은 삼국시대부터 국왕만이 가질 수 있는 專權으로서 국왕은 이를 통하여 자신의 선정과 덕치, 그리고 권위를 내세울 수 있는 하나의 계기로 삼았다. 삼국시대 사면을 실시하는 계기는 주로 新王 즉위 때가 가장 많고 다음으로는 태자책봉, 순행, 천재지변 등이었다.334)
고려에서도 천재지변의 발생 때 국왕은 이에 대한 消災의 방법으로 의식적인 대책과 현실적인 대책을 실시하고 天意의 소재를 파악하여 이에 따랐다. 대개 전자의 경우는 스스로의 責己修德, 불교적인 祭齋의 거행, 도교의 醮齋 등을 거행하였으며, 후자의 경우에는 죄수에 대한 사면의 실시, 조세의 감면, 가중한 工役의 중지, 인사처리의 시정, 그리고 반란 음모에 대한 사전대비와 같은 구체적인 재해대책이 실시되었다.335)
명종 때에도 국왕은 고려왕실을 대표하여 금나라와의 외교관계를 주관하였다. 무신정권의 격변 속에서 즉위한 명종으로는 대외적으로 금나라 조정과의 事大外交를 통하여 실추된 국왕의 권위를 보장받으려 하였을 것이다. 고려와 금나라 양국은 정월과 11월에 정례적으로 사절을 교환하여 신년과 생신을 축하하였으며 이 밖에도 수시로 사절 왕래를 행하였다.
무신란 이후 대외적인 외교관계에 있어 커다란 변화는 무신들이 사절로 파견되는 것이 일반화되고 또한 수행하는 경우가 많아졌다는 점이다. 원래 문신귀족정치기에는 외국에 파견되는 사신과 書狀官은 문관에 한하였고, 그것도 유교적 지식이 뛰어난 관리에 한하였다. 무관의 경우 이에 임명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武擧人의 使行까지도 허락되지 않았다.336) 명종 때에 성품이 잔인하고 탐학하였던 무관출신 李英搢337)이 금나라에 사신가기를 요청하여 沿路에 재물을 요구하니 군현에서 다투어 뇌물을 준 것이 萬金이나 되었다는 사실이나, 금나라 사람이 “…너희 나라에 사람이 없어서 너를 고관으로 임명하여 使命을 받게 하였느냐”하면서 이르는 곳마다 모두 그를 업신여겨 꾸짖고 예로써 접대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사신의 관행이 무신란 이전과 크게 달라졌음을 알게 해 준다.
그리하여 명종 12년에 “무릇 금나라에 가는 서장관은 國學 翰林의 儒官으 로 才名이 있는 자를 보내도록 하라”338) 하였던 것은 곧 그동안 외국에 파견되는 사행의 잘못을 시정하려는 국왕의 의도를 말해주는 것이다.
328) | 貴族政治期 현종대 이후 북방민족과의 전쟁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무신의 지위를 향상시켜 갔으며 문종 30년 更定田柴科에서 무반의 대우가 좋아진 것이나 예종 4년에 武學齋가 설치된 것은 이러한 추세의 반영이다. |
---|---|
329) | ≪高麗史≫권 77, 百官 2, 西班 序 및 권 128, 列傳 41, 李義方. |
330) | ≪高麗史≫권 101, 列傳 14, 閔令謨. |
331) | ≪高麗史≫권 101, 列傳 14, 崔汝諧. |
332) | ≪高麗史≫권 99, 列傳 12, 李純佑. |
333) | ≪高麗史節要≫권 13, 명종 15년 6월. |
334) | 辛虎雄,<高麗以前의 赦免制度>(≪高麗刑法史硏究≫, 東國大 博士學位論文, 1986), 232∼235쪽. |
335) | 李熙德,<高麗時代의 天文觀과 儒敎主義 政治理念>(≪韓國史硏究≫17, 1977). |
336) | ≪高麗史≫권 16, 世家 16, 인종 9년 9월. |
337) | ≪高麗史≫권 100, 列傳 13, 李英搢. |
338) | ≪高麗史≫권 20, 世家 20, 명종 12년 6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