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충목왕대의 개혁정치
충목왕대의 개혁정치는 원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추진되었다. 원은 충목왕 즉위와 함께 내린 詔書에서 충혜왕대의 정치가 민생을 도탄에 빠지게 했다고 비판하고, 민생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혁신정치의 추진을 지시하였다.0384) 그 동안 왕위계승에 개입하는 등 고려의 자주적 정치활동을 견제하여 왔던 원이 이번에는 오히려 개혁정치의 추진을 주선하여 나선 것이다. 원으로서도 고려의 정국이 안정되고 민생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어야 종속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처럼 개혁을 요구한 것이지만, 그 배경에는 원 황실과 부원세력이 충혜왕 폐위에 따른 부담으로부터 벗어나면서 고려를 안정적으로 지배하려는 정치적 목적도 내재해 있었다.
일반적으로 충혜왕에 대해서는 왕이 淫行을 일삼았다는 사실 때문에 부정적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충혜왕대의 정치운영과 정책의 시행에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다. 왕은 상업활동의 진흥과 유통구조의 개선을 통해 재정을 확충하려 하였고, 사급전의 혁파 등 토지문제의 근본적 해결 방안을 제시하기도 하였으며 각종의 稅目을 설정하여 권력층을 견제하였다.0385) 원의 간섭으로 폐위당한 경험이 있던 충혜왕은 악소배를 비롯한 측근세력을 광범위하게 형성하여 왕권강화를 꾀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부원세력인 奇轍·高龍普등과 대립하게 되었다.0386) 즉 충혜왕 말기 고려 정국은 충혜왕 지지세력과 기씨 일족을 중심으로 하는 부원세력 간에 대립구도가 형성되고 있었다.
이같은 정치상황 속에서 충혜왕은 고용보 등에 의해 체포당하여 원에 압송되었고, 곧 岳陽縣에 유배되었다가 사망하게 된다.0387) 기철 등 부원세력은 충혜왕의 왕권강화로 말미암아 위축당하게 되자 왕을 체포케 하는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위기국면에서 벗어나고자 한 것이었다. 원으로서도 충혜왕의 정치가 그들의 종속정책에서 일정하게 벗어나는 것으로 받아들인 결과였다. 즉 충혜왕의 폐위에는 원의 고려에 대한 종속정책과 부원세력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개입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원은 충목왕 즉위 후 충혜왕대의 정치를 전면 부정할 수밖에 없었으며, 왕의 폐위에 대한 고려 정치세력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서라도 개혁을 표방할 수밖에 없었다.
원의 지원에 의해 즉위한 충목왕은 폐정을 혁신한다는 교서를 반포한 후 곧 충혜왕 측근세력의 숙청 작업을 진행시켰다. 충혜왕의 폐행이었던 鄭天起 등을 유배보내고 악소배의 고신을 박탈한 조치가0388) 그것이다. 이와 함께 개혁정치를 추진할 수 있도록 인사개편도 단행되었다. 이번의 인사에서는 金倫·李齊賢 등 문벌출신 및 명망있는 인물을 포함하여 원로급의 중신들이 많이 등용되었다. 비록 이번의 인사가 원의 주도로 이루어짐으로써 원의 입장을 반영해줄 수 있는 蔡河中과 같은 인물이 수상에 임명되기는 했지만, 당시로서는 평가할 만한 인사개편이었다.0389)
이처럼 개혁적 분위기가 조성되는 가운데 정치세력들도 이에 부응하여 나름대로의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이제현은 충목왕 즉위년(1344) 5월 도당에 상서하는 형식으로 11개 항목의 개혁안을 제시하였다.0390) 이 개혁안에서 이제현은 경연을 열어 재상과 정치운영을 논의하고 훌륭한 인재를 지방관에 임명할 것을 강조하였으며, 鷹坊과 內乘의 혁파, 녹과전의 부활, 정방의 혁파 등을 건의하여 당시 사회경제적 폐단과 정치체제의 문란을 바로잡으려 하였다. 비록 이러한 개혁안이 정부에 의해 곧 바로 수용되지는 않았지만, 이후 개혁정치에 일정하게 반영되고 있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개혁안이었다.
충목왕대 개혁정치는 즉위년 말부터 점차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 우선 10월에 다시 한 번 인사개편을 단행하여0391) 부원세력이었던 채하중을 수상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王煦(權載)와 김윤을 각각 우정승과 좌정승에 임명하였다. 개혁을 추진할 수 있도록 정부구성을 새롭게 한 것이다. 이어서 12월에는 정방을 혁파하고 녹과전을 복구하는 개혁조치가 단행되었고, 이듬해 8월에 가서는 도평의사사의 건의를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토지분급제의 해결방안이 제시되었다. 즉 경기 지역에서 半丁을 혁파하여 이를 녹과전으로 전환하는 한편, 구분전 등 각종의 토지를 公文이나 元籍에 의거하여 지급하고 정액 외의 사급전은 모두 환수하여 職田으로 돌리거나 국가가 수조케 하였다.0392)
그러나 이같은 개혁조치가 현실화되는 데는 아직도 많은 장애 요인이 남아 있었다. 충혜왕 측근세력은 제거되었지만 충목왕 즉위에 협조했던 부원세력 등 반개혁세력이 여전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 반개혁세력은 개혁을 주도하고 있던 인물들을 끊임없이 견제하여 마침내 왕후를 수상직에서 물러나게 하는 데 성공하였다.0393) 이러한 인사파동을 볼 때 충목왕 즉위초 의욕적으로 추진되었던 개혁은 1년도 못되어 좌절된 것으로 보인다.
충목왕대 개혁정치가 본격적으로 실시되는 것은 충목왕 3년(1347) 2월 정치도감이 설치되면서부터이다. 정치도감은 재추급의 판사 4명, 사 9명, 부사 7명, 판관 12명, 녹사 6명 등으로 구성된 강력한 개혁기구였다.0394) 이 기구의 운영을 총괄했던 직책인 판사직에는 왕후·金永旽·安軸·金光轍이 임명되었고, 개혁의 실무를 담당했던 그 속관에는 田祿生 등 34명이 임명되었다. 이들 整治官은 대부분 과거에 합격한 인물들로서 학문적 기반과 현실인식을 공유하면서 개혁정치의 선두에 서 있었다. 원에서도 정치도감의 설치에 맞춰 사신을 보내어 왕후와 김영돈에게 옷과 술, 寶鈔를 하사하는 등 정치관의 개혁 활동을 격려하였다.0395)
정치도감의 설치에 맞춰 개혁안도 작성되었다. 그것은 ‘整理都監狀’으로 제시되었다. 모두 11개의 항목으로 구성된 이 개혁안은0396) 정치와 경제, 사회분야에서 드러나고 있던 폐단을 지적하고 이를 시정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정치분야에서는 지방관의 탐학과 정동행성 등 원 간섭기구의 작폐가, 경제분야에서는 토지탈점·고리대·壓良爲賤에 의한 농장 형성의 폐단과 수취체제의 문란이, 사회분야에서는 피역의 현상 등이 구체적으로 지적되었다. 요컨대 이 개혁안은 농장의 폐단과 수취체제의 문란 등을 바로잡아 국가재정과 민생문제를 해결하고 도평의사사의 기능을 강화하여 행정체제를 정비하고 정치기강을 확립하고자 한 것이었다.
정치도감은 이러한 개혁안을 바탕으로 하여 곧 개혁작업에 착수하였다. 우선 李敏 등 정치관을 각 도에 파견하여 민전을 측량케 하였다. 토지문제 해결의 기초를 마련하기 위한 조치였다. 정치관의 활동은 매우 엄격하였다. 楊廣道에 파견되었던 정치관 金㺶는 利川縣吏가 당시 권력층이었던 채하중 등에게 공전을 뇌물로 준 사실을 밝혀내고, 현리의 귀를 잘라 이를 교훈으로 삼기 위해 도내에 돌리게 할 정도였다.0397)
사회경제적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그 폐단의 주체가 되고 있던 부원세력 등 권력층을 제거하거나 무력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정치도감은 이들 부원세력의 숙청작업을 시작하였다. 맨 먼저 奇皇后의 친척인 奇三萬과 奇柱가 숙청의 대상이 되었다. 기삼만은 토지와 인구를 점탈한 죄목으로, 기주는 권력을 남용하여 해악을 끼쳤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순군에 수감되었다.0398) 기삼만의 경우는 수감되었다가 옥사할 정도였다. 盧頙과 全英甫도 숙청의 대상이 되었다. 이들은 불법으로 인구를 은닉했거나 압량위천했다는 죄목으로 처벌되었다.0399)
그러나 정치도감의 개혁활동에 대한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征東行省理問所가 저항의 전면에 나선 것이다.0400) 이문소는 기삼만이 옥사한 것을 구실로 정치관인 徐浩·전녹생을 수감하는 등 개혁세력에 대해 반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왕후 등의 강력한 항의로 정치관은 석방되었지만, 거침없이 추진되고 있던 개혁작업에 제동이 걸리게 된 것이다.
정동행성이문소의 제동으로 개혁에 차질을 빚게 되자 왕후 등은 다시 한 번 원의 지원을 받아 이 문제를 해결하고 개혁활동을 지속시키고자 하였다. 왕후와 김영돈이 元 順帝를 만나려 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마침 원에서는 중서성 右司都事 兀理不花를을 파견하여 충목왕과 왕후·김영돈에게 옷과 술을 하사하는 등 개혁활동을 격려함으로써0401) 개혁세력의 입지가 강화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이문소도 수감했던 정치관들을 석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충목왕 3년(1347) 7월에 접어들면서 이문소는 정치관을 체포, 수감하는 등 다시 공세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는 이문소를 중심으로 결집하고 있던 개혁 저항세력들이 원을 상대로 기삼만의 죽음을 부각시키고, 개혁의 부당성을 주지시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결과일 것이다. 마침내 원은 이문소의 입장을 받아들여 정치관들을 신문하기 시작하였고, 곧 白文寶를 비롯한 정치관 16명을 杖刑에 처하며0402) 그 동안 정치도감의 활동이 정당하지 못한 것으로 판결하고 말았다. 부원세력이 개혁의 대상으로 부각되자 원은 개혁정치의 지속이 고려에 대한 지배에 걸림돌로 작용할까 우려하여 서둘러 정치도감의 활동을 저지함으로써,0403) 이제 충목왕대의 개혁정치도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하고 좌절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이후 원은 정치도감을 다시 설치케하는 등 개혁활동의 재개를 요구하였고,0404) 김윤·이제현·朴忠佐 등도 개혁의 정당성을 강조하면서 개혁의 지속을 주장했지만0405) 정치도감의 개혁활동은 더 이상 전개되지 않았다.
0384) | ≪高麗史≫권 37, 世家 37, 충목왕 즉위년 4월 병술. |
---|---|
0385) | 충혜왕대의 여러 경제정책에 대해서는 전병무,<고려 충혜왕의 상업활동과 재정정책>(≪역사와 현실≫10, 1993) 참조. |
0386) | 金塘澤,<高麗 忠惠王과 元의 갈등>(≪歷史學報≫142, 1994), 17∼20쪽. 金光哲,<고려 충혜왕의 왕위계승>(≪釜山史學≫28, 1995), 113∼118쪽. |
0387) | ≪高麗史≫권 36, 世家 36, 충혜왕 후4년 11월 갑인·후5년 정월 무진. |
0388) | ≪高麗史≫권 37, 世家 37, 충목왕 즉위년 윤2월 병인·정묘. |
0389) | 閔賢九,<整治都監의 設置經緯>(≪論文集≫11, 國民大, 1977), 86쪽. |
0390) | ≪高麗史≫권 110, 列傳 23, 李齊賢. ≪高麗史節要≫권 25, 충목왕 즉위년 5월. |
0391) | ≪高麗史≫권 37, 世家 37, 충목왕 즉위년 10월 갑자. |
0392) | ≪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
0393) | ≪高麗史節要≫권 25, 충목왕 원년 12월. |
0394) | ≪高麗史≫권 77, 志 31, 百官 2, 諸司都監各色 整治都監. |
0395) | ≪高麗史節要≫권 25, 충목왕 3년 2월. |
0396) | 이 개혁안의 내용과 그 성격에 대해서는 閔賢九,<整治都監의 性格>(≪東方學志≫23, 1980) 참조. |
0397) | ≪高麗史節要≫권 25, 충목왕 3년 3월. |
0398) | ≪高麗史節要≫권 25, 충목왕 3년 3월·4월. |
0399) | ≪高麗史≫권 124, 列傳 37, 嬖幸 2, 全英甫 및 권 131, 列傳 44, 叛逆 5, 盧頙. |
0400) | ≪高麗史節要≫권 25, 충목왕 3년 4월. |
0401) | ≪高麗史節要≫권 25, 충목왕 3년 6월. |
0402) | ≪高麗史節要≫권 25, 충목왕 3년 7월·10월. |
0403) | 李益柱,<忠穆王代 改革政治와 新興儒臣의 대두>(≪高麗·元關係의 構造와 高麗後期 政治體制≫, 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6), 194쪽. |
0404) | ≪高麗史≫권 37, 世家 37, 충목왕 3년 10월 갑오. |
0405) | ≪高麗史節要≫권 25, 충목왕 4년 정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