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이성계의 집권과 고려왕조의 멸망
우왕 14년(1388) 威化島回軍을 성공리에 마친 李成桂는 우왕대 사회경제적 폐단을 심화시킨 李仁任政權을 무너뜨리고 실권을 장악해 온 崔瑩마저 제거함으로써 고려의 마지막 집권세력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집권은 우왕대 집권중신들과는 달리 군사적 실권을 지니고 있었으며 아울러 개혁에 대한 청사진을 갖춘 강력한 것이었다. 즉 趙浚·鄭道傳 등 개혁의지가 투철한 개혁파 사대부들과 함께 정치·경제·군사 전반에 걸친 개혁을 단행, 성공시킴으로써 모든 실권을 장악하였다. 아울러 전제개혁에 반대입장을 보인 世族뿐 아니라 온건파사대부까지 일련의 정치적 숙청과정을-예를 들면 金佇의 獄, 尹彛·李初의 獄-통해 제거하였다.
이런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공양왕은 자신의 마지막 보루였던 鄭夢周마저 그들에 의해 살해되자 위기감을 절감하고 왕권을 이성계에게 넘겨주니 이로써 고려왕조는 34대 475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0585) 이에 이 글에서는 위화도회군 이후 일련의 개혁정치를 통해 실권을 강화해 나간 이성계의 권력집중화 과정을 살펴 고려왕조의 멸망에 대한 설명을 대신하고자 한다.
0585) | 조선왕조 창업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대략 ① 易姓革命論에 의한 李成桂家의 和家爲國說 ② 新興士族과 有功武將의 대두에 의한 執權勢力交替說 ③ 조선건국의 주도군으로 開國功臣이 정치적 이념이나 소신을 갖고 權門世族을 타도한 혁명 ④ 역사적으로 의미를 부여할 필요조차 없는 단순한 왕조전복 등으로 나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요인들은 모두 조선왕조 건국에 복합적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朝鮮建國의 성격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연구가 있다. 李相佰,≪李朝建國의 硏究≫(乙酉文化社, 1949). 韓永愚,<朝鮮建國의 政治·經濟基盤>(≪한국사≫9, 국사편찬위원회, 1973 ;≪朝鮮前期社會經濟史硏究≫, 乙酉文化社, 1983). 朴天植,<朝鮮 開國功臣에 對한 一考察>(≪全北史學≫1, 1977). 鄭在勳,<朝鮮王朝 建國過程에서의 舊勢力>(≪考古歷史學志≫2, 東亞大, 1986). 趙啓纘,<朝鮮建國과 尹彛·李初事件>(≪斗溪李丙燾博士九旬紀念 韓國史學論叢≫, 知識産業社, 1986). 朴龍雲,≪高麗時代史(下)≫(一志社, 1987). 劉璟娥,≪鄭夢周의 政治活動 硏究≫(梨花女大 博士學位論文, 19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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