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척불양유책을 통한 사원경제의 흡수
고려 태조 王建의 ‘訓要 10條’에 명시되어 있듯이 국초 이래 추진되어 온 崇佛策으로 고려시대 불교는 호국불교로서 융성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세속과 타협하면서 여러 가지 사회경제적 폐단을 야기하였다. 더욱이 왕실의 비호 아래 각종 불사의 성행과 사탑의 남설, 불법적인 토지점탈로 백성들의 생활을 궁지로 몰아넣고 국가의 재정까지 위협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불교계의 타락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마침내는 그에 대한 배척운동이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이러한 배불운동은 단순한 종교적·사상적 문제로서가 아니라 정치세력과 결부되면서 한층 과격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원래 고려시대 유교와 불교는 서로 조화를 이루며 인식되어 왔다. 국초에 유교를 통한 통치이념을 정립시킨 崔承老도 “불도는 修身의 근본이며, 유교를 행하는 것은 治國의 근본”이라고 하였으며 그 후 14세기 전반 성리학 수용 초기에도 유자들에게는 유불조화의 자세가 견지되고 있었다. 李齊賢이 “불교의 도는 자비와 희사로써 근본을 삼는 바, 자비는 仁 가운데 있는 것이며, 희사는 義를 행하는 일이다”라고 하였고,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李穀은 “儒者는 正을 주로 하니 그것으로 修身齊家 治國平天下에 이르며, 불자는 觀을 중시하니 그것으로 見性成佛에 이른다”며 양교의 핵심이 일치함을 지적한 바 있다. 하지만 崔瀣나 李穡 등에 의해 타락한 승려들의 축재와 인심의 문란 등의 문제가 지적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입장은 불교 교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폐단을 지적하고 시정을 촉구하는 정도의 것이었다.0599)
이러한 불교폐단에 대한 지적은≪朱子家禮≫의 보급과 장려를 통해 성리학을 사회규범의 기준으로 삼고자 했던 鄭夢周에 이르러 보다 철저해지고 사상적 측면과 경제적 폐단이 아울러 통박되기에 이르렀다. 이는 명분과 의리를 강조하고, 정통과 이단을 구분·배척하는 의식이 강한 朱子性理學에 대한 연구가 심화된 결과였다. 그러나 그는 개인적으로 화엄경·능엄경 등 불경에 대한 이해가 깊었고, 治國·治心의 道로서 불교에 대한 유교의 우위를 주장하였지만 불교 자체의 말살까지는 요구하지 않았다.0600)
그러다가 정몽주에게서 성리학을 배운 政堂文學 鄭道傳이 공양왕 3년(1391) 척불상소를 올렸다. 이에 대한 찬반상소가 빗발쳤고, 정도전의 척불상소는 불교중심사회에서 유교중심사회로 전환되는 이정표가 되었다.0601) 정도전에 뒤이어 성균관대사성 金子粹·성균박사 金貂·성균생원 朴礎 등이 연이어 斥佛疏를 올렸는데 이 가운데에도 가장 극렬한 것이 김초와 박초였다.
김초는 불교의 禍福說을 반박하고 승려들의 비행을 비난하면서 불교계 자체를 혁파하여 승려들은 군인으로, 사찰과 소속자산은 국가재정으로 귀속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더하여 박초는 불교에 대하여 三綱五倫에 어긋나는 ‘夷狄의 敎’이고 ‘無父無君의 敎’라 하면서 異敎에 대한 儒家의 상투적 욕설을 기탄없이 털어놓으며 다음과 같은 廢佛疏를 올렸다.0602)
중들을 강제로 고향으로 돌려보내 其人에 편입시킨 후 兵役과 賦役에 충용하고, 그들의 거처를 민가로 만들어 호구를 증가시키며, 불서를 불살라 길이 그 근본을 끊을 것이며, 나누어준 田土는 軍資寺에게 맡겨 군량을 조달케 하십시오. 소속노비는 都官에게 맡겨 各司·各官에 분배케 하며, 그 銅像·銅器는 軍器寺에 귀속시켜 무기를 제조하며 그들이 쓰던 물건은 禮賓寺에 속하게 하여서 객사·객관에 나누어 쓰게 한 뒤에 禮義로써 가르치고 道德으로써 기르면 몇 해 지나지 않아 백성의 뜻이 안정되어 교화가 보급되고 창고가 충만해져 나라의 용도가 원활하게 될 것입니다(≪高麗史≫권 120, 列傳 33, 金子粹).
위와 같이 박초는 풍속교화와 국가재정의 확보를 위한 불교폐지를 주장하였을 뿐 아니라 당시 척불에 대항하여 불교를 옹호하는 상소를 올린 전 전의부정 金琠을 통렬히 비난하여 저자에 車裂하여 마땅하다 하고, 척불을 주장하던 정도전에 대하여는 “이단을 배척하고 邪說을 종식시켜 天理를 밝히고 인심을 바르게 한 東方의 眞儒”라 극찬하였다.
그러나 김초와 박초의 상소는 결국 공양왕의 분노을 불러일으켜 김초 등은 巡軍獄에 수감되어 사형될 처지까지 이르렀다. 이들은 다행히 정몽주·鄭擢의 구원으로 사면되었다. 이와 같은 척불상소를 통해 성리학자들은 불교세력을 일축하는 한편 사원이 소유한 경제력을 몰수하고자 하였다.
고려말 사원의 토지확대는 권신들의 사전확대와 마찬가지로 토지탈점과 겸병 및 賜牌 등을 통해 이루어져 그 규모는 10만 결 이상으로, 전 농토의 1/8정도를 차지하고 있었다. 원래 사원이 소유한 토지는 국가에 대한 전조를 부담해야 하는 것이었으나 점차 면세지가 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국가로서는 심각한 문제였다.
이에 우왕 14년(1388) 조준의 1차 상서에서 寺社田柴의 지급 대상 사찰로 태조 이래 5大寺와 10大寺 및≪道詵密記≫에 기록된 것 이외의 사찰은 과전지급 대상에서 제외시켰으며,0603) 공양왕 3년 5월의 과전법에서는 사원에 대한 토지 시납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이것은 사원경제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원경제의 기반을 약화시킨 적극적인 개혁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개혁파에 의한 폐불상소와 사원의 경제기반 몰수는 사전혁파와 궤를 같이 하는 것이며, 훗날 조선시대 抑佛政策을 선도한 것이라 하겠다.
0599) | 이들은 모두 불교의 폐단에 대해서는 비판적 입장을 보였지만 개인적으로는 불교 자체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李銀順,<李穡의 思想과 社會改革論>,≪外大史學≫4, 1992 및 高惠玲,<崔瀣(1287∼1340)의 생애와 사상>,≪李基白先生古稀紀念 韓國史學論叢(上)≫, 一潮閣, 1994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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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0) | 劉璟娥, 앞의 책, 68∼70쪽. |
0601) | 宋昌漢,<鄭道傳의 斥佛論에 대하여>(≪大丘史學≫15·16, 1978). 金忠烈,<麗末 性理學의 輸入과 形成過程>(≪高麗儒學史≫, 高麗大 出版部, 1984), 156∼209쪽. |
0602) | 宋昌漢,<金貂의 斥佛論에 대하여>(≪大丘史學≫27, 1985). ―――,<朴礎의 斥佛論에 대하여>(≪大丘史學≫29, 1986). |
0603) | ≪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신우 14년 7월 大司憲 趙浚等 上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