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향리의 계층분화
가) 잔류 향리역의 고역화
13세기 중엽 몽고의 고려 침략은 고려의 사회질서를 근본적으로 흔들어 놓았다. 지배세력의 변동과 더불어 지방사회는 수십 년간의 대몽항쟁으로 말미암아 국토는 피폐해지고 촌락은 황폐하여 많은 유망민이 생기게 되었다. 아울러 향촌사회의 붕괴는 향리층의 존재 토양을 잃게 하였다. 즉 고려 향리는 혈연성을 바탕으로 지방에 토착하여 지방행정의 실무를 담당함으로써 지배적 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그들의 권위와 세력은 많은 전란과 고려에 대한 원의 간섭에 따른 향촌질서의 붕괴와 함께 무너졌고 향역 자체의 고역화를 경험하여야 했다.≪고려사≫식화지 田制 畓驗損失條의 충숙왕 5년 하교를 보면, 주군에는 원과 결탁한 권세가의 대규모 농장이 있어 그들이 조세를 내지 않자 조세징수 담당자인 향리가 이를 대신 충당하다가 해결하지 못하여 자기의 지위를 지키지 못하고 도산 유망하는 일이 속출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렇게 자기의 직무를 정상적으로 수행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들의 역은 고역화될 수밖에 없었다.
또 향역이 고역화 내지 천역화되는 경우는 기인역의 변화에서도 살필 수 있다.058) 주지하다시피 기인은 고려 초 향리의 자제로서 선상되어 지방세력의 국왕에 대한 군신간의 담보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고려 초 지방호족의 자제로서 상경한 이들은 국왕의 측근과 결혼이 이루어지고 고위 관등이 주어지는 등 상당한 대우를 받았다. 따라서 초기 기인은 일정한 身役 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문종 때의 其人選上 규정을 보면, 상경향리로서 노동의 인적 자원으로 신역을 갖는 그 기능이 제도화되고 있다. 반면 입역에 따른 同正職 수여나 加職을 통한 일정한 신분적 지위를 누렸다.
그런데 고려 후기에 전국적으로 지방관 파견이 확대됨에 따라 토착적 세력을 유지하던 향리의 정치·사회적 지위 전락과 더불어 기인역 또한 고역으로 변하였다. 고종 43년(1256)에는 租賦의 감소에 따른 경비보충을 위한 閑地 경작에 기인이 동원되고 있으며,059) 충선왕 때에는 주로 궁실의 조영과 관부의 사령역을 맡아보는 등으로 그 역이 고역화되었다.060) 나아가 충숙왕 5년 (1336)에는 기인의 역사가 노예보다 심하여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逋亡함이 끊이지 않을 정도까지 되었다.061) 이러한 기인역의 고역화 내지 천역화는 향리의 향역 변화의 실태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즉 향리신분층이 시대변천에 편승하여 중앙관료로 상승하는 부류가 존재하는 반면, 지방에 잔류한 一群의 향역은 상대적으로 고역이 되었으며 이는 기인역을 통해 잘 반영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향역의 고역화 내지 향리들의 지방으로부터의 유망은 심지어 향리들이 한집도 남아있지 않은 군현이 출현하는 현상을 빚기도 하였다.062)
그런데 이렇게 고역화된 향역을 면하고자 하는 노력은 호장 등 상층 향리들이 우선하였다. 그리하여 지방통치는 자연 지방관이 남아있는 하급 향리들을 직접 운용하여 수행할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새로이 편제되는 실제 향역은 독자성을 상실한 채 고역화될 수밖에 없었으며 상대적으로 향리의 신분 자체도 천시되어 갔다.
나) 사족화 동향
고려 후기 향리층의 사족화 동향은 과거 이외에 권문세족에의 투탁과 문과에 비해 품관으로 나아가기가 보다 수월한 잡과로의 진출, 기타 군공 등에 의한 동정직·첨설직·封君 등을 통한 非實職品官化의 진로 등으로 대표된다.
먼저 몽고의 침략을 겪은 후 원 간섭기에 권문세족이 멋대로 권력을 부리자 향리세력은 향역의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상층 향리들은 과거 등 정규과정을 통하여 신분상승을 꾀하기보다는 권문세족에 붙어 중앙으로 진출하는 경우가 빈번하였으며, 이 결과 그들은 京職을 대규모로 받게 되었다. 즉,≪고려사≫선거지 향직조의 충숙왕 12년 교서를 보면, 지방 향리와 그 자제들이 권세가에게 붙어 本鄕吏役을 탈피하여 중앙관직을 차지하는 사례가 많았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지방의 호구가 줄어드니 관직 7품을 한계로 다시 향역으로 돌려보내라 하고 있다. 이 기사에서 지방 향리들이 권문 세족의 힘을 빌려 많은 수가 중앙으로 진출하였던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이 들 중앙 진출세력은 지방에서 강력한 세력기반을 가지고 있던 호장층이었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향리의 본역으로부터의 이탈은 공민왕 이후 더욱 심화되었다. 예를 들면 正科 대신 보다 쉬운 잡과로의 진출을 통한 향리의 면역이 심하게 나타나고, 홍건적의 침입과 왜구의 침략에 따른 전공에 따라 첨설직이 남발됨으로써 이에 편승한 향리들은 당대를 이어 자손대에는 사족에 편제되어 재지사족으로 변하였다. 앞에 든≪고려사≫향직조 공민왕 12년 5월 교서의 내용을 보면, 많은 향리들이 잡과로 출신하여 본역을 탈피하자 지방통치가 원만히 이루어질 수가 없었고, 그 결과 향읍이 황폐됨으로써 국력 동원에 지장을 초래하게 되었다. 이에 製述·明經 이외의 잡과를 통한 향리의 진출을 금지하고 있다.
이와 아울러 우왕 9년(1383) 左司議 權近 등의 진언에서도 향리들의 본역 이탈과 잡과를 통한 중앙 진출이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063) 實才가 없는 향리들도 잡업으로 면역함으로써 지방 향리의 수는 날로 줄어들어 지방행정의 업무수행에 곤란을 받을 정도였다. 이러한 상황으로 볼 때 당시 향리들의 중앙 진출을 통한 사족화의 경향이 일반적이었다. 특히 잡과에 의한 향리의 면역은 충숙왕 12년의 교지 내용에도 나오고 우왕 9년에 다시 언급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향리의 잡과를 통한 면역은 실제에 있어서는 60년 가까운 기간에 비록 공민왕 때와 같이 금하기도 하고 통제를 가하고자 하는 논의가 있기도 하였으나 커다란 제약없이 진행되었다.
공양왕 원년(1389) 趙浚의 上言에서도064) 향리세력 일반의 면역 내지 신분 상승의 제유형을 통한 향역의 변화 실태를 엿볼 수 있다. 고려 말기에 있어 향리들은 군공을 칭하거나 거짓으로 관직을 받고 잡과로 나아가 면역을 하거나, 권세가에게 투탁하여 品秩을 올려 달관하고 있는 경우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나타나 이러한 향리의 신분상승 내지 향역의 변화가 일반적인 사회현상이 되었다. 이리하여 지방사회가 텅비고 황폐해짐으로써 향리층의 還役을 도모하고 더 이상 어떠한 형태로든지 사족화하지 못하는 조치를 취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조준은 3정 1자로 3·4대 면향이 되었더라도, 文契를 살피고 군공과 잡과 진출 내용을 조사하여 일정한 기준에 미달하는 경우는 향리역으로 환역케 하고자 하였으며, 첨설직의 하위자도 역시 이에 해당되었다. 이렇게 향역의 환역 조처가 강력히 대두되었음은 당시 시대상황의 혼란과 변동에 따라 항상 신분 상승을 꾀할 수 있었던 향리층을 중심으로 한 신분체제의 일대 변혁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이 밖에도 첨설직을 통한 대규모의 향리층의 사족화가 이루어졌다.065) 첨설직은 공민왕 3년에 군공포상을 위해 수여되었는데 매우 남발되었다. 홍건적과 왜구의 침략으로 인해 고려는 전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지방세력의 물적·인적 자원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그러나 고려 조정은 국용이 고갈되어 군공자에게 물질적 포상도 할 수 없었고, 한계가 있는 관직에 유공자마다 실직을 줄 수도 없었기 때문에 부득이 첨설직을 수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향리세력들은 여말의 시대상황에 따라 대대적으로 첨설직을 받음으로써 비실직 품관으로서 사족화되었으며, 여기서 지방세력의 사족과 이족의 분화가 더욱 심하게 되었다. 아울러 사족화하지 못한 향리세력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법전체제로 신분이동이 억제됨에 따라 중인신분으로 고정화되어 자기도태 현상을 보였다. 그런데 첨설직을 받을 수 있었던 계층은 군현행정을 장악하여 조세를 징수하고 역역을 동원하며 주현군의 장교직을 맡아 전란에 동원되었던 호장층의 상급 향리가 대종을 이루었다고 판단되며, 하급 향리층은 잔류하여 記官層을 중심으로 새로운 향리조직으로 재편성되어 갔다.
이상 살펴본 고려 후기 향리의 신분동요는 다음과 같이 성격을 규정지을 수 있다. 많은 향리층들이 사족화하고 이들이 지방에서 일정한 경제적 기반을 가지고 여론을 조성할 수 있는 사회세력으로 성장하였다는 양적 팽창은 곧 고려사회 질서체제에 있어 그들의 존재가 질적으로 상승 변화될 수밖에 없게 하였다. 우리는 흔히 귀족제사회로부터 관료제사회로의 전이의 특징을 먼저 신분보다 개인의 능력을 우선하는 지배집단의 형성을 들고 있다. 즉 소수 가문에 의해 관직이 세습적으로 독점된 것이 아니라, 점차 보다 많은 가계집단들이 제한된 관직을 놓고 개인의 능력에 따라 진출함이 그 객관적 특성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관직에 나아갈 수 있는, 보다 많은 가계집단이 토착적인 향리층의 사족화를 통하여 이루어졌다함은 새로운 지배집단의 질적 비약이 이루어졌음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새로운 사회질서를 요구하게 되었고, 그 외형이 토지개혁과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 교체로 나타났으며, 이들 새로운 지배층은 내부적으로 실질적이고 숫적으로 팽창된 양반관료층으로 정착되었다. 물론 양적 팽창에 참여하지 못한 잔류 향리는 새로운 질서체제에 의해 도태된 지위를 견지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