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향리의 신분상승
가) 배 경
고려 후기는 어느 시대보다도 집권세력의 교체가 빈번한 시기였다. 의종 27년(1170) 무신의 난으로 무신정권이 성립되어 權臣의 교체가 빈번하였고, 몽고의 침입과 원 간섭기를 겪으면서 자주적인 개혁정치의 추진과 좌절의 번복을 체험하였다. 더욱이 공민왕 이후 반원 개혁정치와 왕조의 교체를 맞이하는 등 시대적 변화가 무쌍하였다. 이러한 시대정황의 흐름은 당시대의 정치·사회적 중심세력의 교체를 가져왔으며 그 상황 하에서 지방세력인 향리층의 존재는 중앙 정치세력화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춘 인적 자원집단으로 주목되었다. 무신정권에 의해서 기존의 문벌귀족이 도태됨으로써 무인들만으로 통치체제를 구축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새로운 관인층이 필요하게 되었다. 여기에 향리세력은 경제적으로는 중소지주층으로 유학적 지식과 행정담당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던 만큼, 이들은 무신정권의 행정적 공백을 메울 수 있는 훌륭한 인적 자원으로 대두되었다. 그리하여 향리출신의 이들은 점차 중앙 정치무대에서 꾸준히 기반을 다져 나갔으며 정치지배세력으로서의 신진사류층으로 성장하여 갔다.
다시 말하면 문신귀족중심의 문벌통치를 종식시킨 무신정권이었으나 무인들만의 통치로는 국가운영에 한계가 있었다. 이른바「庚寅의 亂」으로 “文冠 이면 胥吏라도 종자를 남기지 말라”하며 문신을 살륙하고, 또 명종 3년 (1173)에 일어난 金甫當의 亂을 계기로 문신에 대한 2차의 대규모 학살이 저 질러지고 무신의 전횡은 일시 행정의 공백상태를 초래했다. 이에 국가운영을 위한 행정 공백을 메우고 관료기구를 원활하게 가동시키기 위해서는 실무행정 능력을 보유한 인물이 필요하였다. 이에 따라 대대로 지방에서 행정업무를 수행해 온 향리층의 중앙진출이 전보다는 용이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더욱이 무신정권기 對金外交關係는 무인들의 식견으로는 어려웠던 것이 다. 무신들은 문신정권을 타도하고 국왕을 멋대로 폐위하면서도 다음 왕을 옹립하여 왕위를 존속시켰다. 이러한 왕의 교체에 있어 금나라의 승인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그 왕위교체의 정당성을 피력할 수 있는 문인관료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무신정권의 외교·행정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무신정권은 의종 때 소외되었던 문신을 등용하고 일부 문벌귀족을 회유하여 새로운 관인을 확보하였다. 특히 독자적인 집권태세를 구축하기 위해서 신진사류를 등용하였다. 즉 과거를 자주 실시하고 합격자수를 증가시켰던 것인데, 이에 편승하여 지방향리 자제들이 대거 중앙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귀족정치의 난숙기라 할 수 있는 예종·인종·의종 3대 65년간에 설행된 과거횟수는 44회로, 취사인원이 1,248명에 달해 1년에 19.2인을 급제시켰다. 이에 비하여 무신집권기인 명종부터 고종 때까지 89년간에는 57회 과거 시행으로 1,974인을 급제시켜 1년에 22.2인을 취사시킨 셈이 된다. 따라서 무신정권기 과거 설행과 취재가 귀족정치시대보다 훨씬 상회하고 있다.016) 이러한 사실은 곧 무신정권 하에서 새로운 문신이 많이 배출되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당시 문신세력이 약화된 상황에서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집단으로서, 지방에 토착하여 대대로 행정업무를 관장하였고 문학적 교양을 쌓았으며 지방 주현군을 지휘하였던 향리층의 존재가 주목되었다. 곧 향리집단은 당시 문신으로 진출하는 가장 유력한 인적 자원집단이었던 것이다.
또한 무신정권의 성립으로 미천한 출신의 무신들이 권좌를 장악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기존의 신분관념이 와해되었으며, 지방에서는 농민·천민의 난이 지속되었다. 이러한 지방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서 무신정권은 지방에서 지배적 신분층을 이루고 실제 통치력을 발휘하였던 향리세력의 도움을 필요로 하기에 이르렀다. 이 또한 향리층이 중앙에 진출하는 한 계기가 되었다. 특히 이러한 무신정권과 향리세력과의 연계는 외관 임용에 문무교체제가 시행되어 무신이 지방관에 임용됨으로써 더욱 원만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최씨정권시대에 들어서면서 신진문인의 양성과 등용이 더욱 활기를 띠었다. 李仁老·李奎報·琴儀 등은 崔忠獻의 문사우대로 그의 측근에서 활동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문인들의 활동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崔瑀는 政房과 書房을 설치하여 향리출신 문인들이 그들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함과 아울러 계속적인 문사 배출의 교량적 역할을 하게 하였다. 최씨정권의 문사우대정책으로「文武雙全」의 통치조직은 더욱 강화되었으며, 그만큼 지방세력이 중앙에 진출할 수 있는 문호가 넓어졌다. 이로써 독자적인 정치기반을 구축할 수 있는 신진문인층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정치·외교적 차원에서 새로운 정권의 창출에 이은 원만한 체제운영 담당자로서 신진관인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이러한 시대적 요구는 당시 향리층이라는 사회집단이 중앙관료집단으로 신분이 상승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향리집단 자체내에서는 계층분화를 가져오는 결과를 낳았다.
한 사회계층의 신분유동은 먼저 그에 상응하는 경제적 기반을 바탕으로 하여 그를 유지하고 축적하며 나아가 보다 나은 경제생활을 추구함에 따라 진행된다고 할 때, 그 경제적 배경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향 리층은 신분상승을 꾀함에 있어 무엇보다도 풍부한 경제적 기반이 필요하였다. 지방 토호세력의 성격을 지닌 향리층은 그들의 지배신분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물적 토대를 견고하게 가져야만 했다.
일반적으로 고려조에 있어서는 일정한 직역에 대한 반대급부로 국가로부터 주어지는 공식적인 녹봉과 전시과체제에 따른 직전으로서의 토지지급, 그리고 지방관아에 주어진 公廨田柴가 있었다. 또 호족적 전통에 따른 功蔭田柴로서의 永業田, 신라의 丁田의 전통을 이은 민전으로서의 영업전, 별도의 賜田, 기타 토지의 겸병과 수탈·개간 등에 의한 사전의 확대가 진행되었다.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향리의 경제기반은 토지소유였다. 고려 초 전시과체 제에 있어서 향리에 대한 구체적인 직전 지급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그리나 “퇴역한 戶長에게 직전의 절반이 지급되었다”든지, “州縣長吏들이 100일간의 疾苦가 있으면 京官의 예에 따라 직을 파하고 직전을 거두어 들였다”는 기록을 통해 향리 일반에 대한 직전의 지급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017) 물론 이 직전은 경기지역의 전시과 대상 토지는 아니었고 해당 지방의 토지를 말하고 있음은 향리의 토착성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향리층은 본래 지방호족으로서 많은 재산을 축적하여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러한 토지소유 형태는 국가의 체제정비에 따라 상당한 양의 토지가 勳田으로 사급되어 종전의 지배권이 국가적 차원에서 인정되었던 것으로, 이것이 향리들에게 전승되었다. 즉 신라 말부터 지방세력의 경제적 기반이 되어 왔던 기존의 토지소유가 추인되어 존속되었다. 이와 같이 지방에 있어서 전통적인 재지세력으로서의 향리는 鄕役의 세습과 더불어 기존의 토지소유에 대한 우선적 소유권을 획득하여 초기 토호세력의 사유적 경제기반이 되었던 민전을 영업전의 성격으로 변화시켜 세습토지화함으로써 그들의 중추적인 경제적·물질적 기반을 이룩하였다.018)
직전과 전통적 소유의 토지 이외에 비록 일부 향리에게 해당되는 것이지 만 鄕職·武散階의 수혜에 따른 전시의 지급과 同正職·其人役, 기타 軍職 을 가짐에 따른 토지지급 또한 향리의 경제기반의 일부분이 되었다. 이외에도 국가 통치질서가 문란해지면서 중앙 권세가들이 토지를 겸병할 때 지방관이나 향리들과 결탁하여 남의 토지를 불법적으로 점탈하거나 고리대를 경영하는 형태를 취하였다. 이 때 향리는 토지겸병의 말단실무자로서 貢役價 징취 등 그들에게 주어진 경제적 수탈방법을 이용하여 자기들의 부를 축적한 일면도 있었다.019)
이러한 향리의 경제적 기반의 안정은 중앙관료로의 진출에 있어 경제적 제약을 크게 받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한다. 따라서 향리세력은 家業田을 바탕으로 한 토착성과 직역에 따른 경제력의 우위성 확보를 통하여 신분상승을 꾀하였다. 예를 들면 향리층은 자영농민적 토지소유자로서 그들 자의로 처리할 수 있는 所耕田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고려 후기에 발달한 중소농장의 성격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향리들은 그들의 신분상승 및 免役을 위해 이 소경전을 권세가에게 투탁하였던 것이다.020) 이는 비록 그들로서는 일시적인 토지의 상실이지만 투탁 후의 획득된 권세 내지 신분상승을 배경으로 다시 부를 축적하는 데 이용하였다.
한편, 고려 후기에 있어 전시과체제의 붕괴로 인한 사전의 확대 및 농장 의 발달과 지주·전호제의 성행은 향리로 하여금 중소지주적 자영농민으로 서의 경제적 기반을 배경으로 중앙에 나아가 당시 대농장 소유주인 권문세족에 대응하는 하나의 공동적 이익집단인 신진사류 집단을 형성하게 하였다. 즉 경제적 이익의 갈등을 매개로 신분상승을 꾀하는 욕구를 집단화하여 새로운 정치집단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고려시대의 향리는 호족적 전통을 가진 토착성을 배경으로 지방에서 행정력과 경제력을 겸비함으로써 시대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여 신분상승을 꾀하였다.
고려 후기 지방교육의 향상과 신유학의 수용 또한 향리층 신분상승의 내 적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무신란을 계기로 기성 관인과 문인들의 낙향생활 에 따른 지방교육의 육성은 그 교육대상의 중심이 지방유력자인 향리층이라 볼 때 이들의 上京從仕와 在地品官化를 촉진시켰다. 무신란 이후 고려사회는 극도로 문란하였으며 새로운 정권수립에 위협을 느끼고 정치적인 화를 피하 여 스스로 낙향하거나 혹은 파직·유배당하여 지방에 정착한 관인층이 생겨났다.021) 그들은 낙향 후에도 그들의 학문적·족적·경제적 기반에 따라 지방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였으며, 사사로이 지방교육에도 힘써 향리층의 과거 진출을 용이하게 하였다. 그리고 신유학의 수용은 기득권을 가진 권문 세족이 기존 통치이념을 배경으로 보수적 성향을 띠고 있었던 것과 대응하여, 사회개혁을 위한 새로운 지배이념으로 정착해 가면서 이를 수용한 신진사류의 입지를 더욱 강하게 하였다. 따라서 신진사류로 등장했던 많은 향리층은 신유학을 수용하면서 시대상황에 편승하여 중앙 진출을 꾀하였다.
다음 고려 후기 향리의 신분상승의 배경으로 잦은 전쟁에서의 군공과 이를 통한 중앙 진출을 들 수 있다. 무신정권 성립 이후 趙位寵의 난, 대몽항쟁, 三別抄의 항전, 홍건족·왜구의 침입 및 각종 지방민란 등으로 이어진 고려 후기사회에 있어서 이러한 정치·사회적 혼란을 극복한 주체는 바로 이들 향리층이었다. 아울러 이처럼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이들 향리층은 신분상승의 계기를 포착할 수 있었다. 즉 향리는 주현군의 장교직을 겸하고 있었으므로 전란이 많았던 시대상황에서 上京侍衛·選軍應募·地方軍引率赴戰 등 자신의 능력에 따라 군공을 세울 수 있게 되었으며 그 논공 결과에 따라 신분상승을 이룰 수 있었다.
나) 신분상승의 유형
고려의 신분체제는 국가의 운영체제에 종사하는 일종의 기능 즉, 役을 기반으로 하여 마련되었다. 이 역은 혈연집단을 단위로 부과되었고 대대로 세 습되었다. 향리에게 주어진 鄕役 역시 세습적 성격을 띠고 존속되었다. 그러나 고려 신분체제의 원칙은 그 이면에 신분의 유동성을 가지고 있었다. 사회구성의 복합적인 환경을 운영해 나아갈 능력있는 자의 필요성은 곧 원칙적인 역의 고정이나 신분의 세습을 동요케 하였던 것이다. 특히 향리층의 중앙으로의 진출은 문반 형성의 한 요소를 이루면서 부단히 중앙관인층을 보충하는 방편이 되었다.
그런데 고려 향리가 관인이 되는 길은 일정한 교육과정과 문학적 실력에 의해 과거에 급제하는 방법과, 武弁에 의한 무반으로의 진출 및 吏科로의 진출방법 등이 있었다. 먼저 과거를 통해 향리층이 중앙관인으로 진출하는 것 은 가장 보편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고려사회에 있어서 중앙귀족과 지방향리는 그 혈연적 기원을 같이 하는 존재였다는 인식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고려 건국 초 호족세력으로서 형제간에 중앙관인과 지방향리를 자의 에 따라 선택할 수 있었음은 그 후 지방세력의 중앙 진출에의 문호를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정치·사회적 여건으로 작용하였다고 보여진다.
또한 고려 초의 정치적 변동이 일단 정비된 성종 때의 지방 향리자제에 대한 교육 강화는 바로 이들을 중앙 관인층으로 편입시킬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이것은 관인의 자질을 육성하고자 취해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문학적 실력을 시험하는 과거제도에 의한 향리의 중앙 진출은 가장 보편적인 신분상승의 방편이 되었다. 특히 향리층은 중앙관직에 蔭敍로 진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신분상승은 주로 과거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아울러 고려왕조에서는 향리의 과거 응시자격을 제도적으로 마련하여 그들의 관료 진출을 보장하였다.≪고려사≫選擧志 科目條에 보면 향리층 가운데 副戶長 이상의 자손과 副戶正 이상의 아들에게 鄕貢의 신분으로 과거에 응시할 자격을 주고 있다. 이들은 주현의 인구수에 따라 1,000丁 이상에서는 3인, 500丁 이상에서는 2인, 그 이하에서는 1인씩 향공을 낼 수 있었다. 그런데 1,000정 이상의 주현의 경우 호장 8인, 부호장 4인, 兵正 2인, 倉正 2인 등의 편제로 되어 있어 향공을 배출할 수 있는 향리군은 상당히 넓게 분포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향공은 문음의 혜택이 없고 특별한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가 항상 있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界首官의 선발을 통하여 과거에 응시하는 것이 가장 보편적인 신분상승의 방법이었다.
한편 향리들은 고려시대 입사직인 胥吏職으로 나아가 관직에 등용되기도 하였으며, 서리직 재임중에 과거에 응시하여 등제함으로써 達官하기도 하였다. 향리의 경우 3子 중 1자의 從仕가 國制로 인정되었고,022) 이 종사는 과거를 거치지 않고 서리직으로 진출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향리자제가 이 과정을 거쳐 광범위하게 관직에 나아갔음을 추측케 한다. 따라서 향리가 서리직을 통해 문반으로 진출하는 것은 거의 제도화되어 그들의 신분 상승의 한 유형을 보여준다.
예를 들면 숙종 때 등제한 李永의 경우를 볼 때, 그는 호장으로서 京軍에 나아간 부친의 영업전을 계승하기 위하여 서리로 나아갔으며023) 寧越郡吏 嚴守安, 茂松人 尹諧 등도 서리로 출사하여 달관하였다.024) 이들은 다시 과거 에 응시하여 현달하고 있는데, 이 역시 과거를 통한 중앙 진출이 향리의 신분상승을 보장받는 데 있어 가장 일반적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拓俊京 의 경우를 살펴보면, 그는 谷州吏의 자손으로 서리직을 구하였으나 얻지 못 하고 숙종이 鷄林公으로 있을 때 그의 從者가 되었으며 그 인연으로 추밀원 의 서리직인 別駕에 임용되었다가 이어 군공으로 달관한 자이다.025) 여기서 종자란 곧 王府의 給使와 丁吏일 것으로, 척준경은 군공에 의한 달관에 앞서 하급 잡류직 및 서리직을 거쳐 무반으로 진출하였던 것이다. 그가 향리의 자손으로 먼저 서리직을 구하고자 했음은 결국 향리의 서리직을 통한 중앙진출이 일반적으로 행하여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외에도 향리의 서리직으로의 진출에 있어서 其人의 존재를 연관시켜 볼 수 있다. 즉 향리의 자제 혹은 중견 향리층이 직접 選上되어 중앙 吏職에 해 당하는 제반 잡역에 종사하고 그 신역에 대한 대가로 입사의 길을 보장받고 있다. 이는 기인을 통해 입사직의 서리직을 거쳐 중앙관직으로의 진출도 가능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其人選上 규정에 따르면 주현의 丁數에 따라 선상된 기인은 일정 기간 입역하면 同正職을 가하고 역을 마치면 加職함으로써 제도적인 입사의 길이 보장되었다고 할 수 있다.026) 따라서 기인제는 군현의 향리출신이 과거를 거치지 않고 중앙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의 하나였다.
다음으로 향리들은 지방 주현군 및 주진군의 장교직을 겸할 수 있는 제도 적 장치로 말미암아 군직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027) 따라서 향리 세력은 시대상황에 따라 군직을 통하여 중앙관직으로 나아가거나 군공을 통 하여 출사하기도 하였다. 즉 향리들은 주현군의 지휘자로서의 여건이 주어짐으로써 경군에 나아가 무반으로 진출하는 것이 보다 수월한 신분상승의 방편이 되었다고 여겨진다. 예컨대 앞에서 언급한 이영의 부친 仲宣은 安城戶 長으로서 경군에 선군되고 있으며, 恒陽人 咸有一은 서리로 나아가 군공으로 등사하여 尙書左丞에 이르렀고, 泰山郡人 田寵文은 역대 郡司戶의 가계에서 무반으로 나아가 대장군에 이르고 있다. 또 寧州人 宋子淸, 天安府人 申甫 純, 咸陽人 朴康壽의 경우도 향리가계에서 출신하여 무반으로 진출하고 있다. 이렇게 고려시대의 향리들은 武弁의 호족적 전통과 주현군의 장교 역할 을 통하여 군직에 의한 중앙 무반으로서의 신분이동이 상당히 활발하였다.
그 밖에 고려 전기에 보이는 사례이지만 勤幹·淸白·夤緣攀附 등 특별한 경우를 통하여 중앙에 진출함으로써 신분상승의 계기를 이루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土山小吏인 李周憲은 성종 때 근간으로 출세하여 監察司憲이 되었다가 후에 右僕射에 이르렀다.028) 郭尙은 小吏 출신으로 선종이 잠저에 있는 동안의 인연으로 궁궐에 출입하면서 출사하게 되었으며 숙종·예종조에 걸쳐 내외 요직을 역임하다가 참지정사에까지 올랐다.029) 李俊陽은 직접 全州吏에서 시작하여 일의 처리능력과 청백함으로 출사하였는데 中書侍郎平章事에 이르렀다.030) 이러한 경우는 고려 전시기에 걸쳐 비록 신분제사회라 하더라도 인간사회 구성상의 예외적인 한 부분으로 보여지며 일반적인 경우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또 왕실 및 귀족자제들이 활동하였고 상층사회의 일부분을 형성하였던 불교계에도 향리의 자제들이 大禪師·僧統·王師·國師 등 고위 승직을 담당하였다. 이것이 향리세력의 직접적인 신분상승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상향 적 신분이동으로는 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경우로 智光國師 海麟, 僧統 知偁, 大禪師 祖膺, 眞覺國師 慧諶, 圖妙國師 了世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군리·호장·향공진사의 자제로 왕족·귀족출신 승려들과 대등한 지위를 지녔다. 이는 향리층의 승려직을 통한 신분적 지위 상승의 특수한 일면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처럼 향리세력은 고려사회가 안정되고 문벌이 형성되는 시대적 흐름에 따라 신분상승의 기회가 확대되거나 축소되었다 하더라도 과거·서리직·군직 등 다양한 형태로 꾸준히 중앙에 진출하여, 신진세력으로서 문벌귀족과 병립하였다. 이것은 고려사회에 있어서 지방세력이 갖는 특징 중의 하나로 지방세력의 기반을 가지고 중앙관료화하는 사회적 신분상승이 끊임없이 전개되었던 것을 말해준다.
다) 사대부로의 성장
고려 말 지배적 중심세력은 권문세족과「能文能吏」의 기반을 가지고 출사 한 신진사류 내지 신흥사대부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무신정권에 의해 중앙 문벌귀족이 제거되고 지방 토착세력인 향리층의 중앙진출이 뚜렷해졌다. 그 후 원과의 관계를 가지며 고려 말기에 실권을 장악한 권문세가 가운데는 이 미 지배세력으로 중앙에 진출한 경우도 나타났다. 또 신흥사대부 역시 상당수가 향리출신으로 달관한 가계에서 등장하였으며 이 사대부는 조선 양반관료사회의 근간을 이루었다.031)
그러면 여기서 고려 후기의 정치·사상계의 주요 인물의 행적을 통해 향리층의 사대부로의 성장 내용을 살펴보자.
무신정권 특히 최씨정권 때에는 문인우대정책으로 지방의 향리세력들은 능문능리의 자격으로 중앙 관인층에 진출하여 사족화되기도 하였다. 당시 최씨정권 밑에서 文才를 인정받은 대표적인 신진사류 중의 한 사람으로 李奎報를 들 수 있다.032) 그는 명종 20년(1190)에 과거에 급제하여 신종 3년 최충헌에 의해 權補直翰林에 발탁되어 그 후 국자좨주·보문각학사·문하시랑평장사를 역임하였다. 그런데 이규보의 가계는 驪州 李氏로 증조 李殷白은 향직 中尹을 가졌던 토착세력이었고 조부는 檢校校尉 和이며, 부친 允綏는 호부낭중으로 아버지대에 이르러 처음 실직에 나오고 있다. 이렇게 이규보는 향직을 가진 토착향리 가계에서 출신하여 과거를 통해 중앙에 진출하였으며 그 후손들도 계속되는 등제로 사족으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즉 아들인 涵은 지주사에 이르고, 손자인 益培는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충렬왕 때 版圖判書를 거쳐 재상의 지위에 이르렀다.
또 고종 때 추밀부사를 지낸 蔡靖은 본래 陰城縣吏로 과거에 등제하여 사족화하였다.033) 채정은 그의 청렴과 덕망을 배경으로 慶州·永川의 민란을 진정시킨 인물인데 大司成·同知貢擧를 역임하였던 그의 행적에서 신진사류로서의 활동상을 엿볼 수 있다.
역시 고종 때 등제한 朱悅도 綾城縣吏를 세습한 가계에서 출사하였는데, 그의 조부 潛은 호장이었고 부 慶餘는 현리로서 恩賜科에 올랐다.034) 知都僉 議府事에까지 오른 주열은 문장이 뛰어났으며 權貴에 아부하지 않고 청렴하기가 한결같아 달관하여도 치부하지 않았다. 즉 가산을 돌보지 않고 높은 벼슬에 있어도 스스로 寒士와 같이 하여 公廉淸白한 신진사인으로서의 자질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의 아들 朱印遠은 충렬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달관하고 있으나, 왕의 嬖幸으로 백성들을 탐학하여 선대의 신진사인상을 혼탁하게 하였다. 어쨌든 주열의 가계는 지방 향리가계로부터 무신정권하에 과거로 출사하여 사족화하였으며 그 후손들 역시 과거로 달관하여 신흥사대부층을 형성하였다.
한편, 晋州牧 姜彰瑞의 경우는 향리자제의 과거를 통한 起家와 그 후손의 명문화 및 신진사인층의 孝意識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사례가 된다.035) 즉 강창서는 향리의 자제로서 향교에서 수학하여 희종 때 과거를 통해 출사하고 있다. 그런데 그의 과거응시는 부친의 죄를 방면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효에 대한 당시 신진사인의 사상은 성리학적 효에 대한 관념과 일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강창서의 기가를 계기로 여말 晋州姜氏는 그 족세가 번창하였으며 그 후손 姜蓍 이후 최고 문벌을 자랑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무신정권 하에서의 향리출신 신진사류들의 활동을 보건대 권귀에 아부하지 않고 청렴한 일면을 지닌 일군의 인물상이 부각된다. 나아가 이러 한 일면은 뒤로 이어지는 여말 선초의 사대부의 전형과 연계시켜 볼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신진사류 가운데는 무신정권의 측근에서 정방 및 서방 등 권력부서에 적극 참여하여 정권주체의 총애를 받는 경우도 있었다. 琴儀는 奉 化縣人으로 삼한공신 容式의 후예로 명종 14년에 등제하여 최충헌의 측근 이 되어 華要職을 역임하였다.036) 그런데 그는 과거에 급제하기 전 淸道監務를 지낼 때는 청렴하고 강직하여「鐵相公」이라 칭해지기도 하였다. 이는 자신의 능력으로 과거에 오른 인물로서 초기 관직생활에서 청렴한 士類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최충헌을 아부로 섬겨 2學士·3大夫를 겸하고 고종 때는 문하시랑평장사에 이르고 있는데 이것은 신진사인이 권신의 비호를 받아 세력을 유지하고자 했던 변절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또 兪千遇는 長沙縣人으로 고종조에 급제하여 정방에 참여하였다. 그는 권 세가에 뇌물을 바치는 등으로 아부를 하였으며 최이의 門客이 되어 樞要職 에 나아가 뇌물을 받아 치부하고 전주를 맡아 친지를 발탁하여 주위의 비난 을 받기도 하였다.037)
이상과 같이 무신정권기의 향리출신 신진사류들은 관계에 진출하여 정방 등에 참여하여 전주를 담당하고, 화요직을 겸임하기도 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청렴결백한 사대부로서의 표상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한편 무신정권기의 향리출신 신진사류들이 중앙 정치무대에 적극적으로 진출함으로써 그들의 정치적 존재여건은 성숙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신진사류계층 전체의 신분적 지위상승 형태는 아직 미숙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즉 무신정권이 통치체제를 운영하면서 신진문인의 필요에 따라 보충한 인적 자원으로서의 성격을 가진 존재였기 때문에 아직은 정권주체에 편승하여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고자 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고 보여진다. 따라서 정권주체나 기존 세력권에 대응한 정치집단으로 성장하기에는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향리출신의 신진사류의 진출은 다음 시대로 이어지면서 신분상승의 추세를 진작시키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다시 말하면, 무신정권기에는 향리출신 신진사류들이 아직 확고한 정치세력으로 등장하지 는 못하였으나 同系出身 세력간에 공동체적 정치의식을 키워나가는 토양을 형성시켜 나갔다고 하겠다.
이렇게 무신정권 이후 계속 성장한 능문능리형의 신진사류층은 원간섭기 에도 꾸준히 성장·발전하여 일군의 정치개혁세력으로 대두하여, 對元關係 가 전개되면서 부원적인 권문세족이 새롭게 등장하자 이들과는 대립되는 정치성향을 띠었다. 물론 권문세력이「宰相之宗」을 이루며 최고 지배세력으로 군림하였지만 정치실무에 밝은 능문능리형의 官人群은 그들을 인식하면서 상당한 비중을 가지고 조정에 참여하였던 것이다.
대원관계를 배경으로 권세를 차지한 세력집단을 중심으로 적체되는 사회·경제적 모순과 이에 대한 고려왕권의 개혁 시도는 고려 후기사회를 끊임없이 변모케 하였다. 따라서 충선왕·충목왕이 제도개혁을 통해 새로운 통치질서를 만들고자 하였을 때는 기존 권세집단에 대응한 개혁세력의 존재가 요망되었고, 이러한 개혁세력으로는 무신정권 이후 능문능리로 성장한 세력들이 적격자로 등장하였던 것이다.
충선왕은 권문세력을 숙청하고 정방을 폐지하여 부원세력을 배척하는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 때 정방을 대신해서 詞林院을 설치하여 전주·왕명출 납 및 정치고문의 일을 맡게 하였는데, 이 사림원의 구성원은 모두 과거를 통하여 출세한 사람들이며 대부분 지방출신의 신진사류들이었다. 그리고 이 들에게는 선비의 기질인「청렴」이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곧 사 대부의 속성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충선왕의 개혁은 기존의 권문세력 중심의 체제를 부정하고 새로이 사대부정치를 지향한 것이었다.038) 물론 이 개혁은 성공하지 못하였지만 고려 후기사회의 변화 방향과 그 주체세력의 성격을 뚜렷이 하는, 즉 지방세력 출신의 정치적 추진방향을 설정하였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그 후 권문세력의 불법 토지점탈 등으로 사회질서가 와해되자 충목왕 때 다시 개혁이 착수되었는데 이는 整治都監의 설치와 활동으로 이루어졌다. 정치도감이 설치되어 다시 설치되었던 정방을 혁파하고 祿科田制度를 정비하는 등 개혁이 이루어졌다. 이 개혁을 주도한 王煦는 權溥의 아들로 충선왕이 아들로 삼아 賜姓한 사람이었다.039) 그는 안동 권씨로 권문세력 출신이지만 그 선대는 호장계 향리가계에서 기가하였으며 사대부적 기질을 가졌다. 따라서 충선왕의 사대부 정치와 연계성을 가지면서 충목왕 때의 개혁을 주도해 나갔다. 그리고 이 정치도감에 참여한 사람 가운데 安軸·田祿生·白文寶 등 신진세력은 과거를 통해 입사한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으며 그 중 지방출신 이 많이 있었다.040)
이와 같이 충렬왕 이후 원 간섭기의 고려왕권의 독자성 강화 및 부원권문세력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일련의 개혁정치의 추진과 더불어 신진사 류들은 기존세력들에 대한 공통적인 대응을 갖는 정치세력으로 성장되었다. 나아가 무신정권 이후 착실히 성장해 온 이들 지방 향리출신의 신진문인들은 권문세족에 대응하여 정치·경제적 이해를 같이 하는 공동체적인 관료군을 형성하였으며, 원 간섭기의 중심 정치세력의 하나로 부각되었다. 그러나 개혁정치가 실패로 돌아간 이유는 사대부 정치체제가 아직 성숙되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그들이 정치·경제·사상적으로 자기성장을 계속하면서 공동체적인 정치집단으로 등장하였음은 다음에 전개될 시대상황의 중심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확고히 한 것이다.
그러면 원간섭기의 향리가계 출신 신진문인들의 사대부로의 성장과정을 살펴보자. 먼저 薛公儉의 경우를 보면, 그는 추밀부사 薛愼의 아들로 고종 때 서리직 都兵馬錄事에서 과거에 급제하여 충렬왕 때 밀직부사를 거쳐 찬성사에 이르렀으며 충렬왕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그의 부친 설신은 郡司戶의 증손이며 외가 역시 군사호직을 가지고 있었다. 설신은 詩賦와 吏幹에 능하여 과거를 거쳐 내외 요직을 역임하였고, 공검은 여·원간을 왕래하면서 최고 관직에 올라 배향공신이 되어 사족으로서의 지위를 더욱 굳혔다. 이어 공검의 아들 之冲 역시 찬성사에 올랐다. 따라서 淳昌 薛氏는 향리가계에서 출 신하여 설신의 등제와 달관으로 기가하고 그 자손들이 현달함으로써 사족으로 정착하였던 것이다.041) 한편, 설공검의 경우는 청렴 정직하고 검소하였으니 이는 사대부의 한 속성으로 볼 수 있다.
다음 충선왕 때 성균좨주에 오른 禹倬은 증조·조부가 호장이었던 丹陽 향리가계의 후손으로 향공진사 天珪의 아들이다.042) 그는 충렬왕 16년에 문과 에 급제하여 司錄·監察糾正을 역임하였는데, 특히 經史와 易學·卜筮에 능통하였고 程朱學에 조예가 깊었다. 말년에는 禮安으로 내려가 글을 벗하는 등 사대부생활을 하였으며 나아가 조선왕조에 들어 영의정에 추증되기에 이르렀다. 이렇듯 우탁의 경우는 향리가계에서 과거를 통하여 사족화하고 학문 적 소양을 바탕으로 하는 사대부의 생활상을 보여주고 있다.
鄭可臣의 경우도 향공진사의 아들로 고종 때 등제하여 충렬왕 3년(1277) 보문각대제를 거쳐 화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의 성품은 정직·단엄하고 일의 처리에 정밀하게 살펴 공정성을 띠었으며 높은 지위에 올라서도 서생과 같이 행동하였으니043) 사대부의 한 면모를 느끼게 한다.
충숙왕 때 檢校僉議政丞에 오른 李瑱은 사림원 설치에 따른 충선왕 개혁 정치의 4학사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삼한공신 金書의 후손으로 그의 고 조와 증조가 軍尹·甫尹 등 향직을 소유하고 있는 바 역시 향리가계에서 기가한 것을 알 수 있다.044) 한편, 이진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즐겨 제자백가에 정통하고 시문에 뛰어났으며 문과에 급제하여 직한림원·대사성·정당문학 등을 역임하고 과거를 관장하였으며, 또 충선왕 때는 시정 적폐를 일소하자는 상소를 올려 그 실현을 보았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그는 당시 권문세족의 득세에 의한 사회모순을 극복하고자 하는 신흥사대부적 개혁정치를 추구하는 성향을 띠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어 그의 아들인 李齊賢은 시중의 지위에까지 오른 대학자였다. 이처럼 慶州 李氏는 향리가계에서 출신하여 이진 이후 과거에 의해 사족화하여 명문으로 성장하였던 것이다.
한편, 정치도감에 참여한 田祿生은 潭陽의 향리가계 출신이었다. 그는 충렬왕 때 담양호장으로서 과거에 급제한 田得時의 후손으로 충혜왕 때 등제하였다.045) 이렇게 담양전씨는 전득시·전녹생 부자대에 이르러 향리직을 벗어나 과거를 통해 사족화하였던 것이다. 전녹생은 충목왕 3년(1347) 整治官이 되어 부원세력인 奇三萬을 치죄하였고, 공민왕 때에는 이색 등과 더불어 鹽鐵別監의 폐단을 논의하기도 하였으며, 우왕 때에는 북원 배척과 李仁任 주 살을 청하는 사건에 연루되기도 하였다. 그러한 그의 행적이나 동지공거·정당문학, 우왕의 사부 등의 관직을 통하여 그는 원 간섭기의 신진문인세력으로서 권문세족과 대립하면서 신흥사대부들의 정치력을 성장시키는 데 앞장섰음을 알 수 있다.
또 전녹생과 같이 정치도감에 참여했던 안축 역시 대대로 호장직을 세습해 오던 향리가계 출신이다. 즉 안축의 가계는 조부대까지 대대로 興州戶長이었으며 아버지 碩은 현리로서 급제하였으나 不仕하였다. 이렇게 안축은 호장가계의 후손으로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충숙왕 11년(1323) 원나라 制科에 다시 급제하였다.046) 그 후 成均學正·典法判書·尙州牧使를 역임하였으며 충목왕 때에는 僉議贊成事로 判整治都監事가 되어 양전 등 개혁정치에 참여하였다. 또<關東別曲>·<竹溪別曲>을 남겨 문명도 높았다. 이와 같이 그의 행적이나 문명으로 보아 청렴·강직하면서 문학적 교양을 겸비한 사대부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그의 아들 宗源은 충혜왕 때 급제하여 우왕 때 대사성·대사헌·지공거를 역임하고 조선 태조 때 판문하부사에 이르는 등 두 왕조에 걸쳐 현달하였다.
安珦 역시 조부 때까지 興州吏였으며, 아버지 孚는 흥주리에서 醫業에 올라 밀직부사에 이르렀다. 그는 원종 원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감찰어사를 거 쳐 충렬왕 11년(1285)에 尙州判官으로 나아가 미신을 타파하였으며, 高麗儒 學提擧로서 원에 들어가≪朱子全書≫를 필사하여 돌아와 주자학을 연구하였다. 한편 문교진흥을 위해 贍學錢을 만들고 國學에 大成殿을 낙성하여 공자의 초상을 비치하는 등047) 고려에서 유학이 크게 떨치게 하였다. 이후 文翰之任을 역임하고 都僉議中贊에 이르렀다. 이렇듯 順興 安氏는 본읍호장을 세습하다가 원 간섭기에 안향 및 安軸·安輔·安輯 형제가 상경종사하면서 신흥사대부로 성장하였던 것이다. 나아가 그 후손은 조선왕조에 이어지는 명문이 되었던 것이니 순흥 안씨의 가계는 원 간섭기 이후 향리가 사대부화하는 전형적인 사례인 것이다.
李兆年은 星州戶長 長庚의 아들로 충렬왕 20년에 향공진사로 등제하여 정당문학에 이르렀다. 향리가계에서 일어난 이조년 일가는 그의 5형제가 모두 등과 출사하여 중앙에 포열하고 그 자손들 또한 현달함으로써 곧 권문이 되어 고려 말에 극성을 이루었다. 이조년은 어려서부터 뜻을 품고 학문에 힘썼으며 문장에도 능하였다. 그는 충숙왕이 원에 억류된 지 5년이나 되자 瀋王 暠의 왕위계승 책동에 발분하여 혼자 원의 중서성에 가서 충숙왕의 정당함을 밝혀 원으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또한 충혜왕이 연경에 숙위하였을 때에 따라갔는데, 이 때 충혜왕의 생활이 방종무도하여 수행하는 신하들이 모두 실망하고 말하지 못하였으나 이조년만은 進戒를 올려 견제하였다.048) 그 의 성품은 날래고 겁이 없고 의지가 굳으며 강직한 사대부의 모습을 갖추었다. 그의 아들 褒 역시 성품이 순후하여 충실하게 예의를 지켰으며 벼슬은 檢校門下侍中에 이르렀다. 이어 포의 아들은 8형제인데 4인이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그 중 仁復은 충혜왕 때 원의 제과에 급제하여 검교시중에 이르렀으며, 仁敏은 공민왕 9년(1360)에 급제하여 대제학·밀직사사를 역임하고 조선 건국에 따라 사직·환향하였다. 그러나 그의 아들 稷은 우왕 3년(1377)에 급제하여 조선조에 이르러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이렇듯 星州 李氏 이조년의 가계는 대대로 호장직을 계승한 향리신분에서 원 간섭기에 이조년 형제의 등과로 사족화되었으며, 그 후손들이 계속하여 현달함으로써 명문으로 성장하였다. 비록 이인임의 전횡과 왕조 교체로 큰 타격을 받았으나 조선시대에도 仕宦은 계속되었다.
또 李穀은 韓山郡吏였다가 井邑監務를 지낸 自成의 아들로, 충숙왕 7년(1320)에 등제하였으며 충숙왕 후원년(1332) 원의 제과에 급제하고 도첨의찬성사에 이르렀다.049) 이어 그의 아들 穡과 손자 種德·種學·種善이 재상을 지내는 고위직에 나감으로써 사족으로서의 지위를 견고히 하였다. 이곡은 어려서부터 독서에 열심이었고 일찍이 부친을 잃고 어머니를 효성으로 섬겼다. 그는 도평의사사의 서리로 나아갔는데 경사를 열심히 연구하여 많은 학자들이 모였다. 그는 충숙왕 때 원의 童女 징발에 따른 폐단을 지적하고 이를 중지하기를 청하여 실현을 보았으며 충혜왕 때는 관작이 외람됨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또 충렬·충선·충숙왕의 三朝實錄을 편수하였으며 성품이 단정하고 강직하였으니 여기에서 또한 사대부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의 아들 색은 고려말 대학자로 공민왕 2년(1353) 과거에 장원급제하고 이듬해 원의 會試에 급제하였다. 이어 대사성·정당문학·지공거·문하시중 을 역임하였으며 동방의 성리학을 일으키고 유학을 일신하였다. 그의 아들 종학·종선 역시 우왕 때 급제하여 조선조에 현달하고 있다.050) 이렇게 韓山 李氏 이곡의 가계는 대대로 호장직을 지닌 향리층에서 기가하여 원 간섭기에 과거로 출사하여 고려 말기에 걸쳐 사대부층으로 상승하였으며 그 후손들은 왕조 교체에도 그 지위를 지켜 명문으로 성장하였다.
이상과 같이 원 간섭기에도 향리가계 출신의 신진사류들은 중앙 정치무대 에서 그 일익을 담당하여 신분상승을 이룩했고 현실정치에 적극적으로 참 여하였다. 또한 대원관계에 있어 고려왕조의 자주성 확립을 위한 외교활동 을 통하여 당시 권세를 장악하고 있던 부원세력에 대응하여 일련의 개혁정치세력으로서의 공동체적 성향을 키워 나갔다. 나아가 현실모순을 타파하기 위한 이들의 꾸준한 성장과 도전은 공민왕대 이후 더욱 활발해졌다.
공민왕 5년(1356) 친원세력의 제거로 원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 동 14년 에 辛旽이 등용되어 田民辨正都監의 운용 등 개혁정치를 추진하여 권문세족들의 정치·경제적 세력기반을 약화시켰다. 이 때 공민왕은 강화된 과거제도를 실시하여 이를 통하여 등장한 신진사류를 개혁의 주체로 참여시켰는데, 이는 곧 사대부세력의 정치적 성장을 후원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어 신진사 대부세력은 계속적인 개혁의 추진으로 권문세력의 지배적 지위를 대신할 수 있었으며 나아가 조선왕조를 개창하는 주체세력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면 여기서 공민왕 이후 개혁정치에 참여한 주요 인물의 행적을 통하여 이들이 향리가계 출신으로 사대부층으로 진출하였음을 살펴보자.
먼저 李集은 廣州地方의 토착 향리가계의 출신으로 선대 호장직을 세습한 尉의 손자요 州吏 唐의 아들이다.051) 그는 충목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이색·정몽주 등과 교유하였으며, 공민왕 때 신돈의 배척으로 永川으로 피신하였다가 신돈이 주살된 뒤 개경에 돌아와 判典校寺事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곧 사직하고 驪州에 내려가 독서로 세월을 보냈다. 따라서 그는 留鄕士族의 선비상을 보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이위의 차자인 당의 가계는 이집이 과거로 기가하여 사족화하였으며, 아들 之直, 손자 仁孫 및 증손 克培 5형제로 이어지면서 여말 선초에 재상직으로 현달하여 명문이 되었다. 역시 주리였던 이위의 장자 漢의 가계는 여말까지 광주의 향리직을 세습해 오다가 조선시대에 이르러 그의 증손 知가 향공으로 출사하면서부터 사족으로 성장하였다. 이렇듯 廣州 李氏는 여말 선초에 향리층으로부터 사대부층으로 성장하였던 것이다.
다음 여말 선초의 대학자요 정치가인 鄭道傳 역시 향리가계의 출신이다. 그는 충숙왕 때 급제하여 형부상서에 이른 云敬의 아들로 공민왕 11년에 등제하여 사대부로 성장하였다. 정운경은 奉化戶長 鄭公美의 증손으로 처가를 따라 榮州에 이주하였다. 그는 등제하기 전 安東州吏 權授와 함께 향교에서 수학하고 출사 후 良吏로서 외직을 거쳐 검교밀직제학에 이르렀다. 이어 정도전은 이색의 문하에서 정몽주 등과 교유하면서 경사를 강론하였으며 문장이 뛰어나고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052) 그는 우왕 원년(1375)에 북원의 사신 접대를 반대하다가 귀양을 가기도 하였으며 성리학적 입장에서 排佛論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이와 아울러 토지개혁을 단행하는 등 고려 말 개혁의 주체로 활동하였으며,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왕조를 개창하는 주역으로 개국 1등 공신이 되었다. 이렇게 세력기반이 빈약한 향리가계 출신인 정도전은 선대의 등제에 의한 중앙 진출에 이어 사대부로 성장하였으며 그의 사상과 정치활동은 전형적인 신진사대부의 모습이었다.
또 정도전과 더불어 고려 말 개혁정치를 주도한 尹紹宗 역시 향리가계 출신의 사대부였다.053) 즉 그의 가계는 茂松縣의 호장을 세습해 오다가 충렬왕 때 고조 諧가 현리로서 급제, 출사하면서 사족화하였다. 그는 청백을 몸소 지키어 한때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는 등 사대부상을 보여주었다. 이어 조부 尹澤 때에는 外鄕을 따라 錦山으로 이주하여 留鄕士大夫로 정착하였다. 그 는 충숙왕 4년(1317) 문과에 급제하여 왕의 은택을 받았으며 뒷날 공민왕에 대한 遺託을 받아 그 추대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공민왕 때 큰 신임을 받았으며「孔子之道」를 강조하면서 崔承老의 시무책을 진강하는 등 치 국의 도를 왕에게 건의하였다.054) 이어 윤소종에 이르러서는 청렴결백한 사대부의 자세를 더욱 견지하였다. 윤소종은 공민왕 14년(1365)에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사관·정언·대사성을 역임하였으며 여말에 이성계와 밀착됨으로써 조선왕조 개창과 더불어 병조판서·동지춘추관사에 올라 그 가세를 확고히 하였다. 그는 이색의 제자로 시문에 뛰어나고 성리학과 경사에 밝아 문명이 높았으며, 배불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또 상소문을 올려 天命을 논하고 관직의 소중함을 말하며 또 民本을 주장하였다.055) 그의 동생 會宗 역시 우왕 때 등제하여 司宰副令에 이르렀다.
공민왕 2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토지개혁에 적극 참여한 李行 역시 여주의 토착향리가의 후손이었다. 李行의 가계가 언제 사족화하였는지 구체적으로 파악되지는 않으나 고려 후기에 吏族을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056)
한편, 조선 건국 초 사대부로서 집현전학사를 지낸 鄭麟趾·申叔舟·梁誠之 등도 고려 후기에 향리층에서 사족화한 가문의 후손이었으며, 조선시대 성리학자로 이름이 높던 金馹孫·李彦迪·李滉의 가계 역시 고려 후기에 향리층으로부터 사족화하였던 것이다.057)
이상과 같이 고려 후기에 지방 향리가계에서 출신하여 사대부로의 진출이 활발하였다. 이들 군현향리에서 등과 출사한 인물들은 물론 권문세족화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개 능문능리형의 신진사류로 활동하였으며 생활은 청백하고 권세가의 비리와 사회모순을 공격하면서 일군의 정치세족으로 성장하였다. 아울러 무신란 이후 정권의 주체가 바뀌면서 중앙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재지토착세력으로서의 향리층은, 점차 그들의 지배적 속성을 중앙관료층에 정착시켜 사대부층을 구성하였으며, 在地品官化한 세력과 더불어 시대변혁의 중심세력으로 성장하였다.
016) | 閔丙河,<高麗武臣政權에 對한 一考>(≪史學硏究≫6, 1959), 61∼64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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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7) | ≪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鄕職. |
018) | 李佑成,<高麗의 永業田>(≪歷史學報≫28, 1965), 3∼4쪽. |
019) | ≪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借貸. |
020) | ≪高麗史≫권 85, 志 39, 刑法 2, 禁令. |
021) | 朴恩卿,<高麗後期 地方品官勢力에 관한 硏究>(≪韓國史硏究≫44, 1984), 51∼56쪽. |
022) | ≪高麗史≫권 106, 列傳 19, 嚴守安. |
023) | ≪高麗史≫권 97, 列傳 10, 李永. |
024) | ≪掾曹龜鑑≫권 2, 觀感錄. |
025) | ≪高麗史≫권 127, 列傳 40, 叛逆 1, 拓俊京. |
026) | ≪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其人. |
027) | ≪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鄕職. |
028) | ≪高麗史≫권 94, 列傳 7, 李周憲. |
029) | ≪高麗史≫권 97, 列傳 10, 郭尙. |
030) | ≪高麗史≫권 17, 世家 17, 의종 즉위년 9월. |
031) | 무신집권기 이래의 能文能吏의 文士와 성리학을 수용하여 불교를 배척하고 고려 말 개혁의 주체가 된 신진사대부와는 동질성이 적어 구별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어 일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데 鄕吏集團이라는 사회계층적인 시각에서 볼 때 학문·사상적인 측면보다는 신분적 출신과 중앙 관료 진출에 따른 제도적 보장 등 정치·사회·경제적인 측면에서는 같은 기반으로부터 發身하여 士大夫·世族 등을 형성하고 계속적인 지배계층을 이루고 있었던 전체적인 흐름을 전제로 하여 구별 또는 연결되어야 할 것이다. |
032) | 李蘭暎 編,<李奎報墓誌>(≪韓國金石文追補≫, 亞細亞文化社, 1968), 203쪽. |
033) | ≪高麗史≫권 103, 列傳 16, 蔡靖. |
034) | ≪掾曹龜鑑≫권 2, 觀感錄. |
035) | ≪新增東國輿地勝覽≫권 30, 晋州 人物. |
036) | ≪高麗史≫권 102, 列傳 15, 琴儀. |
037) | ≪高麗史≫권 105, 列傳 18, 兪千遇. |
038) | 李起男,<忠宣王의 改革과 詞林院의 設置>(≪歷史學報≫52, 1972), 98∼99쪽. |
039) | ≪高麗史≫권 110, 列傳 23, 王煦. |
040) | 閔賢九,<高麗後期의 權門世族>(≪한국사≫8, 국사편찬위원회, 1974), 50쪽. 金光哲,≪高麗後期 世族層과 그 動向에 관한 硏究≫(東亞大 博士學位論文, 1987), 168∼210쪽. |
041) | 李蘭暎 編,<薛愼墓誌>(≪韓國金石文追補≫, 亞細亞文化社, 1968), 205쪽. |
042) | ≪高麗史≫권 109, 列傳 18, 禹倬. |
043) | ≪高麗史≫권 105, 列傳 18, 鄭可臣. |
044) | 李樹健,≪韓國中世社會史硏究≫(一潮閣, 1984), 304쪽. |
045) | ≪高麗史≫권 112, 列傳 25, 田祿生. |
046) | ≪高麗史≫권 109, 列傳 22, 安軸. |
047) | ≪高麗史≫권 105, 列傳 18, 安珦. |
048) | ≪高麗史≫권 109, 列傳 22, 李兆年. |
049) | ≪高麗史≫권 109, 列傳 22, 李穀. |
050) | ≪東文選≫권 129, 墓誌, 有明朝鮮國特進輔國崇祿大夫韓山伯牧隱先生李文靖公墓銘. |
051) | ≪掾曹龜鑑≫권 2, 觀感錄. |
052) | ≪高麗史≫권 119, 列傳 32, 鄭道傳. |
053) | ≪掾曹龜鑑≫권 2, 觀感錄. |
054) | ≪高麗史≫권 106, 列傳 19, 尹諧 附 澤. |
055) | ≪高麗史≫권 120, 列傳 33, 尹紹宗. |
056) | 李樹健, 앞의 책, 267쪽. |
057) | ≪掾曹龜鑑≫권 2, 觀感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