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양반수의 증가와 불복신
고려 후기의 양반층의 신분동요에 있어서는 이들의 숫적 증가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고려 후기에는 관제상의 정원이 원래의 수보다 훨씬 늘어난다. 예를 들면 본래 宰樞는「宰五」8명과「樞七」9명을 합하여 17명이 정원이었는데 고려 말에는 70∼80명으로 늘어났으며,080) 이러한 현상은 문무반 각 품 모두 그러하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한편 관제상의 증가와 더불어 양반 귀족층 자체의 인구증가에 따른 숫적 증가를 생각할 수 있지만, 앞의 향리의 신분변동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중간지배층의 양반층으로의 신분 상승이 양반수 증가에 절대적인 원인이 되었다. 즉 향리층의 正科·雜科 등을 통한 신분상승과 첨설직·납속보관제·투탁 등을 통한 광범위한 진출을 통하여 양반층의 팽창이 이루어졌다. 아울러 양반수의 절대적인 증가는 필연적으로 관제의 문란을 가져왔는데 이는 제한된 관직과 인적 자원의 확대에 따른 현상이었다.
한편 무신정권 이후 정치적 혼란기를 맞아 중앙관인들이 낙향하는 경우 가 많아지고 잇따른 정치적 사건과 빈번한 정권교체, 많은 전란에 따라 파직 및 유배자가 지방에 정착하거나 일시 머무르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들은 지방에서 일정한 사회적·신분적 특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중앙관인으로서의 신분적 우위와 지식층이라는 이유로 지방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새로운 형태의 사족층으로 대두하였다. 즉 양반 귀족의 한 존재형태로 地方品官勢力이 형성되어 갔다. 이들 지방 품관세력은 호족출신 관인층이 경제적·혈연적으로 맺어지는 지방과의 관련성을 바탕으로 하여 관직에서 물러난 후 낙향하여 하나의 사회세력으로 정착하였던 것이다. 또한 이들의 영향을 받은 지방 토착세력들은 동정직이나 첨설직을 받는 기회를 이용하여 비실직 관인층으로 성장할 수 있었으며 이들의 숫적 증가는 양반으로 진출할 수 있는 사족층의 숫적 증가를 가져왔다.
이와 같은 정치사회의 변동에 따라 토착세력의 사족화가 활발하게 진행되는 것과는 상대적으로, 기존의 중앙관인층이 여말 선초의 새로운 정권에 불복함으로써 향리층으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즉 고려의 遺臣으로 조선왕조에 불복하여 지방의 호장 등 향리화한 경우 이들 불복신 후손 향리들은‘不服臣戶長’등으로 그 명칭이 계속 이어졌으며 그 중 武弁이 있는 자는 驛吏로 전락되기도 하였다.081)
<羅恪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