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무신정권 성립기의 농민·천민봉기
(1) 서북지역의 농민봉기
가. 서북민의 1차 봉기
무신의 난이 일어나고 이의방이 정권을 장악한 후 최초로 일어났던 대규모의 농민봉기는 서북지역에서였다. 서북지방은 군사적 특수지대로서 서경 과 더불어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역사적·지리적 특성으로 서 경은 고려 초기부터 수도 개경과 같은 유사한 통치기구와 체제를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독립된 기반을 확립하고 있었다. 그러나 귀족 사회가 오래 지속되면서 개경을 중심으로 하는 문벌귀족이 중앙의 정치권력 을 독점함에 따라 서경 등 지방세력과의 갈등이 발생하였다.101) 이들의 대립 은 개경을 중심으로 하는 관료집단이 승리를 거두었으나 인종 초에 발생한 이자겸의 난의 여파로 개경세력은 약화되고 묘청을 중심으로 하는 서경세력 이 부각되었다.
그러나 묘청의 난이 실패하자 서경세력은 위축되어, 이제는 개경과 대등한 자리를 유지할 수 없도록 제도적인 제재가 가해졌다. 고려정부는 묘청의 난을 진압한 직후에 西京畿를 없애고 江東·江西·中和·順化·三和·三登의 6현을 설치하였을 뿐 아니라 서경 관제도 개편하여 監軍과 分司御史臺만을 남기고 나머지 官班을 모두 없애 버렸다.102) 서경의 제도적인 격하는 당연히 경제적 기반의 약화로 이어졌으리라 판단되는데, 이로 인해 西京 吏民은 개경정부에 대해 불만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이에 인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의종은 자주 서경에 행차하여 西京 吏民을 위무하기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무신란으로 정권이 문신에서 무신으로 바뀌면서 다시 서경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서북민은 중앙 집권체제가 동요하고 있는 틈을 타서 서경을 중심으로 봉기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서경토호의 목적이 정치적인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이었다면, 서경민은 사신의 행차 등으로 인한 지나친 요역동원과 지방관의 탐학에 대한 불만에서 봉기하였다고 보여진다.
다음 양계의 경우, 이곳은 북방 이민족과 국경이 맞닿고 있는 변방지대이었으므로 고려는 특수 행정구역으로 설정하여 남도와는 다르게 통치하였다.103) 양계에 거주하는 모든 장정을 州鎭軍에 소속시켜 방수에 참여케 했으며,104) 양계에서 거두어들이는 조세는 京倉에 운반하지 않고 모두 그 지역의 군수에 충당시키는 등 둔전제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105) 양계는 일부 지역 을 제외하고는 산이 많으며 토지가 척박하고 기후가 한냉하여 논농사는 거의 지을 수가 없었고 밭농사가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남도에 비해 수확량에 많은 차이가 있는 열등한 생산조건 아래서 경작에 종사한 둔전군은 비단 그 신분이 천민과 비슷한 위치에 있었을 뿐 아니라 생활여건도 극히 비참한 상태에 있었으리라 생각된다.106) 더욱이 고려 전기가 지나면서 점차 토지의 사 유화 경향이 일어나게 되었다. 다음 내용은 후기의 사료이지만 권세가에 의 해 양계지방의 토지 소유관계가 변질되었음을 보여준다.
① 공민왕 5년(1356) 6월에 교지를 내려,‘서북면의 토지는 일찍이 조세를 받지않고 防戍에 쓰이게 한 것이 이미 오랜 전례로 되어 있는데 근래에 권세가가 겸병하고 있다. 지금부터는 관청에서 조사, 장악하여 1결마다 賦稅 1석씩을 받아서 軍需로 지출토록 하라’고 하였다(≪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租稅).
② 北界는 예전에는 私田이 없고 관청에서 租를 거두어 군량에 충당하였는데 뒤에 권세가가 다투어 점유하여 사전으로 삼았다. 그 때문에 군량의 공급이 이어지지 못하여 백성에게서 양식을 거두니 백성들이 이를 매우 고통스럽게 여겼다. 安州 이북이 특히 그 폐해를 많이 입었다(≪高麗史≫권 82, 志 36, 兵 2, 屯田 신우 원년 10월).
위의 사료는 13세기 후반의 것이지만 이미 12세기 경부터 남도지방에 대 한 권세가의 토지겸병과 더불어 양계지방에도 토지의 사유화가 같이 진행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북계지방은 선대로부터 세습되는 남도의 민전과는 달 리 북방으로 이주해 온 徙民들에게 생활보장을 위해 나눠주거나 投化한 여진인에게 지급하는 토지가 많았다. 그러므로 이곳은 개인의 소유권이 약한 민전이 많았으며,107) 國屯田이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어떤 계기만 마련된다면 이곳의 실정에 밝은 관리에 의해 탈점이 용이하였으며, 특히 북계지역의 토지가 먼저 권세가의 不輸私田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같은 양상은 동계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짐작되지만, 이곳은 북계에 비해 토지가 더욱 척박하므로 권세가에 의한 사유화가 보다 완만히 진행되었으리라 생각된다.
고려 후기에 들어서면서 북계는 토지겸병뿐 아니라 지방관에 의한 수탈 도 더욱 강화되고 있었다. 앞서 설명하였듯이 명종 때의 병마사 정세유는 백 성의 재화를 거두어 중앙에 바쳐 아들 允當의 승진을 청탁하였으며,108) 조원 정은 동북면병마사로 부임하여 백성의 재물을 거두었는데 다른 사람의 머리 카락까지 잘라 가졌다.109) 또한 서북면병마사 李知命은 왕명에 의하여 군수물자인 龍州창고의 苧布를 팔아서 거란실을 사서 상납하였다.110) 이같은 관리들의 백성들에 대한 수탈 양상은 중앙과 연결되는 구조적인 모순을 지니고 있었으니 양계 주민들의 국가에 의한 강제적인 사민정책과 북방사신들의 빈번한 왕래로 인한 역역 부담에 대한 고통 등은 개경정부에 대한 반감을 한층 더 쌓이게 하였다. 이 때 조위총이 난을 일으켜 서북면의 여러 성에 동참하도록 호소하자 병마사 등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에게 불만이 쌓여있던 서북계의 토호인 都領과 주민들 대다수가 그것을 따르게 되었다.
서북민의 항쟁은 이미 명종 2년에 昌州·成州·鐵州에서 그 전초전이 시작되었다.111) 이들 북계 3주민의 봉기는 지방관의 탐학에 대한 분노와 지역 세력의 약화로 인한 불만에서 파생된 단순한 민란이었으나, 병마사 송유인은 이들이 두려워서 수습을 시도하지 않고 관직을 포기할 정도로 불온한 기운 이 감돌았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서북계의 모든 지역이 동요하고 있었다고 판단된다. 이후 명종 3년에는 문신 복고를 바라는 반무신란의 성격이 강한 金甫當의 난이 일어났으며112) 이듬해에 趙位寵이 봉기하였다. 다음은 조위총의 봉기 과정을 적은 내용이다.
(조위총은) 의종조 말기에 兵部尙書로서 西京留守가 되었다. 정중부·이의방 등이 의종을 죽이고 명종을 세웠으므로, 명종 4년에 位寵이 병사를 일으켜 중부 등을 토벌하기를 모의하여 드디어 東北兩界 諸城의 군대에 격문을 보내어 호소하기를,‘듣건대 上京의 重房이 의논하기를, 북계의 여러 성에는 대개 사납고 교만한 자가 많으므로 토벌하려고 하여 이미 대병력을 출동시켰다고 한다. 어찌 가만히 앉아서 스스로 죽음에 나아가리오. 마땅히 각자의 병마를 규합하여 빨리 서경에 집결하도록 하라’하였다. 이에 岊嶺 이북의 40여 성이 모두 호응하였으나 오직 延州만은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高麗史≫권 100, 列傳 13, 趙位寵).
조위총은 의종 때에 병부상서로서 서경유수를 겸임한 것으로 보아 문신이었던 것 같다. 무신들은 김보당의 난 이후 문신을 제거하여 중앙에서 무신 위주의 정치권력을 확보한 이후 지방관까지 모두 무신으로 바꿀 계획을 세웠다.113) 따라서 조위총은 조만간 관직에서 쫓겨날 위기의식을 느끼고 중앙 정부에 반기를 들었다.114) 그는 김보당이 문신들의 지지만으로 난을 성사시키지 못하는 것을 보고 서북계의 吏民을 그의 세력권 내로 편입시키기 위해 서북계 농민과 토호들의 불만을 이용하였다. 그는 서북계 주민에게 무신들이 서북계를 공격하려고 하니 이를 방어해야 한다고 선동하여, 평소에 주민들이 가지고 있던 중앙정부에 대한 피해의식을 자극하였다. 그런데 연주를 제외한 절령 이북의 40여 성이 모두 호응하였다고 한다. 연주가 이에 동참하지 않았던 이유는 이 지역 토호인 도령 玄覃胤·玄德秀 부자가 자신들의 토착적 기반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란에 가담하지 않는 것이 유리하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115)
이제 서북민과 관군은 절령을 경계선으로 대치하게 되었다. 정부는 중서시랑평장사 尹鱗瞻에게 3군을 거느리고 가서 서북민을 공격하게 하고, 內侍禮部郞中 崔均을 東北路指揮使로 삼아 동북지역 주민이 가담하지 않도록 타이르게 하였다. 윤인첨이 거느린 관군이 절령역에 이르렀을 때, 西兵은 눈보라를 무릅쓰고 내려와 이들을 대패시켰다. 윤인첨 부대가 서병과의 첫 접전에서 패배하니 정부는 동북면으로 우회하여 서병을 공격할 계획을 세워 동북계를 선무하던 최균에게 병마사와 더불어 동북면에 주둔하여 서북지역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서병을 치기 위해 和州營(永興)으로 들어갔을 때 서병과 내통하던 동북계의 주민에게 잡혀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116) 이제 서경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반란이 양계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서북민의 봉기가 절령 이북 전역에 확산되어 한창 세력을 떨치고 있을 무렵에 서북면병마부사 杜景升은 창주에 있었다. 그는 서북면 전역이 조위총에 가담하여 전세가 불리하고, 그의 휘하에 있던 分道將軍 朴存偉·李彦功 등이 조위총에게 잡히자, 도주하여 창주를 떠나 香山·撫州를 거쳐 지름길로 야행하여 겨우 개경에 도착하였다. 왕은 그에게 東路加發兵馬副使로 삼아 동북방면으로 보내어 반군이 동북부 지역까지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경승은 孤山(安邊)·宜州(咸南 德原)·定州·長州·孟州·德州·撫州 등 동계를 거쳐 서경 북쪽의 여러 지역을 점령함으로써 반민들의 세력이 서경부근에 한정되도록 하였다.117) 더욱이 무주 부근에는 정부와 보조를 같이하며 서북민에 저항하고 있는 연주가 있었으므로 관군은 순조롭게 진격할 수 있었다.
서북계의 여러 주가 정부군에 함락당하거나 항복을 하자, 다급해진 반란민들은 한편으로는 연주를 공략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개경을 공격하여 북쪽과 남쪽에서 압축해 들어오는 정부군의 봉쇄를 벗어나려고 노력하였다. 이제 연주와 개경에서의 전투상황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① 雲州郎將 君禹가 邊孟에게 편지를 보내어 延州를 달래며 말하기를,‘西京 差使員이 40여 성과 여러 사원의 승려·雜軍 만여 명을 거느리고 그대의 성을 침략하고자 하니 마땅히 신중히 생각하여 속히 소집에 응하도록 하라’하니 林擢才가 (변)맹의 머리를 베어서 성 밖에 효시하였다. 조금 후에 西兵이 와서 성을 공격하자 탁재가 격파하였다. 저녁에 서병이 다시 성 남쪽에 주둔하여 타이르기를,‘동북의 여러 성이 군사를 일으켜 三韓을 바로잡으려고 하는데 오직 너의 성이 따르지 않으므로 군사 1만여 명을 동원하여 공격하는 것이다. 다만 利厚 兄弟나 탁재·당취 등을 죽이고 성문을 열고 나와 항복하는 자가 있으면 장차 후한 상을 내릴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죽임을 당할 것이다’하였다. 德秀가 군사를 이끌고 나와 공격하니 서병이 크게 무너졌다(≪高麗史節要≫권 12, 명종 4년 10월).
② 서병이 다시 연주를 여러 겹으로 둘러싸니 德秀가 高勇之·李唐就 등을 보내어 급히 공격하여 패배시켜 사로잡고 죽인 자가 매우 많았다. 서병이 다시 성을 공격하므로 덕수가 또 나가서 격파하여 兵仗을 획득한 것이 헤아릴 수가 없었다(≪高麗史節要≫권 12, 명종 4년 11월).
③ 서병이 서울에 와서 개경 서쪽의 權有路에 주둔하였다. 이의방이 매우 노하여 서경사람 尙書 尹仁美, 大將軍 金德臣, 將軍 金錫材 등 귀천의 구별없이 모두 죽여 시가에 효수하고, 군대를 이끌고 나아갔다. 먼저 崔淑 등 기병 수십 명을 보내어 적진을 뚫고 돌격하여 여러 사람을 죽이니, 여러 군사들이 그 기세를 타고 공격하였다. 서병이 놀라 흩어져서 크게 패배하여 달아났다. 의방이 승전의 기세를 타고 북으로 쫓아 대동강에 이르렀다. 位寵이 흩어진 병사를 수습하여 다시 성을 지켰다. 의방이 성 밖에 군사를 주둔시켜 달포를 머물렀으나 고통스러운 추위에 싸울 수가 없어서 다시 서병에게 패배하고 돌아왔다(≪高麗史節要≫권 12, 명종 4년 10월).
④ 이 때에 行營兵馬使 및 四摠官이 싸웠으나 불리하여 서울로 돌아오는데 서병이 길을 막았다. 경승이 이를 맞아 대동강에서 격파하였는데 무릇 20번 싸움에 모두 승리를 거두어 서병을 대패시켰다. 경승이 돌아와 平州에 이르렀다(≪高麗史≫권 100, 列傳 13, 杜景升).
서북계의 군대는 雲州의 토호가 중심이 되어 연주를 공격하였으며, 서경의 아랫쪽인 개경은 조위총을 중심으로 한 서경병이 주축이 되어 공격하였다. 특히 서북계는 연주와 운주가 인접해 있으면서 두 지역의 토호들 사이에는 북쪽 지역에서의 주도권에 대한 경쟁관계에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곳은 연주가 완강히 버팀으로써 무려 1만 이상이 되는 군대로서도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 서북민 항쟁에서 결정적인 실책은 연주를 끌어들이거나 항복시키지 못한 점이었다. 연주가 배후에 있음으로써 서북민은 관군과 안심하고 싸울 수가 없었으니, 개경이 있는 남쪽만 신경을 쓰다가는 협공을 당할 우려가 있었다. 그러나 연주성은 견고할 뿐 아니라 유능한 지휘자로 인해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 앞의 사료 ①에 의하면 승려들도 연주성의 공격에 가담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로 보아 양계의 사원들도 서북민의 봉기에 합세한 것으로 판단된다.118)
한편 조위총이 이끄는 서경군은 개경을 공략하려다가 이의방의 군사에 쫓겨 서경으로 퇴각하였다. 이로써 절령을 경계로 서북민이 장악하고 있던 북 쪽 지역이 점차 축소되어 반민들의 기세가 약화되고 있었다. 그러나 관군 자 체에도 문제점이 있었으니, 관군과 연주 토호들이 각기 서북민과 싸우고는 있으나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태세는 갖추고 있지 않았다. 즉 두경승이 이끄는 군대가 불리하여 서북민에게 쫓겨 북방에서 점령했던 지역을 버리고 남으로 내려올 때도 연주민은 도와주지 않았다. 물론 연주의 토호 또한 서북 민과의 싸움에 급급하여 도울 만한 여유가 없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연주 토호들은 자신의 세력권을 보호·유지하기 위해서 독자적으로 지켰을 뿐 정부군과 크게 연관을 맺은 것으로 보여지지 않는다. 여기에서도 양계 토호들의 개경정부에 대한 독자적인 자세를 파악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정부는 그들이 반민들과 싸우는 것에 대해 다행으로 여길 뿐, 정부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것에 대해 제재를 가할 수도 없었다.
서경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정부는 두경승을 後軍摠管使로 삼아 서 경 주위의 군현들을 진압하게 하였다. 한편 명종은 조서를 내려 조위총 등에게 항복을 권유하였다.119) 그런데 일시적이나마 조위총이「請降」한 것으로 보아 고려정부를 무너뜨리기는 어렵다고 판단한 것 같다. 그러나 조위총은 항복을 요청했다가 다시 반격을 가하게 되는데, 원래 문신출신으로서 고려 사회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그는 승산이 불투명해 지자 잠시 항복할 것을 고려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조위총의 난을 계기로 호응하여 봉기했던 서북지역의 농민들은 조위총 등 지배층과는 목적한 바가 달랐으므로 이를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따라서 그는 주위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여 항복을 번복하였다고 보여진다.
관군은 승세에 힘입어 서경을 공략하기로 결정하였다. 그에 앞서 관군은 서북계의 반민들의 근거지인 漣州(平南 价川)를 공격함으로써 서경의 배후세력을 없애고자 하였다. 연주가 관군의 공격으로 함락될 위기에 처하게 되니 조위총은 구원군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奔院·龍岡 등 서경 주위의 군현민이 관군에 항복함으로써 연주는 고립무원의 지경에 빠졌고 결국 두경승이 이끄는 관군에게 함락당하였다.120) 이제 남은 반민은 서경성을 지키는 조위총을 위시한 주력부대뿐이었다. 관군이 연주성을 함락시킨 후 곧 이어 서경성을 포위하고 총공격을 가해오니 조위총은 그들만의 힘으로 정부군에 대항하기에는 한계에 달했음을 깨닫고 북방의 금나라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그는 무려 3차례나 금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구원을 요청하였으나 1차와 2차의 사신은 가는 도중에 죽임을 당하거나 조위총을 배반하고 정부군에 붙음으로써 실패로 돌아갔으며, 3차 때 徐彦이 금나라에 도착하였으나 금에 의해 도리어 포박을 당하여 고려정부로 보내졌다.121) 그리하여 금나라와 합세하여 고려정부를 공격하려던 조위총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금나라로서는 조위총이 비록 절령 이북의 40여 성을 귀속시키겠다는 약속을 하기는 했지만, 이를 얻기 위해 승산이 불확실한 고려의 내전에 말려듦으로써 오히려 고려와 송이 함께 금을 공격하게 되는 국제전으로 비화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이로써 외세를 끌어들여서라도 자신의 기반이 무너지는 것을 막으려던 조위총의 계획은 무위로 끝났다. 그는 서경 이북 여러 성에 사람을 보내어 구원병을 보내도록 설득하였다. 한때는 조위총의 거병에 적극 가담했던 서북지방의 토호들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대다수가 정부측으로 돌아서 버렸다. 이같이 변심하게 된 이유 중에는 금나라와 제휴하여 고려를 무너뜨리려는 조위총의 행위가 서북민을 불안하게 한 점도 있었으리라 보여진다. 정부측으로 돌아선 대표적인 지역으로 宣州를 들 수 있는데 다른 성도 이와 마찬가지였으리라 생각된다. 다음은 선주에 관한 내용이다.
房瑞鸞은 宣州의 鄕貢進士이다. 조위총이 병사를 일으키자 서북 여러 성이 모두 그에게 귀부하였다. 방서란이 그의 형 孝珍·得齡에게 말하기를,‘… 하물며 위총이 도모하는 바가 역모에 있으니 종국에는 반드시 자멸할 것입니다. 형은 마땅히 깊이 생각하십시오’하였다. 효진 등이 옳게 여겨 밤에 비밀리에 고을 사람들을 달래며 말하기를,‘위총이 처음에 賊臣을 처단할 것을 명분으로 삼은 까닭에 여러 성이 호응하였다. 그가 군대를 이끌고 궁궐로 향하다가 개경 교외에서 관군과 싸워 번번이 패배하니 관군에 의해 추격당하다가 죽은 시체가 서로 겹칠 정도였다. 그들이 남은 병사를 수습하여 다시 항거하고자 하나 이미 사기가 떨어져 다시 떨쳐 일어날 수는 없고, 다만 믿는 바는 험준하고 견고한 성뿐이다. 만약 관군이 하루아침에 서경을 함락시키고 병력을 이곳으로 옮겨온다면 전체 성이 반드시 가루가 될 것이다’하였다(≪高麗史≫권 100, 列傳 13, 房瑞鸞).
선주가 언제 조위총을 배반했는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관군이 서경을 함락시킨 다음에는 선주를 침공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것으로 보아 윤인첨이 서경을 포위한 명종 5년 6월 이후의 어느 시기였으리라 생각된다. 이로 보아서도 서북 여러 성의 토호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보존하는 데 유리하다면 어느 쪽이건 상관없이 돌아섰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은 토호들의 성향을 잘 파악하고 있는 조위총으로서는 봉기가 성공한다면, 일정한 지위를 약속하는 僞官을 주어 달래거나, 심지어는 이기기 위해서는 이민족이라도 손을 잡아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서북민의 봉기는 서경성이 정부군에 의해 포위되고, 金나라의 원조도 바랄 수 없게 되자 서북 여러 성이 정부군에 항복하는 위기상황을 맞게 되었다. 이 때 조위총의 원조 요청에 적극 호응한 사람들은 서북지역의 토호가 아닌 일반 농민들이었다. 다음 기록에서 토호와 백성들의 태도가 명확히 잘 나타나 있다.
麟州사람 康夫·祿升·鄭臣 등이 防守將軍 蔡允和를 죽이니 왕이 內侍祗候 崔存을 보내어 달래게 하였다. 얼마 후에 또 義州分道 尹光輔·防禦判官 李彦升을 죽이고 위총에 호응하였다. 위총이 사람을 보내어 여러 성의 우두머리를 僞官에 임명하였다. 인주도령 낭장 洪德이 강부 등을 잡아 위총에 항거하려고 하였다. 강부 등이 소매 속에 칼을 넣고 (홍)덕의 집에 이르러 그를 해치려고 하니 덕이 문에 복병을 두었다가 그를 살해하였다(≪高麗史節要≫권 12, 명종 6년 3월).
위와 같이 조위총의 모병에 대해 도령 등 토호들은 냉담한 반응을 보였으나 강부·녹승·정신 등 일반 주민들은 적극 지원하였다. 이것은 서북민의 1차 봉기가 끝난 이후에 봉기가 일어난다면 이제 토호들이 아닌 농민들의 주도로 일어날 것을 시사하는 점이기도 하였다. 토호들은 자기 지역에서의 독자적인 세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조위총이 거병했을 때 호응하여 급속히 일어났으나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전의를 상실하고 조위총에 호응하는 주민들을 붙잡아 정부에 바침으로써 그들의 피해를 극소화시키는 데 노력하였다. 이와는 달리 농민들은 지속적으로 항거할 자세를 견지했던 것 같다. 그 들은 정부에서 파견한 防守將軍 등을 죽임으로써 농민항쟁을 다시 유발시켰다. 그러나 조위총은 농민의 결정력에 의존하기보다는 토호들에게 위관을 주어 회유하는 등 양계 지배층의 환심을 사기에만 급급함으로써 그의 패망은 필연적이었다. 결국 명종 6년 6월에 무려 1년 동안이나 버티던 서경성은 윤인첨·두경승이 이끄는 관군에 의해 함락되었고, 조위총은 처형되었다.
서북민의 봉기는 무려 2년 이상 지속되어, 개경정부를 공포에 몰아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이들을 진압시킨 후에도 다시 일어날까 두려워하여 강경한 탄압책을 쓰지 못하였다. 즉 서북계의 40여 성과 동북계의 많은 주진들이 난에 가담하였으나, 그 책임을 물어 참수된 사람은 조위총 한 사람 뿐이며 나머지 110여 명은 감옥에 가둔 것으로122) 보아 처벌이 최소한에 그쳤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서북민을 가혹하게 처벌할 수 없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서경성을 관군이 장악했다고는 하나 아직 항복하지 않은 반민들이 곳곳에 상존해 있었으므로 개경정부가 안심을 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이는 앞서 묘청의 난이 끝난 이후에 처벌당한 사람들의 수나 그 가혹함을 보면123) 이 때에 얼마나 가벼운 형벌만 가했는지 잘 비교가 된다. 이같이 끝까지 투항을 거부한 서북민을 중심으로 서경성이 함락된 지 1년도 못되어 다시 봉기하게 되었다.
101) | 金潤坤,<高麗 貴族社會의 諸矛盾>(≪한국사≫7, 국사편찬위원회, 19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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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 ≪高麗史≫권 58, 志 12, 地理 3, 西京留守官 인종 13년. |
103) | 邊太燮,<高麗 兩界의 支配組織>(≪高麗政治制度史硏究≫, 一潮閣, 1971). |
104) | 李基白,<高麗兩界의 州鎭軍>(≪高麗兵制史硏究≫, 一潮閣, 1968). |
105) | 安秉佑,<高麗의 屯田에 관한 一考察>(≪韓國史論≫10, 서울大 國史學科, 1984), 20쪽. |
106) | 姜晋哲,<高麗時代의 農業經營形態>(≪韓國史硏究≫12, 1976), 42쪽. |
107) | 鄭鍾瀚,<高麗 兩界의 民田과 그 所有關係의 變化>(≪慶北史學≫6, 1983). |
108) | ≪高麗史節要≫권 13, 명종 14년 12월. |
109) | ≪高麗史節要≫권 13, 명종 15년 2월. |
110) | ≪高麗史節要≫권 13, 명종 15년 정월. |
111) | ≪高麗史節要≫권 12, 명종 2년 6월. |
112) | 金甫當의 난에 관해서는 다음의 글이 참조된다. 邊太燮,<武臣政權期의 反武臣亂의 性格>(≪韓國史硏究≫19, 1978). 黃秉晟,<金甫當亂의 一性格>(≪韓國史硏究≫49, 1985). |
113) | ≪高麗史節要≫권 12, 명종 3년 10월. |
114) | 金錫亨은 조위총이 반란을 일으킨 원인을 무신들에 대한 문신의 복수라기보다는 혼란된 시국에 처하여 한몫 보려는 투기적인 동기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는데(≪봉건지배계급에 반대한 농민들의 투쟁≫, 열사람, 1989), 받아들일 만한 견해라고 생각된다. |
115) | 李貞信,<西北地域의 農民抗爭>(≪高麗 武臣政權期 農民·賤民抗爭 硏究≫, 高麗大 民族文化硏究所, 1991), 44∼47쪽. |
116) | ≪高麗史節要≫권 12, 명종 4년 10월. |
117) | ≪高麗史≫권 100, 列傳 13, 杜景升. |
118) | 사원의 승려들이 서북민의 봉기에 합세했다고 나와 있는데, 물론 서북계의 전 사원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들 사원이 토호인 도령의 위협에 못이겨서인지, 혹은 문신들과 결탁하여 기득권을 유지하던 사원이 무신정권에 반대하여 함께 봉기하게 되었는지 그 실상은 명확히 파악되지 않는다. 사원은 지주적인 성격이 내재해 있어 농민들과 대립되는 요소가 있기는 하지만, 서북민의 1차 봉기에서는 토호들이 대다수 가담했던 만큼 사원이 존립하기 위해서는 그 지역 토호들의 요청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봉기에 가담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
119) | ≪高麗史節要≫권 12, 명종 5년 정월. |
120) | ≪高麗史≫권 100, 列傳 13, 杜景升. |
121) | ≪高麗史≫권 100, 列傳 13, 趙位寵. |
122) | ≪高麗史節要≫권 12, 명종 6년 6월. |
123) | ≪高麗史節要≫권 10, 인종 14년 2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