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고려 시대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2. 농민·천민의 봉기2) 무신정권 성립기의 농민·천민봉기(1) 서북지역의 농민봉기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1. 신분제의 동요
          • 1) 신분제 동요의 배경
          • 2) 양인·천인의 신분이동
            • (1) 양인·천인의 신분상승
            • (2) 양인의 신분하락
            • (3) 이성계 일파의 집권과 양인·천인의 신분고정
          • 3) 향리 및 양반귀족의 신분동요
            • (1) 향리의 신분동요
            • (2) 양반귀족의 신분동요
        • 2. 농민·천민의 봉기
          • 1) 농민·천민봉기의 배경
            • (1) 중앙 통치체제의 문란
            • (2) 지방관의 탐학
            • (3) 대토지겸병의 확대
            • (4) 신분제의 동요
          • 2) 무신정권 성립기의 농민·천민봉기
            • (1) 서북지역의 농민봉기
            • (2) 공주 명학소민의 봉기
            • (3) 관성·부성·전주 등에서의 농민봉기
            • (4) 제주민의 항쟁
            • (5) 운문·초전민의 봉기
          • 3) 무신정권 확립기의 농민·천민봉기
            • (1) 만적의 난
            • (2) 진주민의 항쟁
            • (3) 경주민의 항쟁
          • 4) 외세침입기의 농민·천민봉기
            • (1) 거란침입기의 농민·천민봉기
            • (2) 몽고 1∼3차 침입기의 농민·천민봉기
            • (3) 몽고 6·7차 침입기의 농민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1. 몽고 침입에 대한 항쟁
          • 1) 몽고족의 흥기와 여·몽관계의 성립
            • (1) 13세기 몽고족의 흥기
            • (2) 몽고군의 고려 입경
            • (3) 강동성 전투와 여·몽관계의 성립
          • 2) 몽고의 고려 침입
            • (1) 몽고의 침략
            • (2) 최씨정권의 강화천도
            • (3) 몽고의 2·3차 침입
            • (4) 여·몽전쟁의 장기화
          • 3) 몽고의 침략에 대한 항전
            • (1) 살례탑군에 대한 항전
            • (2) 당고군에 대한 항전
            • (3) 야굴군에 대한 항전
            • (4) 차라대군에 대한 항전
            • (5) 고려의 입보책과 지방민의 항전
          • 4) 삼별초의 대몽항전
            • (1) 몽고와의 강화
            • (2) 삼별초의 봉기
            • (3) 삼별초의 진도 항전
            • (4) 삼별초군의 제주도항전
        • 2. 여·원관계의 전개
          • 1) 원의 간섭과 자주성의 시련
            • (1) 몽고제국 지배체제로의 편입과정
            • (2) 몽고제국 지배체제하의 고려왕조
            • (3) 여·원 양국간의 인적·물적 교류
          • 2) 북방문제
            • (1) 심양로의 심왕
            • (2) 동녕부
            • (3) 쌍성총관부
        • 3. 고려 말의 정국과 원·명 관계
          • 1) 원의 쇠퇴와 공민왕의 반원정책
          • 2) 공민왕의 개혁정치 실패와 명의 흥기
          • 3) 친원파와 친명파의 대립과 요동정벌
        • 4. 홍건적과 왜구
          • 1) 홍건적
            • (1) 원의 쇠퇴와 홍건적의 대두
            • (2) 홍건적의 침입
          • 2) 왜구
            • (1) 왜구의 성격과 규모
            • (2) 왜구의 침구목적
            • (3) 왜구의 침입
            • (4) 왜구에 대한 대책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나. 서북민의 2차 봉기

 서경성이 함락되고 조위총이 죽은 지 6개월이 지나지 않아 서북지역은 피지배층을 중심으로 다시 소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부는 서북민의 봉기를 진압한 후에 공이 큰 장수들을 치하하고 관직을 높여주었을 뿐 봉기의 원인을 규명하여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려는 적극적인 정책은 전혀 시행하지 않았다. 서북민의 2차 봉기는 명종 7년 4월 靜州·義州에서 일어났으며 이어서 5월에는 서경에서 발생하였다.

① 조위총의 남은 무리 500여 명이 난을 일으켜 留守判官 朴寧과 먼저 항복했던 자들을 죽였는데, 副留守 朴挻義·司錄 金得礪·書記 李純正 등은 몰래 도피하여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처음에 관군이 서경을 포위 공격했을 때 성을 넘어와 항복한 자가 무려 천여 명이었다. 성이 함락되려 하니 성안의 장정들은 모두 도망하여 숨었다. 그 뒤에 항복해 온 자들이 도피한 자의 처라고 하여 부녀자를 약탈하고 재산을 강탈하였으므로 장정들이 난을 일으켜 이러한 변란에 이른 것이다. 大將軍 李景伯, 郎中 朴紹를 보내어 달래게 했다(≪高麗史≫권 19, 世家 19, 명종 7년 5월).

② 조위총이 이미 패함에 남은 무리들이 다시 모여 3軍으로 나누었다. 思進·軾端·進國은 中軍行首로 삼고 戒訓은 指諭가 되고 金甫는 前軍行首로 삼고 光秀는 後軍行首가 되었다. 嘉州·渭州·泰州·漣州·順州의 산골짜기에 흩어져 살면서 앞뒤에서 겁탈함에 크게 백성들의 근심이 되었다. 慈州·肅州를 불태우고 妙德寺·香山寺 등 여러 사원을 도륙하였다(≪高麗史≫권 100, 列傳 13, 朴齊儉).

 서경의 경우, 앞서 1차 봉기에서 서경성이 함락될 때 항복하지 않고 도망갔던 무리 500여 명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이 다시 봉기하게 된 원인은 먼저 관군에 투항했던 사람들이 항복하지 않고 도주했던 사람들을 역적이라고 부르면서 그들의 부녀자와 재산을 약탈하므로 분개하여 난을 일으켰다고 한다. 서경뿐 아니라 서북계의 주민 역시 조위총이 죽고 서경·漣州가 함락된 후에도 다시 일어나 험난한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계속적으로 관군에 저항하고 있었음을 위의 글은 보여준다. 그들은 관군에 대항하기 위하여 무리를 모아 3군으로 나누었는데, 이들 지도자의 이름을 보면 思進·軾端·進國·戒訓·金甫·光秀 등이다. 이들 중 姓이 명확하게 나와 있는 사람은 김보 한사람 뿐이다. 여태까지≪高麗史≫의 기록으로 보아 성이 누락되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성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들은 대다수가 농민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이로써 이제 서북계의 대정부항쟁의 주도권은 도령 등 토호계층에서 농민들에게로 넘어갔다고 파악된다.

 사실 도령 등 토호들은 그들이 기득권을 가진 계층이었던 만큼 전세가 불리해지자 일부는 관군에 투항하고, 일부는 북방의 금나라와 제휴하여 그들 의 살 길을 모색하는 데 급급했을 뿐, 굳건하게 싸우려는 의지는 보이지 않았다. 조위총의 주도로 시작된 서북민의 1차 봉기가 무려 2년 이상 계속될 수 있었던 원인도 사실은 농민들의 끈질긴 저항에 힘입은 것이었다. 농민들은 처음에는 도령들의 명령에 의해 정부군과 맞서 싸웠지만, 차츰 난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봉기해야 하는 당위성과 자신의 능력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막상 1차 봉기가 종식되었을 때 생활기반이 무너졌을 뿐 아니라 정부의 보복까지 두려워해야 하는 그들에게 돌아갈 곳은 없었다. 더구나 그들은 남도의 농민들과는 달리 유사시에 병사가 될 수 있는 전투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농민군은 서경과 서북계의 묘향산을 중심으로 두 세력으로 나뉘어 관군에 대항하였다. 정부는 抄猛班行首 李頓綽·金立成을 파견하고 뒤이어 5軍別 號와 서북면병마사 두경승, 상장군 이의민 등에게 여러 방면으로 군대를 보내어 서경과 서북계를 공격하게 했다.124) 이 때는 남쪽에서 일어났던 명학소민의 봉기가 진압되고 그 주모자였던 亡伊가 항복을 요청하던 시기였다. 정부는 이제 남쪽에 대한 근심을 떨쳐버리고 서북계에 대대적으로 군대를 파견하였다. 서경민은 물자가 풍부한 관군과 직접 부딪치기에는 전력이 미치지 못함을 깨닫고 그들이 주둔하던 서경 曇和寺를 버리고 香山(妙香山)으로 근거지를 옮겨 서북민과 합류하였다.

 정부는 다시 서북계에 박제검을 보내어 興化·雲中道의 병사를 모집하여 반민들을 토벌하게 하였다. 그들은 우세한 무기와 물자를 지닌 정부군과 맞서 싸우지 않고 주로 산골짜기에 숨어서 유격전을 통해 관군과 대치하였다. 특히 그들은 주변 농민들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관군의 동태를 미리 파악하여 연전연승할 수 있었으니, 당시 민심의 동향을 나타내 주는 일면이다. 특히 농민들은 妙德山·향산에 있는 여러 사찰들을 불태웠을 뿐 아니라 寧州 靈化寺를 공격하여 사찰에 대한 적개심을 분명하게 드러내었으며, 또한 승려들을 몰아쳐서 병사로 만들어 漣州를 공격하게 했다. 농민군이 연주를 공격했다는 사실은 이제 산속에서 내려와 정부와 맞서 싸우겠다는 의사를 드러낸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서경지역을 다시 장악하는 데 자신감을 가지고 谷州·遂安을 공격하였다. 그들은 개경과 서경 사이에 있는 여러 지역을 점령함으로써 서경을 관군으로부터 고립시켜 공격할 계획이었던 것 같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 원인은 서경성의 관군을 몰아내기가 쉽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정부의 淸野작전에 의한 식량부족 때문이었다. 따라서 주변 농민들에 의해 식량을 조달하기가 힘들어졌으며, 많은 농민들이 정부군과 싸우느라고 농사를 짓지 못하여 농토는 황폐해졌다. 결국 양식부족을 견디지 못한 대다수의 반민들은 정부군에 투항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 기록은 그 내용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① 西賊의 우두머리 광수를 校尉로 삼고 김보를 攝校尉로, 사진·식단·계훈을 隊正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들이 돌아다니며 노략질하는 날이 오래되니 보루가 없는 촌은 이미 약탈되어 남은 것이 없고 大城은 굳게 지키고 있어서 금방 깨뜨릴 수 없었다. 들에서는 구할 것이 없어서 점차 굶주려 군색해졌으므로 스스로 투항하여 목숨을 연장시키려 하였다. 그 때 마침 嘉州賊이 길에서 昌州의 記事 白公軾을 만나 먼저 항복할 뜻을 말하였다. 齊儉이 그것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달래며 부르니 여러 곳에 주둔해 있던 적들이 서로 이끌고 와서 항복하였다(≪高麗史節要≫권 12, 명종 8년 10월;≪高麗史≫권 100, 列傳 13, 朴齊儉).

② 齊儉이 매번 투항자가 오면 번번이 어루만지며 말하기를,‘너희들도 모두 우리의 백성이다’하면서 창고를 열어 진휼한 것이 전후 합하여 무려 600여 석에 달하였다. 이에 그들의 소망을 들어줘서 龜州·漣州 등에 나누어 살게 하고 편안히 생업에 종사하게 하였으며 그 3군의 行首에게는 모두 驛傳의 편의를 제공하여 서울로 보내었다(위와 같음).

③ 오직 中軍行首 進國만 항복하지 않고 그의 무리 150여 명을 이끌고 북쪽 오랑캐에게 투항하고자 하였다. 제검이 군사를 보내어 모두 잡아 죽였다. 龜州別將 東方甫 등 17명은 일찍이 적과 더불어 관계를 맺어 왕래하였으므로 역시 모두 죽였다(위와 같음).

 위의 기록에서도 나타나는 바와 같이 농민군의 결정적인 패인은 보급품의 부족이었다. 특히 북쪽지방은 남도에 비해 토지가 척박하며 겨울이 춥고 길 어서, 그들이 산속에서 자급자족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먹을 양식이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주변 농민들의 양식을 빼앗아서는 안되었다. 그런데 농민군은 주민들을 약탈하여 주변 마을들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이는 주민들로 하여금 농민군에 대한 지지도를 약화시켜 정부군의 공격이 날로 치열해지는 가운데 그들은 점차 고립되는 처지가 되었다.

 이 때를 기하여 관군은 농민군의 투항자에게는 양식과 거처를 마련해 주고 그 우두머리에게는 관직을 제수하겠다고 회유하였다. 위의 사료 ①과 ②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대다수의 농민군이 항복을 하고, 반민의 우두머리였던 광수·김보·사진 등은 각기 교위·섭교위·대정의 벼슬을 제수받았다. 오직 중군행수 진국만은 항복을 거부하였는데, 아마 그는 농민군이 목숨을 바쳐가며 투쟁한 보람도 없이 무조건 투항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여겼던 것 같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급품이 단절된 상태에서 계속적인 항쟁은 무리였다. 그리하여 진국을 따라 끝까지 싸우겠다고 결연한 의지를 표명한 사람은 150명에 불과했다. 역부족을 느낀 그들은 북방의 이민족에게 가서 구원을 청하려고 했는데, 그들이 미처 출발하기도 전에 관군에 의해 붙잡혀 처형되었다. 이로서 서북민의 2차 봉기는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124)≪高麗史節要≫권 12, 명종 7년 7월∼9월.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