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서북민의 2차 봉기
서경성이 함락되고 조위총이 죽은 지 6개월이 지나지 않아 서북지역은 피지배층을 중심으로 다시 소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부는 서북민의 봉기를 진압한 후에 공이 큰 장수들을 치하하고 관직을 높여주었을 뿐 봉기의 원인을 규명하여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려는 적극적인 정책은 전혀 시행하지 않았다. 서북민의 2차 봉기는 명종 7년 4월 靜州·義州에서 일어났으며 이어서 5월에는 서경에서 발생하였다.
① 조위총의 남은 무리 500여 명이 난을 일으켜 留守判官 朴寧과 먼저 항복했던 자들을 죽였는데, 副留守 朴挻義·司錄 金得礪·書記 李純正 등은 몰래 도피하여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처음에 관군이 서경을 포위 공격했을 때 성을 넘어와 항복한 자가 무려 천여 명이었다. 성이 함락되려 하니 성안의 장정들은 모두 도망하여 숨었다. 그 뒤에 항복해 온 자들이 도피한 자의 처라고 하여 부녀자를 약탈하고 재산을 강탈하였으므로 장정들이 난을 일으켜 이러한 변란에 이른 것이다. 大將軍 李景伯, 郎中 朴紹를 보내어 달래게 했다(≪高麗史≫권 19, 世家 19, 명종 7년 5월).
② 조위총이 이미 패함에 남은 무리들이 다시 모여 3軍으로 나누었다. 思進·軾端·進國은 中軍行首로 삼고 戒訓은 指諭가 되고 金甫는 前軍行首로 삼고 光秀는 後軍行首가 되었다. 嘉州·渭州·泰州·漣州·順州의 산골짜기에 흩어져 살면서 앞뒤에서 겁탈함에 크게 백성들의 근심이 되었다. 慈州·肅州를 불태우고 妙德寺·香山寺 등 여러 사원을 도륙하였다(≪高麗史≫권 100, 列傳 13, 朴齊儉).
서경의 경우, 앞서 1차 봉기에서 서경성이 함락될 때 항복하지 않고 도망갔던 무리 500여 명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이 다시 봉기하게 된 원인은 먼저 관군에 투항했던 사람들이 항복하지 않고 도주했던 사람들을 역적이라고 부르면서 그들의 부녀자와 재산을 약탈하므로 분개하여 난을 일으켰다고 한다. 서경뿐 아니라 서북계의 주민 역시 조위총이 죽고 서경·漣州가 함락된 후에도 다시 일어나 험난한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계속적으로 관군에 저항하고 있었음을 위의 글은 보여준다. 그들은 관군에 대항하기 위하여 무리를 모아 3군으로 나누었는데, 이들 지도자의 이름을 보면 思進·軾端·進國·戒訓·金甫·光秀 등이다. 이들 중 姓이 명확하게 나와 있는 사람은 김보 한사람 뿐이다. 여태까지≪高麗史≫의 기록으로 보아 성이 누락되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성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들은 대다수가 농민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이로써 이제 서북계의 대정부항쟁의 주도권은 도령 등 토호계층에서 농민들에게로 넘어갔다고 파악된다.
사실 도령 등 토호들은 그들이 기득권을 가진 계층이었던 만큼 전세가 불리해지자 일부는 관군에 투항하고, 일부는 북방의 금나라와 제휴하여 그들 의 살 길을 모색하는 데 급급했을 뿐, 굳건하게 싸우려는 의지는 보이지 않았다. 조위총의 주도로 시작된 서북민의 1차 봉기가 무려 2년 이상 계속될 수 있었던 원인도 사실은 농민들의 끈질긴 저항에 힘입은 것이었다. 농민들은 처음에는 도령들의 명령에 의해 정부군과 맞서 싸웠지만, 차츰 난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봉기해야 하는 당위성과 자신의 능력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막상 1차 봉기가 종식되었을 때 생활기반이 무너졌을 뿐 아니라 정부의 보복까지 두려워해야 하는 그들에게 돌아갈 곳은 없었다. 더구나 그들은 남도의 농민들과는 달리 유사시에 병사가 될 수 있는 전투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농민군은 서경과 서북계의 묘향산을 중심으로 두 세력으로 나뉘어 관군에 대항하였다. 정부는 抄猛班行首 李頓綽·金立成을 파견하고 뒤이어 5軍別 號와 서북면병마사 두경승, 상장군 이의민 등에게 여러 방면으로 군대를 보내어 서경과 서북계를 공격하게 했다.124) 이 때는 남쪽에서 일어났던 명학소민의 봉기가 진압되고 그 주모자였던 亡伊가 항복을 요청하던 시기였다. 정부는 이제 남쪽에 대한 근심을 떨쳐버리고 서북계에 대대적으로 군대를 파견하였다. 서경민은 물자가 풍부한 관군과 직접 부딪치기에는 전력이 미치지 못함을 깨닫고 그들이 주둔하던 서경 曇和寺를 버리고 香山(妙香山)으로 근거지를 옮겨 서북민과 합류하였다.
정부는 다시 서북계에 박제검을 보내어 興化·雲中道의 병사를 모집하여 반민들을 토벌하게 하였다. 그들은 우세한 무기와 물자를 지닌 정부군과 맞서 싸우지 않고 주로 산골짜기에 숨어서 유격전을 통해 관군과 대치하였다. 특히 그들은 주변 농민들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관군의 동태를 미리 파악하여 연전연승할 수 있었으니, 당시 민심의 동향을 나타내 주는 일면이다. 특히 농민들은 妙德山·향산에 있는 여러 사찰들을 불태웠을 뿐 아니라 寧州 靈化寺를 공격하여 사찰에 대한 적개심을 분명하게 드러내었으며, 또한 승려들을 몰아쳐서 병사로 만들어 漣州를 공격하게 했다. 농민군이 연주를 공격했다는 사실은 이제 산속에서 내려와 정부와 맞서 싸우겠다는 의사를 드러낸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서경지역을 다시 장악하는 데 자신감을 가지고 谷州·遂安을 공격하였다. 그들은 개경과 서경 사이에 있는 여러 지역을 점령함으로써 서경을 관군으로부터 고립시켜 공격할 계획이었던 것 같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 원인은 서경성의 관군을 몰아내기가 쉽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정부의 淸野작전에 의한 식량부족 때문이었다. 따라서 주변 농민들에 의해 식량을 조달하기가 힘들어졌으며, 많은 농민들이 정부군과 싸우느라고 농사를 짓지 못하여 농토는 황폐해졌다. 결국 양식부족을 견디지 못한 대다수의 반민들은 정부군에 투항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 기록은 그 내용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① 西賊의 우두머리 광수를 校尉로 삼고 김보를 攝校尉로, 사진·식단·계훈을 隊正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들이 돌아다니며 노략질하는 날이 오래되니 보루가 없는 촌은 이미 약탈되어 남은 것이 없고 大城은 굳게 지키고 있어서 금방 깨뜨릴 수 없었다. 들에서는 구할 것이 없어서 점차 굶주려 군색해졌으므로 스스로 투항하여 목숨을 연장시키려 하였다. 그 때 마침 嘉州賊이 길에서 昌州의 記事 白公軾을 만나 먼저 항복할 뜻을 말하였다. 齊儉이 그것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달래며 부르니 여러 곳에 주둔해 있던 적들이 서로 이끌고 와서 항복하였다(≪高麗史節要≫권 12, 명종 8년 10월;≪高麗史≫권 100, 列傳 13, 朴齊儉).
② 齊儉이 매번 투항자가 오면 번번이 어루만지며 말하기를,‘너희들도 모두 우리의 백성이다’하면서 창고를 열어 진휼한 것이 전후 합하여 무려 600여 석에 달하였다. 이에 그들의 소망을 들어줘서 龜州·漣州 등에 나누어 살게 하고 편안히 생업에 종사하게 하였으며 그 3군의 行首에게는 모두 驛傳의 편의를 제공하여 서울로 보내었다(위와 같음).
③ 오직 中軍行首 進國만 항복하지 않고 그의 무리 150여 명을 이끌고 북쪽 오랑캐에게 투항하고자 하였다. 제검이 군사를 보내어 모두 잡아 죽였다. 龜州別將 東方甫 등 17명은 일찍이 적과 더불어 관계를 맺어 왕래하였으므로 역시 모두 죽였다(위와 같음).
위의 기록에서도 나타나는 바와 같이 농민군의 결정적인 패인은 보급품의 부족이었다. 특히 북쪽지방은 남도에 비해 토지가 척박하며 겨울이 춥고 길 어서, 그들이 산속에서 자급자족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먹을 양식이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주변 농민들의 양식을 빼앗아서는 안되었다. 그런데 농민군은 주민들을 약탈하여 주변 마을들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이는 주민들로 하여금 농민군에 대한 지지도를 약화시켜 정부군의 공격이 날로 치열해지는 가운데 그들은 점차 고립되는 처지가 되었다.
이 때를 기하여 관군은 농민군의 투항자에게는 양식과 거처를 마련해 주고 그 우두머리에게는 관직을 제수하겠다고 회유하였다. 위의 사료 ①과 ②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대다수의 농민군이 항복을 하고, 반민의 우두머리였던 광수·김보·사진 등은 각기 교위·섭교위·대정의 벼슬을 제수받았다. 오직 중군행수 진국만은 항복을 거부하였는데, 아마 그는 농민군이 목숨을 바쳐가며 투쟁한 보람도 없이 무조건 투항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여겼던 것 같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급품이 단절된 상태에서 계속적인 항쟁은 무리였다. 그리하여 진국을 따라 끝까지 싸우겠다고 결연한 의지를 표명한 사람은 150명에 불과했다. 역부족을 느낀 그들은 북방의 이민족에게 가서 구원을 청하려고 했는데, 그들이 미처 출발하기도 전에 관군에 의해 붙잡혀 처형되었다. 이로서 서북민의 2차 봉기는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124) | ≪高麗史節要≫권 12, 명종 7년 7월∼9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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