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서북민 봉기의 의의
서북지역의 농민봉기는 초기에는 서경유수 조위총이 양계의 도령을 움직여, 당시 무신정권 초기의 혼란한 정세를 틈타 무신집정자들을 배격하고 그가 정치적인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이 봉기가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었던 원인은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의 수탈로 고통을 겪고 있던 농민들과 자기세력 구축에 목적을 둔 양계 토호들이 이에 적극 가담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양계지방의 농민들은 유사시에 전투에 참가할 수 있도록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이 점이 주변 농민들의 지원과 더불어, 관군에 대해 지속적으로 저항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한편 조정은 반민들을 달래려고 다음과 같은 내용의 조서를 내렸다.
㉮ 짐이 不德한 몸으로 잘못 왕위를 계승하여 지혜가 적고 어두우며, 刑政이 어긋나고 위엄은 가볍고 덕은 적어서 아랫사람들을 잘 통솔하지 못하여 서북지방의 백성들이 잇따라 반역을 도모하게 되었다. ㉯ 여러 고을에서 백성들과 근심을 나누는 지방관은 백성들을 해롭게 함으로써 그들이 유리하여 살 곳을 잃어버리게 하지마라. ㉰ 너희들 刑官은 자비심을 가지고 형옥을 처결하라. ㉱ 요사이 奔競이 풍습으로 되고 형정이 매우 어긋나며, 公門을 열고 私路를 막지 못하여 어진 이를 받아들이는 길을 넓게 하지 못하고 있다. ㉲ 만약 忠·孝·友·恭하는 사람이 있으면 귀천을 묻지 말고 특별히 표창하여 권유하도록 하라. ㉳ 화려하고 사치스러움이 정도를 넘고 연회가 너무 지나치니 그런 것을 모두 제거하도록 하라(≪高麗史節要≫권 12, 명종 5년 4월).
㉮에서 국왕은 서북민이 반란을 일으킨 원인을 지방관의 탐학과 형벌의 남용에 의한 것임을 자인하였다. 그리하여 지방관의 백성 침해, 형벌의 남용을 막아 난을 방지하기 위해 노력하도록 지시하였다. ㉱는 토호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한 시책으로 보인다. 즉 뇌물의 수수에 의해 관직에 등용되는 분경으로 인해 지방, 특히 양계의 인재들이 중앙에 등용되지 못하였는데, 이는 주로 무신 권력자들이 행하였다고 하였다.125) 이로써 그는 당시 정치적 모순이 무신들의 전횡에 의한 것이며, 자신은 아무런 잘못을 저지른 적이 없는 것으로 표현하여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고 농민봉기의 원인을 무신들의 탓으로 돌렸다. 그러나 양계 토호들을 중앙정치권에서 멀리한 것은 무신정권 이전부터의 관행으로 굳어져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사실은 아래 사료에서 알 수 있다.
(玄德秀를) 후에 이부낭중을 제수하니 간관이 아뢰기를,‘변방 사람에게 제수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하였다. 이에 병부낭중으로 고쳐서 임명하였다(≪高麗史≫권 99, 열전 12, 玄德秀).
현덕수는 延州地方의 도령으로서 조위총의 난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서북계의 40여 성이 모두 조위총이 일으킨 반란에 호응했을 때 오직 연주만이 끝끝내 반민들에 투항하지 않아 관군이 서북민의 봉기를 진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공로가 큰 현덕수에게 邊城人이라고 하여 특정한 관직을 제수하지 않은 사실은 이전부터 서북인에 대한 차별이 행해지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물론 개경의 집권자들이 변성인이라는 이유로 특정한 관직을 제수할 수 없다는 것은 명분에 불과하고 사실은 북계의 토호세력이 중앙 정치권에까지 침투하는 것에 대한 견제책이었다. 그러나 변성인임을 명분으로 내세웠다는 자체가 양계 토호에 대한 정부의 시책을 보여준다. 이같은 차별정책은 서북민의 항쟁이 끝난 이후에도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음을 위의 사실은 말해 주고 있다.
그 외에 국왕은 충·효·우·공 등의 유교도덕을 선양하였다. 이는 서북민의 봉기가 고려왕조를 부정하는 반역임을 강조하여 충에 위배된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했으리라 보여진다. 농민봉기에서 또 하나의 원인이 되는 것이 계급간의 갈등으로 생각되는데, 앞의 조서 가운데 ㉳의 내용은 지배층의 사치로 인해 빈자와 부자와의 갈등이 가속화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즉 사치금지가 일반 농민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지배층의 경각심을 촉구하는 것이라면, 권세가나 대토지 소유자의 지나친 사치는 빈곤에 허덕이는 농민들에게 충분히 비판과 원망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명종의 조서는 지배층의 시혜 조치로서 서북인에 대한 일시적인 위무책에 불과할 뿐 농민봉기의 근본 원인을 살펴 사회체제를 개혁하고자 하는 의지는 전혀 담겨져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서북민의 1차 봉기가 실패하여 대부분의 토호들이 이탈한 이후에도 농민들은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고자 계속하여 봉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서북민의 2차 봉기가 끝날 즈음인 명종 8년 정월에 정부는 농민들이 다시 봉기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적극적인 정책을 시행하였다. 즉 탐학한 지방관을 축출하기 위하여 각 지방에 察訪使를 파견한 것이다.
① 찰방사로 공부낭중 崔詵을 興化道에, 형부원외랑 崔孝著를 雲中道에, 합문지후 林惟謙을 朔方道에, 감찰어사 崔敦禮를 沿海溟州道에, …장군 宋君秀를 全羅州道에, 형부시랑 李文中을 廣淸州道에, 기거주 皇甫倬을 春州道에 나누어 보내어 백성들의 질고를 물어서 관리 및 奉使者의 상벌을 실시하였다. 그 시기를 10년 이전까지로 한정시켜 성적의 우열을 追論토록 하였는데 무릇 탄핵받은 자가 800여 명이나 되었다. (최)효저는 조사함에 정밀하지 못하다고 하여 파면되었다(≪高麗史≫권 19, 世家 19, 명종 8년 정월).
② 전라도의 宋君秀는 승진과 파면을 마음대로 하였으나 권문의 자제라 물의를 일으키는 사람이 없었다(≪高麗史節要≫권 12, 명종 8년 정월).
③ 각 도 찰방사가 잡아온 贓吏 35명을 용서하였다(≪高麗史≫권 19, 世家 19, 명종 8년 3월 신해).
④ 조서에 이르기를,‘짐이 듣건대 지난 해에 10도 찰방사가 관리를 출척할 때 어긋남이 많았다고 한다. 그 중에 지나치게 포상을 받은 자는 오히려 괜찮으나, 잘못 형벌을 받고도 원통함을 호소할 곳이 없는 자들은 가히 애석하지 아니한가. 그 모두를 용서하고 옛날 관직에 따라 서용토록 하라’하였다(≪高麗史≫권 20, 世家 20, 명종 11년 9월 병자).
정부는 각 도에 찰방사를 보내어 백성들의 고통을 묻고 탐학한 수령을 내쫓게 했다. 이같은 정책을 시행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서북민을 회유하기 위해서이지만 그 외에도 남쪽지방에서 명종 6년(1176)부터 1년 반 동안 지속되었던 공주 명학소민의 봉기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된다. 그 결과 무려 800여 명이 탄핵됨으로써 지방관 비리의 쇄신을 꾀하였다. 그러나 사료 ①·②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정부에서 파견된 찰방사가 공정하고 청렴한 인물이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즉 위의 내용에서 최효저는 출 척이 정밀하지 못하다고 파면되었지만, 송군수는 관리들의 파면과 임명을 마음대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당대 권세가의 한 사람인 송유인의 아들이므로 아무도 제재를 가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것으로 보아 찰방사도 세력의 강약 여부에 따라 폄출된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가 있다.
지방관의 탐학은 중앙에 뇌물을 바치기 위해서가 한 요인이었다면, 중앙의 권세가들이 스스로 청렴하지 못하면서 지방관의 수탈을 방지하겠다는 자체가 한계일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요인이었다. 정부는 서북민의 항쟁이 미처 나기도 전에 찰방사의 탄핵을 받아 이송된 贓吏 35명을 사면하였으며, 서북민의 항쟁이 끝난 이후에는 모두 복직시켰다. 결국 정부는 백성들을 일시적으로 무마시키기 위해 찰방사를 보냈을 뿐 피지배층을 위한 적극적인 개혁 의지는 거의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정부는 서북지방 농민들에 대한 시책을 특별히 마련하지 않았으나 토호들이 반란에 가담하지 않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다음은 서북민의 2차 봉기가 끝난 직후에 정부가 행한 토호들에 대한 회유책이다.
왕이 便殿에 나아가 동서 양계 여러 성의 上長과 都領을 인견하고 상장에게는 匹段을, 도령에게는 비단옷과 金帶와 말 1필씩을, 그리고 하인들에게는 각각 포 10필을 하사하였다. 西賊을 평정한 이후에도 도적이 자주 일어나므로 다시 동요할까 두려워하여 이와 같은 하사가 있었으니, 식자들은 그 고식책을 한탄하였다(≪高麗史≫권 19, 世家 19, 명종 8년 11월 무자).
정부측에서 볼 때는 양계 토호들의 행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더라도 농민들과 토호 두 계층을 모두 적으로 만들고서는 양계를 다스리기가 곤란하였을 것이다. 더구나 이곳은 고려의 국경지대였다. 정부는 양계지역의 기득권을 보유하기 위해서는 끝까지 고려정부에 대항할 수 없던 토호들을 포섭함으로써 서북지역민의 항쟁을 종식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양계 토호들은 정부측의 후대를 받았다. 그리고 만일 고려정부에 대항하지만 않는다면 앞서 봉기에 가담했던 일을 불문에 붙일 뿐 아니라, 양계지역에 대해 정부측의 지나친 간섭은 배제하겠다는 모종의 약속이 이루어졌던 것 같다. 이같은 토호들과의 만남이 있은 이후에 자신감을 얻게 되어, 2차 봉기 이후에도 곳곳에 흩어져 있던 반민들에 대한 정부측의 태도는 더욱 강경해졌다. 즉 정부는 서북지역의 도령 등과 화해하였으므로 양식을 나누어 주어 농민군을 위무한다고 하여 龜州·嘉州 등 여러 성에 모이게 하고는 곡식창고에 가두었다. 이에 농민군은 정부가 그들을 속인 데 분개하여 곡식창고에 불을 질러 함께 타 죽는 참극이 벌어지게 되었다.126) 이는 양계 토호들의 묵인이 없었더라면 함부로 자행될 수 없는 일로서, 2차 봉기가 끝날 무렵에는 토호들이 방관자적인 자세에서 정부측으로 돌아섰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살아남은 반민들은 牛方田을 중심으로 뭉쳐서 계속 항거하였으나 결국 역부족으로 패배하였다.127) 이에 따라 토호들을 제외하고는 서북지방 농민들은 정부로부터 별다른 개선책을 약속받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서북민의 항쟁은 무신정권이 들어선 후에 최초로 대규모로 일어나서 민중의 힘을 과시한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그리하여 묘청의 난에서도 많은 인명을 학살한 정부가 서북민의 항쟁이 끝난 이후에는 그 수뇌급인 최소한의 인원만 죽이거나 가두는 데 그치고 있다. 이것은 정부가 이제는 민중의 힘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농민들은 지방관의 탐학이나 중앙 정부의 과도한 공물 징수에 분개하여 일어났으나 이같은 수탈체제가 고려사회의 구조적 모순으로 인한 것임은 인식하지 못하였다. 이 점은 서북민의 항쟁이 5년 이상이나 치열하게 전개되면서도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새정부 수립까지는 표방하지 못했던 사실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비록 실패했으나 5년 이상이나 지속되었던 서북민의 봉기를 시발점으로 남쪽에서는 공주 명학소에 이어 全州·雲門·草田·慶州 등 각지에서 농민·천민의 항쟁이 계속되었다. 이 봉기의 후유증으로 서북지역은 명종 10년 이후에는 다소 조용해졌지만, 고종대에 몽고족의 침입으로 고려 조정이 어수선한 틈을 타서 다시 일어났다. 즉 서경의 군인 崔光秀가 중심이 된 고구려 부흥운동, 韓恂·多智로 대표되는 義州民의 봉기가 그것이다. 서북민의 봉기는 무신정권기 농민항쟁의 효시로서 피지배층의 힘을 결집하여 지배층에 항거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