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석전희
石戰은 돌팔매질을 하여 승부를 다툰 것으로 고려 때는 擲石戱라고도 불렀다. 그 기원은 고구려이며 尙武精神을 기른 대표적 경기놀이로 다음과 같이 놀이하였다.
해마다 정월 초순에 浿水 위에 모여 놀이를 하는데 왕이 수레를 타고 羽儀를 갖추고서 이를 보고, 끝나면 왕이 옷을 물 속에 넣는데 좌우 두 패로 만들어서 서로 물을 뿌리고 돌을 던지면서 고함쳐 쫓기를 두세 번 하고 그친다(≪隋書≫ 권 81, 列傳 46, 東夷 高麗).
숙종 때 여진정벌의 핵심적 편제였던 別武班에는 석전과 관련있는 石投班이 들어 있는데,1087) 이것은 석전의 전술적 가치를 응용한 측면일 것이다. 충선왕이 왕위에서 물러난 후 팔관회를 베풀자 충숙왕과 함께 儀鳳樓에 나갔다가 다음날 고관대작을 위한 모임을 가졌는데 그들의 종복이 넓은 뜰에 들어와서 서로 싸워 돌을 던졌다. 임금이 있던 누상에까지 미치자 이들을 붙잡아 곤장을 쳤다고 한다.1088) 이 때와 충목왕 때 한때 금하기도 했으나 공민왕은 단오를 잘 지키며 격구와 석전을 즐겼다. 우왕 역시 이 놀이를 좋아하였다. 우왕 6년(1380) 단오날에 왕은 석전놀이를 보고자 했으나 知申事 李存性은 왕이 볼 것이 아니라고 간하자, 왕은 小竪로 하여금 이존성을 때려서 쫓아 보내고 자신이 탄환을 쏘기도 하였다.1089)
우리 나라 풍속 단오날에 무뢰한들이 떼지어 거리로 몰려나와 좌우 두 편을 갈라 기왓장이나 돌을 가지고 던지며 싸우면서 때로는 짧은 방망이를 가지고 승부를 결정하는데 이를 石戰이라 했다(≪高麗史≫ 권 134, 列傳 47, 신우 6년 5월).
위에서 보건대 석전은 단오날 민간에도 널리 퍼졌음을 알 수 있다. 우왕 10년에는 鴟巖에서 석전을 보고 그것에 능한 여러 사람을 불러 술을 주고 또 杖을 주어 그 기술을 다하게 하였다.1090)
단오날 석전희가 성행하는 것을 보고 목은은 시로 소감을 나타내었는데, 석전희를 할 때 돌이 날아가는 소리에 섬뜩한 느낌을 가지고 바라보는 노년의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10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