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지방 행정체계
(1) 도의 직제와 행정체계
조선시대의 도제는 태종조 8도체제가 확립된 뒤 각 도역은 한말까지 큰 변동이 없었으나 감영과 감사의 임기 및 겸관문제에 대해서는 계속 논란이 많았고 또 부분적인 수정이 가해졌다.
경기도:국초부터 한성부와 개성부가 京官制에 편입되면서 수도의 외곽지대를 관장했던 경기도는 조선 후기에 와서 4都체제가 갖추어지면서 광주·개성·수원·강화부가 경관직에 편제되어 경기도에서 분리되었다. 경기도 감영은 당초 수원에 개영하여 1년 임기에 경기감사가 그 곳을 중심으로 도내 제읍을 순력하였다. 단 경기감사는 서울을 한 가운데 두고 그 사방 군현을 순력하는 데서 감사로서의 부임절차와 임무수행이 타도 감사와는 상이한 점이 많았다. 가령 후기의 관례로서 경기감사에 제수되면 서울의 雇馬廳에서 到界하며 곧 걸내에 들어가서 숙배한 다음 별도의 감영에 있지 않고 감사의 사가에서 공무를 집행하는 관례가 있었다.
충청도:태조 4년(1395) 종전의 양광도에서 충청도가 분리 확정되자 관찰사를 설치하고 청주목에 감영을 두었는데, 태종과 세종조에 감사의 兼牧문제가 대두하면서 태종 16년(1416)과 세종 30년(1448)에 충청도 감사가 한때 감영 소재읍인 청주목사를 겸임한 적이 있었으나 곧 환원되었다.
경상도:경상도의 감영은 개국 초에는 경주에 있다가 세종 초부터 상주로 옮겨 임란 때까지 존속되었다. 경상도는 타도에 비해 地廣人衆이란 이유로 태종 7년에는 낙동강을 경계로 강의 서쪽을 우도, 동쪽의 좌도로 분도하기도 하였고, 중종 14년(1519)에는 감사의 업무가 과중하다 하여 종전의 구분대로 분도하여 우도감사는 상주목사를 겸하고 좌도감사는 경주부윤을 겸하게 하여 2명의 감사를 둔 적이 있으나 기 묘사화로 인해 동년 12월에 다시 환원되었다.
전라도:전라도 감영은 국초부터 전주에 설치된 이래 1894년까지 변동이 없었다. 전주는 왕실의 관향으로서 줄곧 전라도의 감영이 되었던 것이다. 세종 30년에 전라도도 타도 감사와 마찬가지로 감영 소재읍인 전주부윤을 겸하였다가 단종 2년(1454)에 환원되었고 선조 34년(1601)에 다시 감사가 부윤을 겸하였다가 동왕 40년에 환원되었다.
강원도:태조 4년 강원도에 관찰사를 설치하고 원주에 설영한 이래 한말까지 감영의 변동은 없었다. 또 강원도 감사는 지역과 기후를 고려한 나머지 여름철에는 강릉과 삼척 등 영동에 체류하는 시간이 많았고 기타 계절에는 원주와 춘천 등 영서지방에 체류하면서 열읍을 순력하였다. 강원도 감사도 세종 30년과 중종 14년(1519)에 한때 감사가 원주목사를 겸임한 적도 있었다.
황해도:서해도에서 풍해도 또는 황해도로 도명의 변경과 함께 감영도 황주·풍천·해주로 옮겼다. 태조 4년 해주에 감영이 개설된 이래 변동이 없었으며, 세종 30년과 중종 14년에 한때 감사가 해주목사를 겸임한 적이 있었다.
평안도:태종 13년에 관찰사를 설치하여 평양에 감영을 개설한 이래 한말까지 변동이 없었다. 평안도는 함경도와 함께 이남 6도와는 처음부터 감사의 직제가 상이하여 임기 2년에 「率眷兼尹」하게 되었다.
함경도:태종 16년에 함길도에 관찰사를 설치하고 함흥부에 감영을 개설하여 부윤을 겸하였다. 그 후 세조 13년 李施愛亂 때 부중 사람에 의한 감사 살해사건을 계기로 성종 원년에 감영을 영흥으로 옮겨 永安道로 했다가 중종 4년에 다시 함흥부로 환원하였다.
이상과 같이 조선 초기에는 전국이 8도체제 하에 있으면서 도에 따라 감영과 감사의 직제에 차이가 있었다. 평안·함경도는 양계지방이란 특수사정으로 인해 처음부터 임기 2년의 솔권 겸윤한 데 비하여 이남 6도는 도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처음에는 임기 1년에 단신 도게하여 감영에 별도의 읍관을 둔 채 임기 동안 계속 도내 열읍을 순력하였다. 그 후 세종·중종·선조조에 걸쳐 감사의 久任과 兼尹·兼牧 문제가 조정에서 누차 거론되어 한때 양계 감사와 동일한 계도를 실시한 적도 있으나 그러한 시기는 모두 잠시였다.
도의 장관인 감사는 그 선임에서 부임까지 크게 3단계로 구분되는데, 첫째는 감사의 직에 제수되는 것이며, 둘째는 謝恩 및 辭朝하는 것이며, 셋째는 到任(界)하는 것을 말하는데, 감사는 이러한 단계를 거쳐야만 비로소 감사로서의 직위가 확고해진다 할 수 있다. 감사는 그 포괄적인 직임을 유감없이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되므로 학식과 덕망이 높고 강직·공정·청렴한 자라야 했다. 감사 임용의 배제요건으로서는 贓吏의 자손이나 행실이 옳지 못하였거나 재가한 여자의 소생에게는 감사직이 제수되지 않았다. 감사의 相避규정도 타관직보다 광범하게 제약을 받아 그 도의 兵使·水使·守令·虞侯·評事·都事·察訪 기타 邊將 등과 친척관계가 되는 자에게는 감사에 제수되지 않았다. 또한 감사는 병사·도사와 함께 원칙적으로 출신도의 감사는 될 수 없었다.207)
각 도 감사의 관계를 조사해 보면 종2품을 중심으로 그 이상인 정2품 이상과 그 이하인 정3품이 많은데 경관직과 마찬가지로 行守法이 적용되었다. 대체로 조선 초기에는 종2품 이상이 많이 임용되었고 중기에는 법정 관품대로 종2품이 주류를 이루다가 후기에는 정3품인 通政이 감사로 임명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시기에 따른 이러한 변화도 있었지만 오히려 각 도에 따른 행수법이 더 널리 적용되었다. 경기·경상·평안도와 같이 국가가 매우 중시하는 도에는 정2품 이상이 선임되었고 황해·강원도와 같은 작은 도에는 종2품 이하가 임명되는 경우가 많았다.
감사의 제수 절차로는 일반적으로 매년 정월에 의정부·6조·대간의 관원은 감사의 적임자를 이조에 천거하였는데, 이조에서는 모든 후보자 중에서 엄선하여 최후의 후보자 3인, 즉 3望을 구비한 望單子로서 왕의 落點을 받아 임용하였다.
제수받은 감사는 부임에 앞서 謝恩과 辭朝를 거쳐야 하는데, 사은이란 임관·승진·전보된 자가 국왕의 은혜에 감사하는 뜻에서 궐내에 들어가 大殿·大妃殿·世子宮 등에 謝思肅拜를 드리는 것으로, 특히 외직에 제수되었을 때는 사은을 마치고 乞暇도 하였다. 사조란 사은축배를 드린 후 일정한 기간 내에 부임준비를 끝내고 다시 입궐하여 왕에게 하직의 숙배를 드리는 것을 말한다. 사조는 특히 감사 임기의 출발이라는 점에서, 또한 직위를 확고하게 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시되었다. 새로 제수받은 감사가 대전에 사조할 때에는, 대체로 왕은 그 도의 제반 사정에 대한 교시와 아울러 왕의 치정방침과 선정할 것을 당부하고, 감사는 자기 계획이나 포부, 직무에 소홀하지 않고 성의를 다할 것 등을 왕에게 개진하기도 하였다. 하직숙배가 끝나면 부임에 앞서 주요 관직에 있는 사람을 찾아가 부임인사를 해야 하는데 그 도의 전임감사나 政曹大臣들이 그 대상이었다.208)
신임감사가 서울을 출발하여 도계까지 도착하면, 이 때 전임감사를 비롯한 감영소속 관원과 이속 및 도계에 있는 수령들이 출영하여 신임감사를 환영하였다. 신구감사 사무의 인계인수는 감영시설이 갖추어진 양계와 그렇지 못 한 이남 6도 및 6도의 감영이 양계의 감영과 동일한 시설과 체제를 갖춘 영조 30년대 이후에 따라 사정이 달랐다. 즉 감영체제가 갖추어진 경우는 도계지점에 위치한 交龜所에서 하거나 감영에서 했지만, 조선 초기 이남 6도의 경우, 감영체제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을 때는 예외없이 도계지점의 교귀소에서 거행했던 것이다.
관찰사(감사)의 권한과 기능은 고려 이래 조선 후기까지 도제와 감사직제의 정비에 따라 계속 확대되어 갔다. 감사의 직함이 말해 주듯이 임기 6개월의 안찰사·안렴사는 관내 수령의 치읍을 주로 안찰·염찰하는 데 있었다면, 都觀察黜陟使로 바뀌게 되는 회군 이후에는 감사의 권능이 한 도의 행정·군사·사법을 포괄한 도정 전반을 관찰하고 수령의 근무성적을 고과하여 포폄하는 데 있었던 것이다. 벌써 여말부터 나타난 감사의 긴 직함인 ‘都觀察黜陟使兼監倉·安集·轉輸·勸農·管學事, 提調刑獄·兵馬公事’라는 내용에 감사의 주요 업무가 모두 포괄되어 있었다. 즉 도내의 모든 정사를 관찰하고 관내 외관을 출척하면서 그 관할업무를 보다 세분하여 ① 도내의 모든 창고에 보관된 관곡의 감독, ② 도민의 민생안정과 유이민의 안집, ③ 조세·공부의 수송·농잠·수리·식수 등의 권농사업, ④ 도내의 인재양성과 지방교육 및 교화업무 등을 겸임하며, 형옥과 같은 사법문제와 군정은 왕명과 중앙정부의 지시를 받아 품계하거나 협의·처리한다는 것이다.
감사는 국초부터 직급·임기·겸임·솔권·업무한계 등에 대하여 많은 논란이 있었다. 초기에는 수령의 감찰관으로 감사의 파견에 만족하지 않고 分臺·行臺監察·敬差官·察訪(驛官이 아닌) 등을 수시로 특파하여 감사·수령의 치도·치읍과 진제·민생질고를 조사 보고케 하였다. 한편 태종 3년(1403) 6월에는 종래 시행되고 있던 각 도 감사의 「管內守令權差法」을 폐지했으며 세종 8년(1426) 7월에는 감사도 대간처럼 수령의 비행을 풍문 탄핵케 하였다. 또한 감사는 관내 부윤과 도의 군정전담관인 병사·수사와는 관계상 동급이란 데서 행정체계와 업무수행상에서 갈등과 차질이 간혹 있게 되었다. 본래 한 도의 민정과 군정을 감사와 병사에게 분담시켜 양자로 하여금 分權相制케 한 것이나 실제 군사지휘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없는 감사가 군무까지 총괄하는 데서 문제가 많았던 것이다.
감사의 권한은 국초에는 막강했으나 점차 사헌부와 분대·행대에 견제당하여 위축되어 갔다. 그러나 왕조 전체를 통하여 볼 때, 감사는 한 도의 행정·군사·감찰권을 한 손에 쥐고 있었다. 또한 감사는 국가의 기본이 되고 근간이 되는 인적 지원의 확보와 관리를 책임지고 있었다. 따라서 한 도의 호적·군적·요역의 관리는 물론, 경지·산릉·소택·광산·염분·목장과 같은 각종 재원과 수세원의 관리 등 전반적인 국가재산의 관리에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 또한 감사의 직무 가운데는 권농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진황지 개간, 수리시설, 양전, 적시 파종과 수확 및 농경기술을 개발시킬 책임을 지고 있었다. 한편 조선시대에는 흉년·기근이 잦았기 때문에 도민에 대한 賑濟의 책임을 지고 있었다. 여기에는 질병에 대한 의료, 유이민에 대한 안집이 포함된다.
형옥에 대한 감사의 권한도 컸다. 지방의 수령은 笞刑 이하는 律에 의거 直斷할 수 있되, 杖刑 이상은 감사에게 보고한 후 명을 받아야 벌을 줄 수 있었다. 또한 감사는 3품 이하와 流刑 이하는 직단할 수 있었다. 그러나 2품 이상의 고관 범죄자에 대해서는 직단할 수 없으며, 이 때에는 왕의 허가를 받아서 처리해야만 하였다. 사형수는 三覆法으로 처리하였는데, 감사는 먼저 差使員을 정하여 그 읍의 수령과 함께 추문케 하고, 그 다음에 차사원 2명을 정하여 考覆케 한 후, 마지막 단계로 감사가 親問한 다음 啓達케 하였다.
감사는 수령과 함께 管學事 즉 도내의 교육과 주민의 교화에 책임을 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감사는 순력할 때마다 향교에 들러 謁廟 考講을 하며, 관내의 교수와 훈도를 감독하고, 수령에 대한 고과 기준에서 「興學校」 문제에 비중을 두어 취급하였다. 조선왕조는 국초부터 농잠과 교학 장려책을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삼아 서울에 성균관과 학당을 확충 또는 설립하여 인재양성에 주력하는 한편, 지방에는 군현마다 향교를 설치하여 민풍 순화, 지방민 교화 등 숭유주의에 입각한 교육정책을 적극 권장하였다.
감사의 직함이 관찰사라는 데서 감찰기능이 특히 중시되었다. “수령은 백성을 다스리고, 감사는 수령을 다스리고, 국왕은 감사를 다스리는 바 그 중점은 모두 백성에게 있는 것”이라 한 세조의 말과 같이, 近民之官인 수령을 감찰하는 것이 감사의 중요한 임무였다. 따라서 감사는 소관지역을 순력하여 수령의 치정을 공정하게 고과하고, 연 2회 等第啓聞하였는데≪경국대전≫고과조에 보이는 것처럼 ‘觀察使具守令七事實跡 啓聞’이라 하여 7사의 실적을 고과의 기준으로 삼았던 것이다. 감사가 수령 7사에 대하여 행한 고과표를 밀봉하여 왕에게 직접 올리면, 왕은 친히 열람하고 승지로 하여금 봉함한 후 이조에 송부하였다. 이조에서는 접수와 동시에 이를 전사하여 사헌부로 移文하였다. 감사가 평가하여 계문한 고과는 수령의 포폄에 직결되었기 때문에 그것은 절대적인 권위를 가졌다. 하지만 상·중·하로 등제하는 고과에 뚜렷한 비율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때로는 수령들의 성적이 거의 모두가 「上」으로 등제되는 등의 모순도 없지 않았다. 감사는 수령뿐 아니라 관내의 모든 외관에. 대해서도 규찰의 대상으로 삼아 수령의 예에 따라 고과·포폄하였다. 거기에는 찰방·역승·도승·교수·훈도·심약·검률 등이 포함되었다.
감사는 이상과 같은 일반행정·사법뿐 아니라 군사적인 기능까지 관장하고 있었다. 「監司摠治軍民」이라 한 데서 군정도 당연히 감사의 권한에 포괄되지만 감사의 직함에는 으레 병사·수사를 겸함으로써 더욱 확실해졌다. 감사는 결국 도내 일반 행정장관으로서의 기능, 감찰관으로서의 기능 및 군사적인 기능까지를 수행했던 지방의 최고 외관이었다.
≪淸選考≫소재 8도외 감사를 조사해 보면 한 사람이 같은 도에 재임, 3任이 있는가 하면, 동일인이 2∼3도 내지 4∼5도 감사를 역임한 자가 많았다. 중앙정부에서 소수의 선택된 관료군이 政曹·三司·承政院을 배타적으로 자기들끼리 자리를 바꾸어 가면서 승진·전임했듯이, 8도 감사의 자리도 선택된 소수의 관료들에 한해 점유되고 있었다.
도정을 총괄하는 관찰사는 감영을 중심으로 관내의 제읍을 순력하면서209) 업무를 수행하였다. 감영을 구성하는 기구로서는 인적 구성과 물적 시설로 나눌 수 있다. 전자에는 도의 장관인 감사 밑에 首領官인 경력(종4품) 또는 도사(종5품)와 판관·교수(종6품) 및 종9품의 훈도·심약·검률을 각 1명씩 두며, 행정실무를 담당하는 영리와 천역을 지는 영노비 등이 있었다. 후자에는 감사의 관아를 비롯하여 속료들의 衙舍, 吏隷들의 거소 기타 館樓·창고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경력 또는 도사는 감사의 수령관 즉 수석부관이란 뜻이며, 양자가 모두 관찰사의 보좌관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경력을 두면 도사를 두지 않고, 도사를 두면 경력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양자가 함께 재직하면서 각기 사무를 분장하여 직무를 수행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경력과 도사는 비록 관품의 높고 낮은 차이는 있다고 할지라도 직무의 내용은 동일했던 것이다.
도사는 亞監司(亞使)로서 한도를 규찰하고 감사 유고일 때에는 감사직을 대행하였으며, 감사가 순력할 때에는 감사와 소관지역을 나누어 순찰하기도 하였다. 특히 도사는 도내의 감찰·사법·향시·감시·교생고강 및 전정·군정 등의 사찰과 감독업무를 띠고 있어 마치 경중 각사의 감찰 직임과 비숫하였다.
조선시대 외직으로서의 판관은 크게 세 가지 종류가 있었다. 첫째는 대읍수령의 부관격인 판관으로 국초 이래 각 도의 계수관인 부·목에 설치되었다가 중기 이후에 가서는 濟州·鏡城을 제외하고는 모두 폐지되었다. 둘째는 조운과 관련하여, 경기도에는 수운판관, 충청·전라도에는 해운판관이 각각 설치되었으나 이것도 후기에 가서 혁파되었다. 셋째는 감사가 임기 2년에 솔권 부임하여 감영 소재읍의 부윤 또는 목사·부사를 겸임할 때 營下 읍에 두는 판관(평양은 종4품인 서윤)이 있었다.
감사의 속료로서는 국초부터 파견되었던 검률과 심약 및 후기에 새로 설치된 中軍 등이 있다. 검율과 심약은 각기 형조와 전의감에서 차송되는 임기 15개월의 무록관이며 전자는 율의 해석, 적용과 집행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고 법규와 刑의 통일을 기하는 직책을 가지며, 후자는 의원으로 감영과 병영 등의 의약사무를 관장하였다. 이들은 관물의 遞送이나 공문의 전달 등 驛政을 관장했던 찰방과 함께 감사가 순력할 때는 반드시 수행하였다. 8도 감영에 1명씩 배치된 중군은 정3품 당상관으로서 병조에서 차공되며 도내의 군사업무를 관장하였다.
이러한 감사의 보좌관 외에 감영에는 일찍부터 행정실무를 담당하는 營吏와 영중 잡역과 사환을 담당하는 營奴婢가 있었다. 군현에는 향리가 있듯이 감영에는 병영·수영과 같이 각 읍에서 차출된 영리가 있었다. 영리의 충원과 교체는 도내 각 읍의 유력한 호장급에서 차출하되 일정한 임기를 가지고 新差·重任·遞任 등 신진대사가 항상 계속되었다. 영리는 향리와 마찬가지로 이·호·예·병·형·공의 6방과 承發·啓書 등으로 업무가 분장되었고 도내의 역리에서 차출되는 驛頭가 있으며 그 정원은 도에 따라 일정하지 않았다. 영리는 감사가 순력할 때에 향도 내지 안내자로서, 또는 감사의 명령을 받아 수령의 치읍과 민정을 염탐하는 역할도 맡았다. 특히 감사의 순력에는 영리의 활동이 컸다. 감사는 관내 수령의 비행을 적발하기 위하여 영리를 사방으로 풀어 정보를 수집케 하는 한편 감사를 수행하는 영리는 감사의 수족으로 행세하였다.
도정을 총괄하는 관찰사의 임기가 1년이냐 2년이냐에 따라 감영의 기구와 시설에 차이가 있었다. 태종조 8도체제가 확립된 뒤에도 양계와 경기 및 남부 5도에 따라 임기는 물론, 감사가 겸윤(겸목)·솔권 여부에 따라 감영의 내부구조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충청·경상·전라·강원·황해 5도는 각기 청주·상주·전주·원주·해주를 감영으로 하고 있었으나 이들 감영의 소재읍에는 부윤 또는 목사가 각기 부관인 판관을 대동하여 읍을 다스리고 있었고, 비록 감영이 설치되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초기의 평양이나 함흥처럼 宣化堂·澄淸閣·布政門 등과 같은 감영 전속의 관아시설은 없었다. 이러한 감영은 도정을 총괄하는 중심지 또는 수합지로 역할하였고 임기 동안 끊임없이 순력해야 하는 감사의 일시 휴식하는 곳으로 간주되었다.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