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기술관
213)조선시대 기술관은 특수한 技術學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총칭하는 것인데,여기에서의「技術」이란 요즈음의 테크닉(Technic)이란 의미보다는「藝能」즉 실용적인 기술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술학을 조선시대에는 雜學이라고 하였으며, 이에 종사하는 사람 즉 기술관을 雜業人이라고도 하였다.
기술관을 양성하기 위한 기술학은 이미 고려시대에도 설치되어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國子監에서 유학과 함께 교육되었기 때문에 아직 기술학이 유학 에 비하여 별로 차별대우를 받지 않았다
조선시대에도 기술관을 양성하기 위한 기술학을 중시하여 개국 초부터 이를 설치하였다. 즉 태조 2년(1393)의 6학 설치시 律學·字學·譯學·醫學·算學이 설치되었으며, 태종 6년(1406) 10학 설치시에는 태조 2년 때보다 늘어나서 吏學·譯學·陰陽風水學·醫學·字學·律學·算學·樂學이 설치되었다. 그 후 ≪경국대전≫의 반포 시행으로 태종 6년에 설치된 기술학에 약간의 가감이 가해져서 譯學(漢學·蒙學·女眞學·倭學 포함)·醫學·陰陽學(天文學·地理學·命課學 포함)·算學·律學·畵學·道學이 설치되었다. 일반적으로 조선시대의 기술학이라 하면 ≪경국대전≫에 나타나 있는 역학·의학·음양학·산학·율학·화학·도학을 가리킨다. 그리고 ≪경국대전≫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악학·자학도 조선시대의 기술학 중의 하나였다.
이러한 기술학에 종사하는 기술관으로는 여러 기술학의 생도를 비롯하여 현직 및 전직의 譯官·醫官·天文官·地官·算官·律官·畵員·道流·禁漏·樂生·樂工·尙道·志道·善畵·善繪·畵史·繪史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 역관·의관·천문관·지관은 정3품 당하관까지 올라갈 수 있는 상급기술관 이라 할 수 있고, 산관·율관·도류·금루·화원은 종6품 전후에서 거관되는 하급기술관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악생·악공·상도·지도·선화·선회·화사·회사 등은 공·상인이나 천인 계층에서도 들어갈 수 있는 流外雜 職의 기술관이었다. 이 중에서 상급기술관과 하급기술관이 중인신분층에 속하는 것이고, 잡직 기술관은 공·상인 또는 천인신분층에 속하는 것이었다.
조선시대에 기술직에 종사하기 위해서는 먼저 각각의 기술학에 입속하여 기술학 생도가 되고, 다음으로 전문지식을 습득하여 잡과나 기술관(잡학)취 재에 합격해야만 하였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잡과에는 譯科(한학·몽학·여진학·왜학 포함)·醫科·陰陽科(천문학·지리학·명과학 포함)·律科가 있었으며, 기술관취재에는 역학·의학·음양학·율학·산학 등의 잡직취재가 있었다.
기술관을 양성하기 위한 기술교육은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에 國子監에서 실시한 것과는 달리 소관 기술관아에서 실시하였다. 중앙의 경우 역학은 司 譯院, 의학은 典醫監과 惠民署, 율학은 刑曹, 음양학은 觀象監, 산학은 戶曹, 화학은 圖畵署, 도학은 昭格署에서 각각 교육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지방은 지방관아에서 교육시켰는데 역학의 경우 인접국과의 교통로에 있는 지역 즉 한학은 平壤·義州·黃州, 여진학은 義州·昌城·北靑·理山·碧潼·滿浦·渭原, 왜학은 薺浦·釜山浦·鹽溥 등에서 담당하였다. 그리고 의학과 율학은 府·大都護府·牧·都護府·郡·縣의 모든 지방관아에서 담당하였다. 이처럼 중앙과 지방에서 기술교육을 받는 기술학 생도의 총정원은 ≪경국대전≫에 나타난 것에 의하면 6,736인이었다.
기술학 생도가 되어 기술학을 배우는 자는 조선 초기에만 해도 국가에서 기술학을 중시하여 장려하였을 뿐만 아니라 기술관에 대한 차별도 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양가자제뿐만 아니라 사족자제(衣冠子弟)들도 있었다. 그러나 유학사상을 지도이념으로 하는 양반관료 체제가 확립되는 15세기 후반부터 사대부관료들에 의해 기술학이 관념적으로 천시되었을 뿐만 아니라 기술관이 양반관료에 비해 법제적으로 차별대우를 받기 시작함으로써 사족자제들이 기술직에 종사하기를 꺼려하였다. 따라서 사족자제들이 기술학 생도가 되어 기술학을 배우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기술학은 점차로 사족신분층의 所業에서 벗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기술학은 크게 세 부류의 사람들이 소업으로 하는 경향이 나타나게 되었다. 우선 15세기 말 이후 하급신분층으로 격하된 기술관들이 기술직을 세전하는 경향이 나타남으로써 기술관의 자손들이 기술학 생도가 되었다. 조선 초기 이래 기술관의 정예화를 위해 기술직의 세습이 강조되었으나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던 것이 이제 기술관의 양반신분으로의 상승이 힘들어 진 마당에 기술관으로서의 지위나마 자손 대대로 유지하기 위해 기술직을 세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조선 초기에 상급 지배신분층에서 도태된 부류인 서얼들이 기술 학 생도가 되었다. 조선 초기에 庶孽差待法과 庶孽禁錮法에 의해 차별대우를 받아 하급 지배 신분층으로 격하된 서얼 가운데 2품 이상 고위관료의 첩자손이 ≪경국대전≫규정에 의해 기술직에 종사할 수 있게 되고, 얼마 있지않아 2품 이상 고위관료의 첩 소생 증·현손에게 잡과 응시가 허용됨으로써 고관집 서얼의 경우 사족의 소업에서 벗어난 기술학의 생도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한편 하급 지배신분층인 기술관보다 하위의 신분층 가운데 기술학 생도가 되는 부류가 있었다. 조선사회에서 기술관보다 하위의 신분으로서 사족신분이 아니면서도 지방의 토착사회에서는 유력하거나 총명하고 부유한 축에 들었던 교생이나 향리 3정 1자 및 양가자제 등이 기술학 생도가 되기를 원하였다. 왜냐하면 이들은 기술학 생도가 되거나 잡과·기술관취재를 통하여 면역의 특전을 받을 뿐만 아니라 기술관으로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가에서도 사족자제들의 입학 기피현상으로 침체상태에 있는 기술학을 발전시키기 위해 이들을 기술학 생도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에 따라 양민 상층부에 위치해 있는 자들이라고는 하지만 평민신분의 교생·양가자제 등이 기술학 생도가 된 뒤 기술관으로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게 되었다.
기술학 생도들은 중앙의 경우 전공 기술학에 따라 소관 기술관아에서, 지 방의 경우 지방관아에서 각각의 전문서와 함께 경서와 ≪경국대전≫을 배웠다.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학업에 정진케 하기 위해 日講·月講의 시험을 보였는데, 그 성적은 연말에 총합되어 취재의 자료가 되었다. 이들의 교육은 중앙의 경우 소관 기술관아의 敎授(종6품)·訓導(정9품)가 담당하였는데, 한학교수 4명 중 2명, 의학교수 4명 중 1명만이 문신이 겸임하는 것이고 나머지는 모두 기술관으로 임용되었다. 그리고 지방의 경우 역학은 한학훈도를 평양·의주·황주, 여진학훈도를 의주·창성·북청·이산·벽동·위원·만포, 왜학훈도를 제포·부산포·염포에 각각 파견하여 담당하도록 하였다. 의학은 처음에는 각 도에 1명씩 파견되는 醫學敎諭가 도내를 순회하며 담당토록 하였으나, 뒤에는 지방의 유학교수와 훈도가 겸해서 맡도록 하였다. 그러나 의학교육이 부실해지자 지방의 의생을 각지에서 34명 선발하여 5년에 한 번씩 중앙의 전의감과 혜민서에 올려보내 교육토록 하였다.214) 지방의 율학생도의 경우에도 각 읍에서 1∼2명씩 뽑혀 올라와 형조에서 교육을 받았다.
한편 조선시대에는 사족자제들이 기술학에 종사하는 것을 꺼려 기술학이 침체하게 되자 이의 진흥을 위해 習讀官制度를 두었는데 ≪경국대전≫에 의하면 漢學 30인, 醫學 30인, 吏文 20인, 天文學 10인을 두었다. 습독관에는 士族年少■敏者, 蔭子弟, 四館參外官, 成均館·四學儒生 등 상급 지배신분층에 속하는 자들이 임명되었다. 습독관이 되면 매월 일정기간(10∼15일 정도)소속 기술관아에서 전공 기술학을 분번 습독하였다.
습독관의 전공 기술학 정진을 위해 국가에서는 이들에게 丘史를 넉넉히 지급하고, 軍職遞兒職을 주며, 성적 우수자는 顯官에 啓授하고, 생원·진사에게는 習讀仕日을 성균관 居館圓點(출적일수)으로 간주해 주는 등의 특전을 부여하였다. 그러나 기술학에 대한 관념적 천시와 기술관직에 대한 법제적 차별대우는 문신이나 생원·진사 등으로 하여금 습독관이 되는 것을 꺼리게 하였다. 습독관이 되면 장차 화·요·청직으로의 진출에 지장이 있기 때문 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되도록이면 습독관에 임명되지 않기를 바랐으며, 임명되더라도 이를 빨리 모면하려 하였다. 결국 기술학 진흥을 위해 마련했던 습독관 제도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던 것이다.
기술학 생도들은 소정의 기술학을 배운 후에 정기적 기술관 자격시험이라 할 수 있는 잡과, 그리고 기술학 생도 및 각 기술관아의 權知와 전직 기술관들을 대상으로 하는 평시의 채용시험이라 할 수 있는 기술관취재를 통하여 기술관직에 임용되었다.
잡과는 모든 기술학을 대상으로 다 실시된 것은 아니었다. ≪경국대전≫이 반포된 후 잡과는 역과·의과·음양과·율과만이 시행되었다. 따라서 잡과 에 응시할 수 있는 기술학 생도는 역학·의학·음양학·율학의 생도에 국한되었다. 잡과는 초시·복시의 두 단계만을 거쳤으며, 합격자에게는 禮曹印 이 날인된 白牌를 주었다. 문·무과가 殿試를 거쳤고 합격자에게 紅牌를 주었다는 점, 그리고 문과 합격자에게 주는 홍패식과 생원·진사시 합격자에게 주는 백패식에는 국보가 날인되었다는 점과 비교하여 볼 때 잡과는 문·무과는 물론이고 생원·진사시 보다도 경시되고 있었다.
잡과 합격자는 일단 해당 기술관아의 散官職인 권지로 분속되고 이후 기술관으로서 자신의 전문지식을 가지고 국가에 봉사하게 된다. 그러나 사족신분이 아닌 교생·향리 3정 1자·양가자제들은 잡과에 합격하여 기술관이 된지 얼마 안되어 소업을 버리고 鄕曲으로 돌아가 閑遊廢業하는 경우가 많았다. 향리 3정 1자의 경우에는 기술학 생도를 거쳐 잡과에 합격한 후 기술직을 받아 거관하면 免鄕의 특전을 받았고, 그 후 문과에 급제하면 사족 즉 양반신분으로 상승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었다.215) 결국 기술직이 지방의 비사족자제들의 면역 내지는 신분상승을 위한 길처럼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시대의 기술학 발전에 저해가 되는 요소였으며, 또한 전문가로서의 정통한 기술관을 양성하려는 국가의 본뜻에도 어긋나는 것이었다.
기술관취재는 4孟朔에 실시되었는데 기술학 생도와 각 기술관아의 권지와 전직 기술관 등이 응시하였다. 취재에 합격하여 1년에 2번 있는 都目政事에서 선발된 기술관은 체아직을 받았다. 대부분의 기술관은 祿官遞兒職(동반체아직)인 각 기술관아의 기술직을, 습독관과 중앙 각 관아에 파견된 의원 등은 군직체아직(서반체아직)을 제수받고 있었다. 체아직은 다수의 관원이 돌아가며 소수의 職窠를 제수받아 띄엄띄엄 한 번씩 受祿하는 제도일 뿐만 아니라 직전법으로 바뀐 뒤 체아직에는 직전을 주지 않게 되어 기술관은 직전도 지급받지 못하였다. 따라서 체아직을 제수받는 기술관은 正職을 제수받는 양반관료에 비해 차별대우를 받았다. 그런데 습독관의 경우 비록 기술학을 습독하였다고는 하나 출신이 문신 또는 생원·진사로서 종6품으로 거관한 후 동반현직 또는 수령으로 나아갈 수 있었으므로 출신이 달라 동반직에 나아 갈 수 없는 기술관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그러므로 습독관의 대우도 기술관보다 좋았다. 즉 습독관 정원과 군직체아직과의 비가 약 3:1로서 녹관체아직을 받는 기술관의 약 10:1보다는 나았다.
이와 함께 기술관들은 한품서용의 제한을 받음으로써 역시 양반관료에 비해 큰 차별대우를 받았다. 역관·의관·천문관·지관같은 상급기술관이 정 3품 당하관까지밖에 올라갈 수 없었고, 나머지 하급기술관(산관·율관·화원·도류·금루)은 종6품 전후에서 거관되었다. 그들 중 간혹 당상관에 임용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것은 국왕의 特恩에 의한 특별한 예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기술관에 대한 차별대우와 천시는 사족자제들로 하여금 기술학 종사를 기피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 결과 기술관의 신분적 지위가 15세기 말 이후에는 하급 지배신분층으로 격하되는 모습을 보이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직종을 세전하면서 1세기쯤 지나자 中人(좁은의미의 중인)이라는 조선사회 특유의 독특한 신분적 성격을 뚜렷이 드러내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기술관들이 15세기 말 이래 점차 하급 지배신분층으로 전락하여 양반 중심의 조선사회에서 정치적 역할은 담당하지 못하였지만, 조선사회의 모든 기술분야는 사실상 이들의 손에 의해 좌우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 은 조선사회의 기술분야에서 중요한 기능을 발휘하였던 것이다.
역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역관이라고 불리웠으며, 그 외에 譯 語之人·譯語人·譯人·譯者·舌人·舌者·象胥 등으로도 불리웠다.216) 물론 역학생도도 역학에 종사하는 사람이었다. 역관은 중국과의 사대, 왜·몽고·여진과의 교린 등의 외교에서 주로 통역을 담당하였다. 즉 역관들은 사신과 함께 중국 등에 파견되어 통역의 임무를 수행하였고, 또한 중국 등의 사신이 우리 나라를 방문했을 때 통역을 맡았다. 그러므로 역관들은 조선시대의 사대교린, 즉 외교관계에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존재였던 것이다. 그래서 조정의 대신들은 역학 또는 역관을 천하게 여기면서도 역어의 임무가 국가의 중대사임을 자주 강조하였던 것이다.217)
이와 같이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던 역관의 대표적인 것은 通事였다. 통 사는 어학실력에 따라 3등분해시 상등은 通事, 중등은 押物·押馬, 하등은 打角夫라고 하여 외국의 사행에 함께 파견되었다.218)
역관들은 기본적인 임무인 통역 이외에 때때로 경제적·문화적으로 다양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경제적으로 역관들은 사행 때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여러 물품을 구입하는 실무자의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그 밖에 그들에게 특별히 허용된 사무역의 기회를 통해 사사로운 경제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우선 역관들은 우리 나라에서 나지는 않으나 필요한 물품인 서적·약재·비단 및 병기에 사용되는 水牛角 등을 필요로 하는 각 관서의 부탁을 받고 사행길에 수입해 오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역관들의 사무역은 상대국의 웃음을 사는 것이라 하여 국초에는 금지하고 있었으나, 태종 17년(1417)에 사신 일행에게 개인적인 물품의 소지가 허용됨으로써 역관들에 의한 사무역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이에 따라 역관들은 양반관료 등의 부탁을 받고 우리 나라에서는 생산되지 않거나 얻기 힘든 물 품들을 수입하여 왔는데, 대체로 그 물품과 수량은 국가의 규제를 받고 있 었다.
역관들의 사무역은 중국을 왕래하는 역관들에 의해 특히 많이 이루어졌 다. 이들은 중국에서는 희귀한 것으로서 우리 나라에서는 구하기 쉬운 것을 갖고 가서 비싼 값에 팔아 이익을 남기고, 또한 중국에서 경서·희귀한 약 재·사치품 등을 들여와 국내에서 비싼 값에 파는 등 이중으로 이익을 남겼 다. 따라서 역관들은 사무역을 부업으로 삼았으며, 이를 통해 국가로부터 遞 兒祿 외에 별다른 반대급부를 받지 못하는 자신들의 어려운 생활문제를 해 결하였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재산을 모은 자들도 있었다. 역관들의 이러한 무역활동은 사실상 조선시대 무역활동의 중심을 이루는 것이었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역관들은 통역만이 아니라, 무역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문화적으로 역관들은 선진문물이나 기술을 일찍 접하게 되어 선진 외래문물 수용의 선도를 담당하는 역할을 하였다. 실제로 조선 전기의 역관 들은 採銀法,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算法, 석회 만드는 법, 병선의 건조법 등 실질적인 기술 도입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한편 조선시대에 역관들의 역학에 대한 정진은 국어학 발전에도 간접적인 도움을 주었던 것 같다.219)
의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醫官·醫員·醫士 등으로 불리웠으며 의학 생도도 이에 포함된다.220) 이들은 주로 국가의 의료사업을 담당하였다. 이들 중에 內醫院에 소속된 자들은 국왕을 비롯한 왕실의 진료나 제약을 주로 담당 하였으며, 때로는 왕명에 따라 종친 및 2품 이상 고관의 치료도 담당하였 다. 전의감에 소속된 자들은 종친 및 조정 신하들의 치료뿐만 아니라, 때로 는 일반 민중이나 병졸들의 치료도 담당하였으며, 또한 약초의 재배나 唐藥 材의 수입에 관한 일도 맡고 있었다. 따라서 전의감 소속 의원들은 의학 발 전과 백성의 질병 치료에 크게 기여하였다. 혜민서에 소속된 자들은 주로 일 반 서민들에 대한 치료활동과 鄕藥材의 수납을 맡고 있었다. 그리고 活人署 (조선 개국 초에는 東西大悲院)에 소속된 자들은 이 곳에 수용된 도성 안의 질병자를 치료하였는데 때로는 전염병 환자의 救療를 맡았으며, 또한 빈민 및 죄수들의 구료를 담당하였다.
한편 ≪경국대전≫에 의하면 조선시대의 지방 주현에는 모두 의학생도가 있었으며, 지방의 경우 대체로 醫生들이 치료를 전담하고 있었으므로 의료의 혜택이 지방의 곳곳에까지 미쳤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방민에 대한 의 료 시혜는 관리나 도성 안의 거주자들에 비해 훨씬 미치지 못하였다. 이처럼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다루는 의료 활동도 조선시대의 양반사대부들에 의해 국가의 필요 불가결한 일로 여겨졌지만,221) 의학이나 이에 종사하는 의관들 은 천시되고 있었다.
그 외에 율관은 법전 운영의 실무를 주로 담당하였으며, 산관은 수학이나 통계·계산 등에 관한 일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觀象監 소속인 천문관은 曆 象日月星辰을 담당하였고, 지관은 풍수지리설에 의거하여 길한 곳에 산소나 집터를 택하는 일을 담당하였으며, 명과학에 종사하는 사람은 점복 등에 관 한 일을 맡았고, 금루는 漏刻 즉 물시계로 시간을 알아내는 등의 일을 맡고 있었다. 또 화원들은 御容과 각종 儀軌圖·地圖의 제작을 맡는 등 조정의 기록을 필요로 하는 일체의 繪事를 담당하였고, 그 밖에 士大夫의 청탁을 받아 契會圖나 순수한 감상을 위한 人物·山水·翎毛·花卉 등 여러 분야의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화원들은 중국이나 일본에 파견되는 사신을 수행하여 이들 나라와의 교섭 및 문화 전파에 기여하기도 하였다.222) 그리고 도류는 昭格署에 소속되어 도교의 속설인 신선사상과 제천행사가 결부된 醮祭에 관한 일을 담당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 기술관들의 임무는 국가외교·보건후생·사회생활·과학·예술 등 거의 모든 문화 전반에 걸친 다양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양반 사대부들은 기술학이나 기술관을 천하게 여겼으면서도, 이러한 기술학 내지 는 기술직이 국가의 중대한 일이라 하여223) 그 필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 었다.
그런데 조선시대의 기술관들은 직전도 받지 못하고 行職的인 성격을 가진 체아직만을 국가로부터 받았는데, 이것마저도 수직의 기회가 드물었으므로 그들의 생활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기술관이 되어 면역이나 신분상승 의 목적을 달성한 자들이 귀향하여 한거하였다든지, 또는 기술관이 되는 자 가 비록 사족은 아니었다 해도 지방의 교생·향리·양가자제 중에서 세력을 갖고 있거나 부유한 자들이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그들이 토착지방에 생활근거는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기술관이 되는 자들은 생활보다 는 그들의 신분을 상승시키는 데 더 큰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한편 기술관이 된 자들이 그들의 토착지방을 떠나 오랫 동안 서울에서 기술직에 종사하더라도 체아직에서 받는 녹봉 이외에 전문기술이나 지식을 활용하여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예컨대 역관은 사행 때에 사무역을 행하여 이익을 남겼고, 의관은 의술을 베풀므로써, 지관은 산소나 집터를 보아줌으로써, 화원은 그림으로써 각각 대가를 받아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리 고 그들 중에는 상당히 많은 재산을 모은 사람도 있었다.
기술관들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한층 더 양반과의 신분적 장벽이 높아지게 되자 19세기 중엽에는 의·역관 등 상급기술관들을 중심으로 신분상승 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즉 스스로 사족의 후예임을 내세우며 자신들을 청·요직에 진출할 수 있게 해달라는 通淸運動224)이 바로 그것이다.
213) | 技術官에 관해서는 다음의 글을 주로 참고하였다. 李成茂, 앞의 글(1971). 朴星來, <朝鮮儒敎社會의 中人技術敎育>(≪大東文化硏究≫17, 19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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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 | 孫弘烈,≪韓國中世의 醫療制度硏究≫(修書院, 1988), 216∼217쪽. |
215) | 李成茂, 앞의 글(1970), 87∼88쪽. |
216) | 譯官에 관해서는 다음의 글을 주로 참고하였다. 元永煥, <朝鮮時代의 司譯院制度>(≪南溪曺佐鎬博士華甲紀念論叢≫, 1977). 이남희, 앞의 글 白玉敬, <朝鮮前期 譯官의 性格에 對한 一考察>(≪梨大史苑≫22·23, 1988). |
217) | ≪中宗實錄≫권 49, 중종 18년 9월 임진. |
218) | ≪文宗實錄≫권 3, 문종 즉위년 9월 기미. ≪成宗實錄≫권 67, 성종 7년 5월 정사. |
219) | 姜信沆, <李朝時代의 譯學政策에 關한 考察>(≪大東文化硏究≫2, 1966). |
220) | 醫官에 관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고하였다. 金斗鍾, <近世朝鮮의 醫療制度의 變革과 醫療保護事業의 追憶>(≪鄕土서울≫8, 1960), 4∼22 쪽. 孫弘烈, 앞의 책. |
221) | ≪成宗實錄≫권 139, 성종 13년 3월 을묘. |
222) | 安輝濬, <朝鮮王朝時代의 畵員>(≪韓國文化≫9, 1988). |
223) | ≪中宗實錄≫권 49, 중종 18년 9월 임진. |
224) | 韓永愚, 앞의 글(1988) 및 앞의 주 28) 참조.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