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중인
1) 중인의 개념
185)조선시대에는 지배계층인 兩班에는 미치지 못하고 피지배계층인 良民(常人)보다는 우위에 있는 중간신분층으로서 中人이라 불리는 독특한 신분층이 있었다.
이 같은 신분개념으로 중인이라는 용어가 쓰이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이 후 즉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이다. 그런데 조선 후기의 여러 기록들은 중인 신분의 범주에 관하여 각기 차이를 보이고 있어 이해의 혼란을 초래하고 있 다. 그러나 이를 종합하면 중인은 크게 좁은 의미의 중인과 넓은 의미의 중 인으로 구분된다.
좁은 의미의 중인은 주로 중앙의 여러 技術官衙에 소속되어 있는 譯官·醫官·天文官·地官·禁漏·算官·律官·寫字官·畵員 등의 기술관원을 총칭하는 것이다. 이들은 雜科試驗에 합격해서 선발된 기술관원이거나 雜學取才를 거쳐서 뽑힌 기술관원들로서 모두가 동반 소속의 관원이었다. 그러나 넓은 의미의 중인은 중앙의 기술관을 비롯하여 지방의 기술관, 그리고 서얼, 중앙의 서리와 지방의 향리·토관·군교·교생186) 등의 여러 계층을 포괄적으로 일컫는 것이다. 이 넓은 의미의 중인이 바로 조선시대 중간신분층으로서의 중인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 중인들은 스스로 중인으로 불리는 것을 꺼리는 부류와 스스로 중 인을 자칭하는 부류가 있었다. 좁은 의미의 중인인 중앙의 기술관의 경우 주관적으로는 士族의 후예임을 자처하는 동시에 양반과 다름없는 법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들은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자신들과 함께 넓은 의미의 중인으로 불리면서 동류로 취급되는 것을 불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반면에 향리와 장교 및 교생 등은 중인임을 자칭하는 부류들이었다.
중인은 양반도 아니고 양민도 아닌 그 중간에 존재하고 있다는 계급적 중간성에서 붙여진 호칭이다. 간혹 기술관원들이 조선 후기의 四色黨論에서 중립을 지켰기 때문에 호칭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고,187) 또 기술관원들이 서울의 중심부에서 거주했기 때문에 호칭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으나,188) 모두 적절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중인이 양반과 양민 사이에 위치한 중간신분의 개념으로 쓰인 것이 17세기 이후부터라고 해서 중간신분층의 존재가 17세기에 별안간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미 조선 초기부터 지배신분층의 양분화에 따라 중인 신분의 전단계인 하급 지배신분층이 형성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189) 즉 15·16세기를 거치면서 지배신분층이 사족 중심의 상급 지배신분층과 기술관 및 경·외서리 등의 하급 지배신분층으로 양분화되어 상급 지배신분층은 배타적인 양반 신분으로 변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하급 지배신분층은 현실적인 지위나마 유지하기 위하여 그들의 직종과 신분을 세습해 나가게 되고, 그리하여 이들은 양반화하는 상급 지배신분층도 아니고 그렇다고 피지배 계층인 양민도 아닌 양자의 중간에 위치하는 신분으로 점차 그 틀을 잡아가게 된 것이다.
조선시대에 중인의 신분적 지위는 양반에는 미치지 못하였지만 양민보다는 높은 위치에 있었다. 이러한 중인도 넓게는 지배계층에 포함되며 대체로 그 하부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양반과 함께 지배계층에 속했다 하더라도 중인은 양반과 신분적으로 엄격히 구분되어 서로 간에 교유가 없었다. 특히 조선 후기에 와서 향리·교생 등 향촌의 중인과 양반인 사족과의 장벽이 오히려 양민과의 장벽보다 더 엄격한 것으로 지적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중인과 양반, 중인과 양민 사이에 계급적 장벽이 가로놓여 있었다 하더라도 그 장벽이 법제에 의하여 규정된 것이 아니고 사회관습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상호간에 상하 이동이 전혀 불가능한 신분적 장벽은 아니었다. 실제로 적은 사례에 지나지 않지만 그 장벽을 뛰어넘는 상하 이동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한편 중인은 그 안에 포함된 잡다한 부류의 사람들이 각기 올라갈 수 있 는 최고의 품계, 즉 限品에 따라 상·중·하의 세 계층으로 구분된다. 상층 은 정3품 당하관이 한품인 계층으로서 상급기술관인 역관·의관·천문관·지관, 문·무관2품 이상의 良妾子孫 등이 이에 속한다. 중충은 정4품 이 하 종6품까지의 참상관이 한품인 계층으로서 하급기술관인 산관·율관·금루·화원·道流,190) 문·무관2품 이상의 賤妾子孫과 3품 이하 6품 이상 관리의 양·천첩자손 및 7품 이하 無職兩班의 양첩자손, 그리고 錄事·土官·戶長 등이 이에 속한다. 하층은 7품 이하의 참하관이 한품이거나 품계가 없는 계층으로서 7품 이하 무직양반의 천첩자손과 書吏·六房鄕吏·軍校 등이 이에 속한다.
조선시대 여러 부류의 중인은 양반관료제 통치기구의 하부에서 직종에 따 라 중세국가의 운영에 필수적인 통역·의학·천문기상·법률·산술 등의 전문적인 각종 실용기술을 전담하였다. 또한 중앙관청과 지방관아에서 행정말단의 실무를 담당하였는데, 착취적인 성격이 강하여 농민들로부터 비난을 받기 쉬운 대민수취 업무도 이에 포함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중인은 양반관료를 도와 그들이 수립한 정책을 실제적으로 수행한 자들로서 조선왕조의 중세적 양반정치를 보좌하는 존재 내지는 양반정치의 하수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중세국가 운영에서 양반이 정책입안자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면, 중인은 행정실무자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조선시대 중인이 양반의 지배를 받고 있었지만, 그들도 넓게는 지 배신분층의 일부로서 그들이 世傳하고 있는 전문적인 기술지식이나 행정능력을 통하여 양반에 못지 않은 지식과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 나름의 독특한 中人文化를 향유하고 있었다. 예컨대, 그들만의 전문적인 기술지식과 특수한 문서양식, 그리고 독특한 시문인 委巷文學이 이에 해당된다. 또한 그들 특유의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어서 행동이 민첩하고 깔끔하며 이해관계에 밝고 대인관계에 능하였다 한다.
185) | 중인의 개념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고하였다. 李成茂, <朝鮮初期의 技術官과 그 地位-中人層의 成立問題를 中心으로->(≪柳洪烈博士華甲紀念論叢≫, 1971). ―――, <朝鮮前期의 身分制度>(≪東亞文化≫13, 서울大, 1976). ―――, <朝鮮前期 中人層의 成立問題>(≪東洋學≫8, 檀國大, 1978). 許善道, <朝鮮時代 中人硏究>(1981년도 문교부 학술연구 조성비에 의한 연구보고서). 鄭玉子, <朝鮮後期의 技術職 中人>(≪震檀學報≫61, 1986). 韓永愚, <朝鮮時代 中人의 身分·階級的 性格>(≪韓國文化≫9, 서울大, 1988). 鄭武龍, <朝鮮朝 中人階層 試考(I)>(≪論文集≫12, 慶星大, 1991). |
---|---|
186) | 향교에는 조선 초기 이래 士族子弟뿐만 아니라 土官·平民子弟도 입학하였다 (李範稷, <朝鮮前期의 校生身分>, ≪韓國史論≫3, 1976 참조). 이러한 현상은 조선 후기에도 이어지는데, 조선 후기의 경우 신분적 차이에 따라 향교에서의 거처를 달리하며 사족자제는 東齋, 서얼·평민자제는 西齋에 거하였다. 이들 중 서재에 거하는 서얼·평민 출신 校生들이 점차 평민보다는 약간 우위에 있으나 사족에는 미치지 못하는 존재로 여겨져 中人으로 불리어지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다음의 글들이 참고가 된다. 朴連鎬, <仁祖∼肅宗年間의 軍役과 校生考講>(≪정신문화연구≫1986, 봄). 全炅穆, <朝鮮後期 校生의 身分에 관한 再檢討>(≪宋俊浩敎授停年紀念論叢≫, 1987). 尹熙勉, <朝鮮後期 額內校生>(≪東亞硏究≫13, 1988). |
187) | <「象院科榜」 수록 中人通淸運動資料>(≪韓國學報≫45, 一志社, 1986), 251∼262 쪽 및 玄檃,≪中人來歷의 略考≫참조. |
188) | ≪備邊司謄錄≫권 111, 영조 18년 10월 11일. |
189) | 조선왕조 성립 이후의 신분제 개편방향에 대한 견해는 현재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 있다. 하나는 지배계층을 상급 지배신분층과 하급 지배신분층으로 兩分化시킴으로써 상급 지배신분층은 兩班化하고 하급 지배신분층은 中人化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良賤制 사회를 이룸으로써 良人身分이면 양인 내의 상·하 신분을 성취적으로 획득할 수 있게 되었는데, 16세기 이후 士林派의 등장과 함께 양인신분층이 점차 兩班·中人·常民으로 분화되어 갔다는 것이다(자세한 연구동향은 이 책 I편 2장의 2절<4분설>및 3절<양분설>참조). 이에 대해 필자는 전자의 입장에 서서 이 글을 서술하였다. |
190) | 道敎의 祭天行事를 주관한 昭格署에 소속된 雜職으로서 임진왜란 때 재차 혁파된 후 다시 설치되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 후기에는 존재하지 않았다(李鍾殷, <昭格署硏究>,≪比較文化硏究≫7, 漢陽大, 198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