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향리
230)鄕吏는 주·부·군·현 등 대소 지방관아에 소속되어 행정실무를 담당하고 있던 계층으로서 外衙前이라고도 하였다.
대체로 호족의 후예인 향리는 고려시대에는 각 지방의 실질적인 지배자로 서 토호적 성격을 띠고 있었는데, 이것은 고려왕조의 중앙집권화를 가로막 는 큰 요소였다. 그래서 고려에서는 향리에 대한 계속적인 억압정책을 써서 그들의 세력을 억제하는 한편 향리의 상층부를 과거나 서리직을 통하여 중 앙관료로 흡수함으로써 왕조의 기반인 관료층을 보강하였다.
그리하여 고려 말에는 향리의 세력이 상당히 약화된 모습을 보이게 되었 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향리 출신의 중앙관료 진출이 특히 고려 후기에 활발해져서 이들을 주축으로 주자학을 신봉하는 신진 관료군인 신진사대부층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조선을 개국한 사대부관료들은 고려 말에 문란해진 신분질서를 재편하기 위해 지배계층을 상·하 두 계층으로 양분화하기 시작하였다. 이의 일환으로 사대부관료들은 기득권층으로서 자신들이 보유한 정치적·사회적 지위를 배타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자신들을 배출한 모집단인 향리층이 계속 중앙관료로 진출하는 것을 억제하기 시작하였다. 즉 향리가 생원·진사시에 응시할 때 반드시 本官의 허가를 받도록 했고, 향리에게는 생원 진사시의 복시 전에 보이는 學禮講(소학·가례 시험) 이외에 4서와 1경을 더 시험보도 록 하였다. 이러한 제약으로 인해 조선 초기 이래로 향리가 과거에 합격해 서 문신으로 진출하는 것은 크게 억제당하게 되었다.
또한 향리들은 조선 초기에 사대부관료들의 향리 억압정책에 따라 그들의 세력이 크게 약화되고 아울러 사회적 지위도 크게 저하되었다. 우선 군·현 의 개편에 따라 향리 세력의 중심지인 縣司가 이동되고 향리의 수가 많은 군·현에서 적은 군·현으로 다시 배정됨에 따라 많은 향리들이 그들의「本貫地」를 떠나 다른 군·현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이에 따라 향리들은 오랫동안 본관지에 구축해 놓은 그들의 세력 기반을 한꺼번에 잃어버려 그 세력 이 크게 약화되었다. 그리고 유향소를 설치하여 향리의 작폐를 규찰하게 되 고, 또 토호적 향리를 제거하기 위한 원악향리 처벌법을 제정함으로써 향리 의 토호적 성격이 크게 배제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향리의 지위도 종래의 지방 지배자적 위치에서 지방관아의 행정실무자 또는 행정사역인으로 전락하여 버렸다.
이리하여 향리는 조선 초기부터 사족과는 구분되는 하위의 신분층으로 격하되게 되었다. 즉 향리는 國役의 특수한 형태인 鄕役과 其人役을 부담하고, 그 외에 잡역도 부담하는 有役人으로 파악되어 사족과는 사회신분적으로 구분이 되고 있었다. 그리고 복색에 있어서도 고려시대에 紫衫을 입는 계층이었던 상급향리인 호장에게 자삼 아래의 綠衫을 입게 하고, 사족만이 입는 紅染의 착용을 금지하였으며, 하급향리에게는 方笠을 쓰게 하여 사족 신분과 구별되도록 하였다.
향리가 위와 같이 조선 초기부터 지방행정 실무자 또는 지방행정 사역인으로 전락하는 한편 비사족신분으로 인식되어 상급 지배신분층인 사족계층과는 사회신분적으로 뚜렷이 구별되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조선 초기에 이 미 지방사회의 지배신분층 안에서 지방행정 실무 즉 향역을 부담하는 향리층이 분화되어 나옴으로써, 지방사회의 지배신분층이 사족계층을 중심으로 하는 상급 지배신분층과 향리 등을 중심으로 하는 하급 지배신분층으로 나뉘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향리는 세습적으로 지방관아에서 행정실무를 담당하여 온 유 역인이였다. 이러한 향리의 세습적 직사를 향역이라 하였으며, 이것은 향리 의 身役인 동시에 국역으로 파악되었다. 이 외에도 향리는 중앙 각 관아에 選上되어 柴炭을 공급해야 하는 기인역을 부담하여야 했으며, 때로는 잡역 도 부담하여야 했다. 이들은 유역인이었기에 군역을 지지 않았으며, 그 대 신 유사시에 대비하여 편제한 예비군인 잡색군에 편입되어 있었다.
향리의 의무적인 향역은 지방관아에서 수령을 보좌하여 각종 행정실무를 직접 담당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수령은 일정한 임기가 있고 행정실무에 어두운데다가 자신의 본거지인 출신 고을에는 부임할 수 없었기에 부임한 지방의 사정에도 밝지 못하였다. 반면에 향리는 대대로 그 지방에 살면서 오랫동안 행정실무를 담당하여 왔기 때문에 지방사정에 밝았다. 그러므로 수령은 향리의 보조가 없이는 부임한 지방을 원활하게 다스려 나갈 수가 없었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지방의 행정실무는 거의 대부분이 향리들의 손에 의하여 좌우되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지방관아의 행정조직은 중앙관제의 축도로서 이·호·예·병·형·공의 6房으로 나뉘어졌고, 그 사무는 6방향리들에게 분담되었다. 6방향리의 여러 가지 직무 가운데 주요한 것은 일반 농민들의 호적을 정리하고 貢賦와 군역 및 徭役을 독려하는 것이었다. 6방향리 가운데 이방·호방·형 방의 首吏는「三公兄」이라고도 하였으며, 특히 향리의 수반인 戶長은 수령 이 부재할 때에 그 직무를 대리하는 수석향리였다.
향리들이 의무적으로 지방관아의 행정실무를 담당하고 있었지만,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와 달리 그들에 대한 반대급부를 지급하지 않았다. 즉 조선시대 향리에게는 녹봉이 지급되지 않았다. 그리고 고려시대 이래 향역의 대 가로 지급되었던 外役田도 조선 초기인 세종 27년(1445)에 혁파됨으로써 향 리들은 전지의 지급대상에서도 제외되었다. 이후 향리들은 국가로부터 공식적으로 향역에 대한 반대급부도 제대로 받지 못하였다. 다만 지방관아에서 자체 수입 가운데 일부를 떼어 편법으로 향리들에게 약간의 급료를 지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조선시대 향리가 반대급부를 제대로 받지 못하였다고 하지만, 그들은 자기 조상이 고려시대에 지방의 실질적 지배자로서 확보해 놓은 토지와 노비 등의 경제적 기반을 물려받은 자들이었다. 이러한 사적 경제기반이 있었기 때문에 조선시대 향리들은 공식적인 반대급부가 없이도 그들의 생계를 유지하는 데 그다지 큰 어려움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공식적인 반대급부가 없었다는 점은 결과적으로 그들이 각종 폐해를 저지르게 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향리들은 지방행정의 실질적인 담당자로서 조선 초기 이래로 직무와 관련하여 지방민들에 대해서 그들 나름의 권세를 부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각종 폐해를 자아냄으로써 지방행정을 문란시키는 동시에 지방민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또한 이들은 수령이 행정실무나 부임지 사정에 어둡다는 것을 이용하여 수령을 농락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강직하고 능력있는 수령이 부임하여 향리들을 제어하면 향리들은 음모를 꾸며 그 수령을 고소하고, 반대로 탐오한 수령이 부임하여 자기들의 부정에 동조하면 그 수령이 비록 잘 못한 일이 있더라도 덮어주는 일까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조정에 서는 향리가 왕권 대행자인 수령을 고소하는 것을 금하였다.
이와 같은 향리들의 작폐는 토호적 향리와 표리관계를 이루는 것으로서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려는 입장이었던 조정으로서는 향리의 작폐와 토호적 향리 두 가지 모두를 없애야만 하였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원악향리의 10가 지 예를 규정하고, 이 규정에 따라 원악향리로 판정된 자는 殘驛의 역리로 영속시키는 처벌을 하도록 하였다. ≪경국대전≫에 조문화된 원악향리의 10가 지 예는 다음과 같다.
① 守令을 조롱하여 권력을 마음대로 하여 폐단을 일으키는 자 ② 몰래 뇌물을 받고서 役을 지우는 것을 불공평하게 하는 자 ③ 稅를 거둘 때 횡렴하여 남용하는 자 ④ 良民을 冒占하여 은폐하고 役使시키는 자 ⑤ 田莊을 넓게 설치하여 백성을 부려 耕種하는 자 ⑥ 마을을 횡행하면서 남의 것을 빼앗아 私利를 도모하는 자 ⑦ 귀족의 권세에 붙좇아 本役을 부당하게 회피하는 자 ⑧ 役을 피하여 도망하여 숨고 있는 자를 촌락에 받아들인 자 ⑨ 官의 위세에 假托하여 民人을 침학하는 자 ⑩ 良家의 여자 및 官婢를 첩으로 삼는 자
그러나 원악향리 처벌법에도 불구하고 향리들의 작폐는 계속 자행되고 있었다. 그 이유는 향리들이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공식적인 보수가 지급되지 않는 데다 향리들을 지휘 감독해야 할 수령들이 행정실무에 어두웠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부임기간이 짧아서 부임한 고을의 사정을 충분히 파악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231)
한편 향리가 조선 초기에 하급 지배신분층으로 격하되고 있지만, 이들은 조선시대 지방통치에서 중앙관료군의 일원으로 지방의 군·현에 파견된 왕 권 대행자 또는 租稅·力役請負者의 성격을 가진 수령, 그리고 고려 말기 이 래로 중앙의 관료군에서 도태된 前銜品官으로 자기의 본관지에서 세거한 토착사족과 함께 서로 삼각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즉 수령과 토착사족은 같은 사족신분으로서 향리를 감독 제재하였고, 수령과 향리는 지방관아에서의 호령자와 그 막료로서 지휘하고 복종하는 상하의 유대관계를 가지고 토착사족 과 대립하였으며, 토착사족과 향리는 같은 토착세력으로서 왕권 대행자인 수 령에 대항하였던 것이다.
요컨대 조선시대 향리는 당시의 지배기구 안에서 하부구조를 이루고 있으 면서 지방사회의 대표자인 토착사족과 중앙관료군의 일원인 수령 사이에서 교량적 구실을 하는 중간적 존재였다.
그러나 향리가 세습적으로 향역을 짊어진 하급 지배신분층이었지만, 그들의 신분 상승을 의미하는 免役從仕의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여러 가지 제약을 받기는 했지만, 향리가 생원·진사시나 문·무과에 합격할 경우 자신은 물론 자손의 향역까지 완전히 면제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사회신분적 지위를 상급 지배신분층인 사족으로 상승시킬 수 있었으며, 나아가서는 양반관직이 임용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과거보다는 못하지만 향리의 가장 일반적인 免役路는 3丁 1子 면역이었다. 그러나 3정 1자라도 관찰사의 文憑을 받아 잡과에 합격하거나 중앙 각 관서의 이전(서리)으로 복무한 뒤 거관하여야만 하였다. 이 경우에도 자신은 물론 자손에게까지 향역이 완전히 면제되었다. 특히 잡과에 합격했을 경우 기술관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또한 향리는 군공을 세웠을 경우 면역의 특전을 받았다. 향리는 군역을 지지는 않았지만 유사시에 자원 또는 징발에 의하여 출정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때 군공을 세운 驍勇鄕吏에게는 그 등급에 따라 면역의 특혜를 주어 충성의 대가로 삼게 하였다. 이러한 군공면역은 향리에게 가장 간단한 면역방법이었다. 이 경우에도 자신은 물론 자손에게까지 향역이 완전히 면제되었 다. 군공과 아울러 도적을 체포한 향리에게도 그 공의 대소에 따라 면역의 특전을 주었다.
이 밖에 향리들은 일시적인 특전으로 향역을 면제받는 경우도 있었다. 조 선 초기에 새로 개척한 北界에 들어가 살기를 자원하는 향리에게 면역종사의 길을 열어주었으며, 또한 효도의 경우, 各官習射에서 우등한 경우, 그리고 기타의 공이 있는 경우 등에도 免役 또는 復戶의 특전을 받았다. 또 향역을 피한 자 10인 이상을 붙잡아 보고했을 경우에는 자신이 면역을 받았고, 20인 이상일 경우에는 그 아들까지 면역이 되었으며, 9인 이하일 경우에는 1인당 3년씩으로 계산해서 합산된 기간 동안 자신의 항역이 면제되었다.232)
이와 같이 향리가 조선시대에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면역종사할 수 있는 기회는 주어지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시대 향리층이 상급 지배신분층인 사족 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하급 지배신분으로서 피지배신분층과는 구별되는 우월한 존재 였다.
조선시대 향리가 이와 같이 제한적이나마 면역종사할 수도 있는 하급 지배신분층이었지만, 향리라고 해서 다 같은 대우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조선 시대 향리의 내부구조는 크게 戶長層·六房層·色吏層의 셋으로 구분할 수 있다. 호장층은 5품 이하의 初仕郎 품계를 받을 수 있는 지위가 보장된 계 층으로서 지방행정의 고문 역할을 하였고, 6방층은 6방아전들로서 지방관부 의 행정실무자층이었다. 그리고 색리층은 천역에 가까운 향역을 지고 있는 지방행정의 하수인이었다. 이들 색리층은 사회신분적으로 하급 지배신분층에 드는 것이 아니라 樂工·志道·繪史 등의 잡직 기술관과 마찬가지로 양·천 인 신분에 해당되는 자들이었다.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