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토관
234)조선시대에 평안도와 함경도의 특수지역에는 다른 지방의 향리에 비유될 수 있으면서도 그 類를 달리하는 土官이라는 특수한 제도가 있었다.
토관의 제도는 고려 후기 원의 直屬領地가 되었다가 다시 우리의 영토로 편입된 지방을 통치하기 위한 정책으로 平壤과 和寧(和州 ;뒤에 永興으로 개칭)에 토관을 설치한 것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토관의 제도는 조선왕조에도 그 대로 답습되어 건국 초에는 감영이 있는 평양과 영흥에만 설치되어 있었으나, 永興府 토관의 경우, 태종 때 새로 감영이 된 함흥으로 옮겨졌다가 성종 초에 잠시 영흥이 감영이 됨으로써 환원되기도 했으나, 다시 함흥으로 감영이 바뀜으로써 또 옮겨졌다 그리고 세종 10년(1428) 이후부터 대체로 세종 말 까지 평안도의 寧邊犬都護府·義州牧 江界府, 함경도의 慶源·寧北鎭(뒤에 富寧으로 개칭)·會寧·鏡城·鍾城·穩城·慶興都護府에도 토관이 설치되어235) 그 설치지역이 12곳으로 확대되었으며, 이것이 ≪경국대전≫에 명시되어 제도화되었다.
이와 같이 조선왕조에 들어와 토관이 신설된 시기는 대체로 세종대 여진족을 내몰고 4군·6진을 개척한 시기이며, 그 지역 역시 당시 개척하여 확보한 6진을 비롯하여 대부분이 여진족과 접경한 변방이었고 또한 국방의 요충지였다. 그리고 대체로 西班土官이 먼저 설치되고, 東班土官은 나중에 설치되었다. 따라서 토관을 설치한 목적은 궁극적으로는 변민의 수어 내지는 영토의 보전에 있었다. 또한 변방인들이 여진족과 연결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비해서 미리 그것을 막고자 하는 회유정책이기도 하였다.
한편 조선 초기에는 평안도와 함경도 이외의 지방에도 한때 토관이 설치 된 곳이 있었다. 즉 제주도에 토관이 있었으며, 세조 때에는 경주와 전주에 동·서반의 토관을 신설하였다가, 긴요한 곳이 아니라 하여 곧 혁파하였고, 개성부에도 한때 토관이 설치된 적이 있었다.
토관은 本道人, 즉 토착인을 선발 임용하였는데 동반은 관찰사가, 서반은 兵馬節度使가 주관하였다. 대체로 토관에 선발·임용된 본도인은 千戶·百戶·鎭撫·知印·令史 등이었다. 이 중 천호·백호·진무는 군계통으로서 그 지방에서 군사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유력한 자들이었다. 그리고 지인·영사는 향리였는데, 평안·함경 양도의 토관이 설치되어 있는 지방의 경우 향리역은 閑良人에게 정해졌다. 이들 한량도 여말 선초에는 지방에서 사회적으로 유력자였다. 그러므로 조선 초기 토관의 성분은 대체로 함경도와 평안도에서 군사적·사회적으로 유력한 계층들이었다. 이 밖에 때로는 補充軍·防牌·火砲軍과 習射에 우수하게 합격한 자에게 토관직이 주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또 하삼도 양인으로서 북도로 이주를 자원하는 자에게 토관직이 주어지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는 토관직을 매개로 새 영토를 보전하려는 北道徙民 정책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토관에 임용된 자의 대부분은 천호·백호·진무·지인·영사였다. 따라서 조선 초기의 토관은 대체로 평안도와 함경도에서의 군사적·사회적 유력층에 속하는 무인 혹은 이속 등에 대한 賞職으로 주어진 것이었다. 이를 통해 중앙정부는 양도 지방의 유력층을 지배기구 속에 흡수할 수 있었고, 양도 지방의 유력층으로서는 그들의 세력과 지위를 중앙정부로부터 어느 정도 인정받게 되었다.
결국 조선 초기에 평안도·함경도 등에 토관이 널리 설치된 것은 그 궁극 적인 목적이 영토의 보전에 있었던 것이며, 이를 위해 지방사회의 유력층을 통한 지방 지배와 군사적 요층의 방어체제를 토관에 의하여 강화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토관은 특히 조선 초기에 새로 개척한 북변의 통치지배의 강화 및 野人과 접경한 북변의 군사적 방어조직을 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자들이었다.
토관도 조선 전기에 하급 지배신분층으로 격하된 서얼·중앙의 서리·기술관과 마찬가지로 올라갈 수 있는 품계가 한정되어 있었다. 즉 토관은 동·서반 모두 정5품이 한품이었다. 그리고 토관도 관직의 轉任, 품계의 승진, 근무일수의 규정은 京官의 경우와 동일하였으나, 다만 6품 이상의 품계부터 는 경관의 900일보다 배인 1800일을 근무해야만 한 품계가 올라갔다. 또한 토관이 한품에 이르면 지관이 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60세가 되어야만 허 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토관에게는 재직 중 資品에 따라 일정량의 전지가 지급되었다. 이미 고려 말 공양왕 3년(1391)에 토관에게 地祿으로 5품은 10결, 6품은 8결, 7품은 6결, 8품은 4결, 9품은 3결이 지급되었다. 이러한 토관의 지록은 조선왕조에 들어와서도 군전의 명목으로 계속 지급되었다.
토관도 조선 초기에는 경·외관같은 양반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다. 이 경 우 자진의 품계보다 한 품계를 낮추도록 되어 있었으니, 예컨대 토관 5품은 朝官 6품에 준하는 것으로 하였다. 그러나 실제 토관이 경·외관직으로 진출한 예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이 경우에도 대체로 서반의 8·9품직에나 서용되었을 뿐 다른 관직에 서용되기는 힘들었다. 간혹 다른 관직에 서용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 때마다 문제가 야기되었다. 예컨대 세종 때 토관 출신이 수령직 가운데 가장 낮은 縣監에 서용된 적이 있는데, 이 때 사대부관료들은 아전과 같은 일을 한 자를 조관에 서용한 것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반대하는 상소를 계속 올렸던 것이다.
위의 예는 당시 사대부관료들이 토관의 지위가 자신들과는 차원이 다른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뜻하는 것으로서, 조선 초기에 지배신분층을 양 분화하는 과정에서 토관도 점차 하급 지배신분층으로 격하되고 있음을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이에 따라 토관이 상급 지배신분층인 사족의 소업인 경·외관직으로 진출하는 것이 갈수록 어려워지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토관을 경·외 관직으로 진출할 수 있게 하는 제도는 유명무실한 상태로 존속하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인 선조 어느 시기에 폐기되고 말았다.
이와 같이 토관이 조선 초기에 하급 지배신분층으로 편입되어 신분상 양반관료와 현격한 차이가 있었지만, 토관이 설치된 지역이 평안·함경도의 먼 곳으로서 중앙의 통치력이 두루 미치지 못하는 데다 사족신분층도 희소하였 기 때문에 토착인이 토관직을 차지한다는 것은 세력 기반을 마련하는 방편 이 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토관 중에는 일부가 세력 기반을 구축하여 변방의 백성들을 괴롭히는 일이 있었고, 심지어는 하급수령을 안하무인격으로 대하 는 자도 있어 사단을 야기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반적인 면에서 볼 때 토관의 설치는 변방의 백성을 위무하는데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어 邊界徙民 에 따른 불안을 줄일 수 있었으며, 특히 서반토관은 북변 수어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