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군교
조선시대의 軍校는≪故事通≫에 의하면, 후기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중앙에서는 궁중의 사역에 임하는 掖庭署 소속의 掖隷와 각 군영 의「營門所屬」이 여기에 들며, 지방에서는 장교라고 하는 직역이 여기에 포함된다.236) 이 중 액정서의 액례는 司謁·司鑰 등으로서 잡직이었다.237) 그러나 그 수가 적어서 군교 전체에서 차지하는 수적 비중은 미미하였다. 다음 으로 조선 후기의 중앙 각 군영의 영문소속은 5군영의 將官(종9품 哨官 이상의 직) 밑에 있던 품외의 하급사관인 軍官·敎鍊官·旗牌官 등을 일컫는 것으로써, 이들은 흔히 장교라고 불리웠다.238) 그리고 지방의 장교는 병영 등에 소속된 屬僚 또는 하급사관으로서 군관이라고도 불리웠다. 따라서 조선 후기에 군교의 절대 다수를 점하는 것은 중앙과 지방에 폭 넓게 존재하고 있던 군관으로 대표되는 장교층이었다.
그런데 5군영이 설치되기 전인 조신 전기에는 중앙군인 5위에 하급사관 으로 군관같은 장교층이 있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5위에서의 군관의 존재는 확인할 수가 없다. 그러나 지방 각지의 병영 등에는 군관 즉 장교가 소속되어 있었다. 따라서 조선 전기에 군관 즉 장교라 하면 지방의 병영 등에 소속된 군관이요 장교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조선 전기에 지방의 군관 즉 장교는 대체로 두 종류로 구분되는데, 하나 는 향리층과 밀착되어 있는 직역으로서의 장교층이고,239) 다른 하나는 병사·수사 이하 鎭將의 천거를 받아 率行하는 군관으로서 口傳軍官 또는 率行軍官이라 불리는 자들이다.240)
향리층과 밀착되어 있는 조선시대 직역으로서의 장교는 대체로 군사와 경찰에 관한 실무를 담당하고 있던 무관적인 속료로서 고려시대 都軍의 계통 을 이은 것이다. 고려시대 도군에는 都領·別正·校尉가 있는데, 이들은 州縣軍 통솔자인 장교층을 뜻하는 것이다.241) 그런데 고려시대에는 호족적 전통을 가진 지방유력자인 향리세력을 지방 군사조직의 장교로서 그 직무를 겸하게 함으로써 여진인 추장에게 주는 칭호인 도령을 제외한 별정은 호장층이 담당하고 교위는 記官層이 담당하였다. 따라서 고려시대의 장교층은 하나의 독립된 계층이라기보다는 향리인 호장층과 기관층이 담당할 수 있는 주현군 관직이었다.242)
이와 같이 고려시대 향리에게 주현군 지휘자로서의 조건이 주어짐으로써 그들은 군직을 통하여 중앙관직으로 나아가거나 군공을 통하여 출사할 수 있었다. 즉 고려시대 향리들이 서리직을 통하여 문반으로 진출할 수 있었던 것처럼 장교가 됨으로써 무반으로 진출하여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었던 것 이다.243)
그러나 조선 초기에 지배신분층의 양분화 과정에서 향리가 사대부관료에 의한 억압정책에 따라 하급 지배신분층으로 고정되어 그들의 면역 종사로가 대폭 제한되는 상황 하에서 향리층과 밀착되어 있는 직역으로서의 장교직도 고려시대와 같은 무반 진출로로서의 기능을 발휘하기는 어려워졌다. 결국 조선시대 장교는 향리와의 밀착적인 관계 때문에 흔히 吏校로 연칭되어 지방 사회의 중간신분층으로 존재하였다. 그러나 마치 중앙관계에서 관념적으로 무신이 문신보다 격이 낮았던 것처럼 지방에서도 校는 吏보다 격이 낮은 것으로 여겨졌다. 그 결과 17세기 초엽에 이르러 장교의 지위는 羅將과 같이 천하게 보일 정도244)로 그 격이 낮아지게 되었다.
다음 솔행군관은 장수를 보좌하고 방비를 돕는 임무를 담당하고 있던245) 하급사관이었다. 이러한 솔행군관은 주진 이하 여러 진의 진장이 각기 천거하여 거느리는 것인데, 아무나 천거하면 임명되는 것이 아니라 ≪경국대전≫규정에 의해 무과출신자와 하번의 별시위·갑사로 자격이 제한되고 있다. 그런데 진장들은 아들·조카 등의 친족이나 친근한 사람들을 천거하여 데려가는 경향이 많았다.246) 이처럼 조선 초기에는 무과출신자나 양반관료인 진장의 아들·조카 등과 같이 상급 지배신분층에 해당되는 자들도 솔행군관이 되고 있다. 따라서 솔행군관이 되는 자의 신분만 가지고 본다면 조선 초기의 경우 그 신분적 위치가 일률적으로 하급 지배신분층에 해당되는 중간적인 것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16세기 전반인 중종 35년(1540) 경에 이르면 시정의 무뢰한이나 서얼과 같은 잡류들이 청탁에 의해 솔행군관으로 되는 경우가 많았다.247) 이러한 현상은 군관의 신분적 지위를 저하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여 10여 년 뒤인 명종 때에는 솔행군관을 閑雜人들로 보충하도록 하고 있다.248) 이처럼 16세기 전반 경에 서얼같은 잡류 또는 한잡인이 솔행군관에 주로 봉직하게 됨으로써 그들의 사회신분적 지위도 하급 지배신분층인 중간신분층으로 고정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이들에게 신분 상승의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군관 들은 응시자격의 제한이 문과보다는 덜 까다로운 무과에 응시하여 무관이 될 수 있었다.249) 그리고 특례에 해당되지만 때로는 군공을 세움으로써 동반직에 陞叙되는 경우도 있었다.250)
한편 16세기에 收取體制의 문란에 따른 가렴주구로 다수의 농민이 유망하기 시작하여 명종 때 각지에서 도적화되자 군관들은 이를 討捕하는 捕校로 서의 임무까지 정하는 경우가 많았다.251)
<申解淳>
236) | 崔南善,≪故事通≫제79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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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7) | ≪經國大典≫권 1, 吏典 雜職. |
238) | 李相佰, 앞의 책, 312∼313쪽. |
239) | ≪經國大典≫권 3, 禮典 京外官迎送條의 鄕吏에 대한 세부설명에 戶長·記官·將校를 함께 포함시키고 있어 장교가 넓게는 향리의 범주에 속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
240) | 吳宗祿, <朝鮮初期 兵馬節度使制의 成立과 運用 (上)>(≪震檀學報≫59, 1985), 111∼114 쪽. |
241) | ≪世宗實錄≫권 81, 세종 20년 4월 갑인. |
242) | 李成茂, 앞의 글(1970), 90쪽. 羅恪淳, 앞의 책, 30쪽. |
243) | 羅恪淳, <高麗 鄕吏의 身分變化>(≪國史館論叢≫13, 1990), 150쪽. |
244) | 李晬光,≪芝峰類說≫권 3, 制度. |
245) | ≪明宗實錄≫권 15, 명종 8년 9월 계해. |
246) | 吳宗祿, 위의 글, 111∼112쪽. |
247) | ≪中宗實錄≫권 94, 중종 35년 12월 갑술 |
248) | ≪明宗實錄≫권 18, 명종 10년 5월 임자. |
249) | ≪明宗實錄≫권 23, 명종 12년 10월 갑진·권 30, 명종 19년 6월 신묘. |
250) | ≪明宗實錄≫권 20, 명종 11년 6월 임인·권 26, 명종 15년 11월 병술. |
251) | ≪明宗實錄≫권 5, 명종 2년 4월 기유·권 26, 명종 15년 12월 기미·권 27, 명종 16년 10월 임술·기유, 그리고 권 28, 명종 17년 정월 병술·계사 및 권 29, 명종 18년 7월 갑진 등 다수의 기록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