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의무
양인 농민은 소수의 지주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자영농이나 소작농이었다. 이들은 주로 자신과 가족의 노동력으로 농사를 지으며 때로는 노비나 고공으로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기도 하였다. 양천제의 강화는 바로 이러한 소 농민을 군주가 개별 인신적으로 지배하려는 데서 나온 것이라 말할 수 있 다. 조선 초기 정부가 부세의 합리화를 통하여 국가의 재정기반을 확충하면 서도 소농민의 부담이 경감될 수 있도록 노력한 것도 그러한 정책의 일환이었다. 貢法이라는 새로운 조세 수취방식의 수립이나 요역이나 공납까지도 조 세처럼 토지를 기준으로 과세하도록 개편하여 토지를 많이 소유할수록 더 많은 부담을 지도록 한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수취체제의 개편은 실 제의 운영과정에서 많은 문제를 드러냄으로써 기대한 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신역의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조선 초기에는 皆役制의 원칙을 강하게 천명하였으며 실제로도 조선 초기 는 그 어느 시기보다 양인에 대한 신역부과가 강력히 추진되던 시기였다. 그러나 당시의 신역체제는 신역부과 대상자를 모두 동원하는 체제가 아니었다. 이것은 단순히 정부가 모든 인정 수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웠던 데서 연유한 것만은 아니다. 정부 스스로가「盡括」즉 신역부과 대상자를 모두 차출할 때 야기되는 인민의 도산이나 저항 등을 우려하여 대상자의 일부만을 동원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었던 것이다.287) 그리고 무엇보다 양인의 보통역이라 할 군역에서부터 정액제를 실시하고 있었다.288)
조선 초기에는 정부가 필요로 하는 항구적인 노역이나 물자의 수요를 충당하기 위하여 군역 이외에도 잡다한 신역(이하 雜色役)이 설치되어 있었다. 군역은 양인 고유의 역이며 공민으로서의 제1의적 의무인만큼 군역과 잡색 역은 보통역과 특별역의 관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모든 신역부 과 대상자에 대하여 특별역인 잡색역을 부과할 자를 먼저 차출하고 나머지 인원에 대하여 군역을 부과하는 것이 타당한 순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실 제로는 신역부과가 그렇게 이루어지고 있지 않았다. 각 군현에서는 세습적 으로 특정한 신역을 부담하도록 지정된 자를 제외한 일반 신역부담자 가운데서 일차적으로 중앙에서 할당한 군액부터 확보하였던 것이다. 각 군현은 인정이 부족하다 하여 군액을 줄일 권한도 없었지만 군액을 늘일 재량권도 갖고 있지 못하였다.
각 군현에서 군역자원을 차출하는 과정에서는 중앙의 지침과는 달리 우선적으로 힘없고 가난한 농민을 뽑아 그 액수를 채우기 마련이었다. 또 중앙에서는 각 군현의 번성한 정도에 따라 군액을 책정한다 하지만 애당초 군현의 실정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우므로 군액 할당의 형평성을 보장할 수 없었다. 그리고 군액이 한 번 책정되면 여간해서는 변경되지 않는 것이어서 인구 변화에 따라 불균형은 심화되기 마련이었다. 군적의 작성은 6년마다 이루어지지만 기존 액수의 결원을 보충하는 선에서 그치는 것이 보통이었다.
군역으로 차출되지 않는 농민은 잡색역에 동원되거나 일단 閑丁으로 남아 있었다. 잡색역에 동원된 농민에게는 정부가 지정한 일정량의 물자를 현물로 납부하는 물납역이 부과되는 경우도 있었으나 관아의 사령 역할이나 공공건물을 간수하는 등의 勞役이 부과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대체로 잡색역의 경우도 군역처럼 중앙에서 지정된 액수만큼의 인원을 임의로 차출하게 되어 있지만 임의로 차출하게 되어 있는 역이 후일 세습역으로 바뀐 경우도 있었다.
태종·세종대를 기점으로 하여 정부는 국가가 필요로 하는 물자를 각 군현과 일반 민호에 분정하거나 요역으로 동원한 노동부대로 하여금 생산케 하여 조달하고 물납역은 되도록 축소시켜 나갔다. 반면, 노역의 경우에는 부담자가 크게 증가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 가장 큰 원인은 각 군현에서 임의로 日守·書員·羅將·差備軍과 같은 새로운 명목의 외아전을 잇따라 설치한 데에 있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신역 자원의 잠식을 가능케 하는 근본적인 요인은 바로 양인의 보통역인 군역에서부터 정액제가 실시된 데에 있었다. 군역에 대한 정액제 실시 목적의 하나는 신역자원의 보호에 있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閑丁이 관리의 침탈 대상이 됨으로써 당초의 의도와는 전혀 배치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정부는 외아전의 설치를 추인하고 군액의 감소를 막기 위해 정원을 책정, 더 이상의 濫占을 방지하는 데 급급한 실정이었다.289) 이러한 과정에서 助丁을 제외한 정원만하여도 수만에 달하는 외아전 이 설정되었고 한정의 남점행위는 이후에도 여전히 자행되고 있었다.
당시의 입역 연령은 16세부터 60세까지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16세에 입역을 시작하여 60세에 마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정액제를 원칙으로 하는 신역체제에서는 새로운 역이 신설되든가 기존 인원에 결원이 발생할 경우에 한하여 신역을 부과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는 어디까지나 신역을 부과할 수 있는 연령 범위를 나타내는 데 불과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16세는 입역을 시작하는 연령이 아니라 신역을 부과할 수 있는 최저 연령선이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개개인의 실제 입역기간은 상당한 차이를 갖게 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입역기간이 무척 길었음에 틀림없다. 이와 같은 장기간의 신역으로 인한 소농민의 파산을 막기 위한 대책이 바로 奉足制와 分番制였다. 분번제란 실제로 입역해야 하는 正軍들끼리 일정한 기간을 번갈아 복무하게 하는 제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에도 불구하고 농민에게 신역은 대단히 큰 부담이었다. 그것은 무엇보다 실제의 입역 부담이 주로 농민에게 떨어지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