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사환권
조선 초기에는 신분적 흠이 없는 평민의 경우 관직의 계통이나 입사 경로 를 선택하는 데 아무런 제한이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평민의 사환권은 사회 적으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경국대전≫과 같은 당시의 법전 에 천인에 대한 사환권 박탈에 관한 규정이 없었던 것은 굳이 명시할 필요조차 없는 당연한 사항이었기 때문인 것과 마찬가지로 신분상 흠이 없는 평민에 대하여 사환권 부여에 관한 언급이 없었던 것도 그것이 명시할 필요없는 공지의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평민은 자신이 지닌 사환권을 뚜렷이 의식하고 있었다. 태종 14년(1414) 한강 연안에 거주하던 水站干이 정부에 호소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무개들은 본래의 계통이 양인으로서 물가에 산다 하여 水站干에 속하여 배를 끌어 조운하고 있습니다만, 후세에 양·천을 가릴 수 없는 자 및 婢妾産으로서 사재감 수군에 속한 자와 섞여서 자손의 벼슬길에 지장이 있을까 참으로 두렵습니다. 원컨대 사재감에 속한 수군으로 수참역을 대신하게 하고 아무개들은 양역으로 옮겨 주십시요’하니, 이에 (왕은) 마땅히 사재감 수군과 구별하여 水夫라 부르도록 명하였다(≪太宗實錄≫권 28, 태종 14년 11월 병진).
여기서 이들이「양역」으로 이속시킬 것을 요청한 이유가 주목을 끈다. 후 일 자신들의 자손이 仕路에 지장을 받게 될까 우려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 다. 수참간이 되어 양천을 가릴 수 없는 자나 비첩 소생과 함께 배를 끌어 조운해야 했던 자들이 가문의 지위가 높은 양인일 리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도 이들은 자손의 사로에 지장이 있을까 우려된다는 점을 내세워 양역으로 의 이속을 당당히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또 이들이 자손의 사로만을 문제 삼은 것을 보면 당사자들은 현재 사환상의 제한을 받고 있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비록 이들의 요구사항이 그대로 관철되지는 못하였으나 일단 이들의 주장이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져서 그들의 자손의 사로에 지장을 초래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호칭을 구분해 준 것도 음미할 만하다. 세조대의 충청 도 공주 廣程驛의 助役人인 自順 등의 상언도 이와 맥을 같이 한다.
‘광정 驛子들이 조역인을 얻고자 꾀하여 남녀 45명을 산속에 은닉하고 상소하여 사람들이 유망하였다 하자 (정부는) 근처의 평민 30인을 뽑아 조역이라 이름하여 정하였습니다. 그 후 역자들이 모두 돌아왔습니다. 臣들은 본래 평민으로서 영구히 역졸에 속하여 벼슬길이 통하지 못할까 각자 원망과 번민을 품고 있습니다’라고 상언하였다. 왕은 이를 병조로 하여금 의론하게 하였다. 병조가‘유리한 역자가 이미 안집하였으니 말을 마련하기를 자원하는 자를 제외하고는 본역으로 돌려보내십시오’하고 계하니, 이에 따랐다(≪世祖實錄≫권 38, 세조 12년 2월 병신).
여기에서도 대표적인 천역의 하나인 驛役에 조역인으로 동원된‘평민’이 장차 영구히 역졸에 속하여 벼슬길이 통하지 못하는 결과가 야기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그리하여 정부는 자원자 이외에는 본역으로 환속시키는 조치를 취하게 되었다. 수참간이나 조역인의 요구의 진의가 설사 수월한 역으로 옮기고자 하는 데 있었다 하더라도 사환권을 그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정부가 그러한 주장을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것은 평민이나 정부 모두가 양인으로서의 권리를 충분히 자각하고 있었다는 명 백한 증거가 된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당시의 세습적인 천역부담자들은 사환상의 제약 을 감수하여야 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역에 일반 양인을 부득이 차출해야 할 경우에는 그들의 반발을 무마시키는 방법으로 수참간이나 조역인의 예처럼 정부는 본래의 부담자와 임의로 차출된 자를 구분하여 호칭과 기록문서를 달리하는 조치를 취하였던 것이다. 세습적 천역자인 驛吏·牧子와 평민으로 부터 차출된 자를 구별하여 각기 助役百姓과 牧馬軍으로 한 경우가 좋은 예 다. 그리고「永定館軍」의 경우처럼 새로이 천역에 동원된 자들의 역을 영구 히 옮겨주지 않으려 한 경우에도 부거권만은 보장하고 있었다.290)
당시에 평민의 사환권이 당연한 것으로 인정되고 평민이 자신의 권리를 자각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많은 평민들이 관인으로 진출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사회적 위신이 가장 높고 출세도 빠른 문반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문과에 합격하여야 한다. 그러나 평민들로서는 우선 가정 형편상 문과에 합격하기 위해 장기간 수학에만 전념하기가 쉽지 않다. 어느 정도 경제적 여유가 있다고 하여도 좋은 지도를 해줄 스승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서울이나 지방에는 국가 재정으로 교육시키는 국립학교로서 중앙의 사학 과 지방의 향교가 있었다. 현재까지는 향교의 입학 절차에 대해 별로 알려 져 있지 않으나 지원자가 많을 경우 간단한 선발시험을 거쳤을 가능성이 있 고 중등교육 과정에 해당하는 향교에 진출한 자들은 최소한의 한문 소양을 갖춘 자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향교에 평민들의 자제도 다닌 것을 보면 어 느 정도 여유있는 평민들의 자제들은 초급과정 정도의 학업은 이수하고 있 었으리라 추측된다. 그러나 당시의 관학은 그다지 좋은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평민이 향교에 진학한 것이 반드시 수학을 위해서만은 아니 었다. 교생이 되면 면역의 혜택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평민의 자제로서는 어려운 문과의 응시보다는 무반이나 기술학 계통으로 진출하거나 書吏와 같 은 관속으로 진출하는 편이 수월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평민 중에도 과거에 응시하는 자가 있었고 이러한 일이 설사 흔한 일은 아니었다 하여도 사회에서는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세종 32년(1450)의 수군 金義精의 사례는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잘 반영하 고 있다. 김의정의 집안 배경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寒門」이라 표기되고 있다는 점이나 文科榜目에 조상의 관력이 전혀 보이지 않는 점, 그리고 무 엇보다 일반 평민조차 입속되기를 꺼린 수군의 역을 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평민으로 보아 큰 잘못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式年文科 會試에서 장원을 한 김의정이 왕이 시험관이 되는 殿試에서 權近의 손자인 權擥에게 장원을 빼앗기자 세종이 가문을 고려하여 순위를 바꾸었다고 물의가 일어났다. 여기 에서 유의할 점은 당시의 사대부들이 평민을 밀어내고 명문가의 자제를 앞세운 세종의 처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부당하게 여기고 있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과거에 가문의 지위를 고려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당시의 여론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史官은 “사람들이 모두 이를 비난하여 말하기를‘(김)의정의 계통이 한문에서 나왔고 또 명망도 없어 비록 策文을 잘 만들었다 하더라도 수위에 있기가 마땅치 않았을 것이다’라 하였다”라고 특기하면서도, “(권)람의 일은 비록 상이 지극히 공정히 한 데서 나온 것이라 하여도 당시의 의론은 후일의 폐단을 두려워하였다”라 하여 뒷날 이것이 빌미가 되어 가문을 고려하여 순위를 뒤바꾸는 일이 나타나게 될까 우려하는 여론이 일어났음을 전하였다.291) 결국 당시의 사회분위기는 평민의 사환권이나 과거 응시자격을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음을 입증하 는 것이다. 동시에 평민들도 그와 같은 자신의 권리를 자각하고 있었음은 물론 이를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이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태종대의 金寬의 경우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생원 시험관 卞季良 등이 尹粹 등 100인을 뽑았다. 초시를 보는 날 시험장을 열자 金寬이라는 자가 왕의 수레 앞에 엎드려 말하기를‘臣은 宣州 사람입니다. 오늘 三館이 臣의 조상의 계통이 비미하다고 하여 쫓겨 났습니다’하였다. 上이 이를 가엾이 여겨 즉시 성균관 掌務를 불러 말하기를‘이 사람의 조상의 계통이 양천을 가릴 수 없는 자이니 시험보게 하여도 되겠다’고 하였다. 寬은 시험볼 수 있었으나 마침내 합격하지 못했다(≪太宗實錄≫권 15, 태종 8년 2월 정해).
당시에는 양천을 가릴 수 없는 자의 자손은 사환권 자체가 인정되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3館이 김관을 쫓아낸 것은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 그런데도 태종이 응시를 허락한 것은 분명히 하나의 정치적인 선심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처럼 신분적 흠을 가진 한미한 집안의 사람조차 과거 의 응시를 시도하였을 뿐 아니라 시험장에서 축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처벌 의 위험을 무릅쓰고 왕의 수레 앞에 나아가 응시 불허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천인이 아니면 마땅히 과거를 볼 자격이 있다는 것 을 확신한 데서 나온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조선 초기의 평민은 권리없이 무거운 의무만 부담하는 그러한 존재는 아니었다. 적어도 법제적인 측면에서는 양인이 지는 의무는 사환권의 대칭물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 세종 당시에 백정을 평민과 동화시키는 방안의 하나로 한편으로는 군역을 부과하고 한편으로는 사환권을 인정한 것도292) 권리는 의무를 매개로, 의무는 권리를 매개로 부여되는 것임을 입증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