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신량역천과 칭간칭척자
가. 칭간칭척자와 그 권리·의무
여말 선초에는「干」이나「尺」이라는 칭호를 붙여 이름지어진 자들이 상당 히 많았다. 이들은 곧잘 稱干稱尺者 또는 干尺之徒로 범칭되고 “나라의 풍속이 身良役賤을 혹은 干이라 칭하고 혹은 尺이라 칭한다”라는 사관의 해설 과 같이293) 한때 신량역천의 표본처럼 간주되고 있었다.
본래 칭간자와 칭척자는 그 기원을 달리하여 칭척자는 칭간자보다 더 오 랜 내력을 가지고 있었다. 가장 그 기원이 뚜렷하고도 오랜 칭척자로서는 津尺을 들 수 있다. 수상교통의 중심이 되는 나루에서 관선을 부리는 역을 세습하던 진척은 驛子와 함께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고려에 저항하였 던 후백제 출신자들로서 진·역에 충속되었던 자들이었다. 사료상 고려 전기 의 칭척자의 구체적인 명칭으로는 진척밖에 확인할 수 없지만 역자도 진척 과 함께 雜尺으로 범칭되고 있었고 향·소·부곡민도 잡척으로 취급되고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진척 이외에도 칭척자들이 상당수 존재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고려 후기에 들어오면서 향·소·부곡의 해체와 함께 잡척이 지닌 신분적 특징도 많이 흐려지게 되었지만 진척과 역자는 그대로 존속하였으며 자료에서는 이 밖에도 몇 종류의 칭척자를 더 찾아볼 수 있다. 달탄계통의 이민족으로서 鍮器匠·倡優·사냥 등을 생업으로 하던 楊水尺·水尺·禾尺과 墨 尺·刀尺·琴尺 등이 그것이다. 일종의 창고지기로 생각되는 稤尺과 內需司 에 소속되어 생선의 납공을 담당한 海尺도 그 시원은 여말로 소급될 수 있 는 것으로 보인다.294)
한편 칭간자의 경우에는 왕실이나 사원과 같은 권력기관에 집단적으로 소속되어 토지 경작의 의무를 진 處干·直干이 가장 먼저 나타난다. 여말의 권 세가들이 佃戶를 처간이라 부르면서 3稅를 포탈하였던 사실은 잘 알려져 있 다. 조선 태종 때까지 陰竹縣 國農所에서 둔전을 경작하던 간이라 불리운 농부도 고려시대부터 존재해 온 자였다. 그러나 전호의 모습을 띠고 나타난 칭간자들은 태종 5년(1405) 음죽현의 국농소가 혁파된 것을 끝으로 자취를 감 추었다. 이외에 고려시대로 기원이 소급되는 칭간자로서는 鹽干이 있다. 염 간이 간이라 불리게 된 것은 조선에 들어와서의 일이었지만 고려의 충선왕 이 소금에 대한 전매권을 확립하면서 징발한 鹽戶의 후신이었다.
이처럼 고려시대부터 세습적으로 특수한 신역을 부담해 온 칭간칭척자는 대부분 조선에 들어와서도 사환권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의 위정자 들은 진척·역자·부곡인과 같은 고려의 잡척층이 노비의 경우처럼 범죄로 말미암아 천역에 충당된 자임을 명확히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295) 염간은 범죄와 전혀 무관한 자였으나 고려 이래의 세습적 천역자라는 점 때문에 염간 역시 사환권이 인정되지 못하고 있었다. 의무군에 대한 수직이 처음 실시될 때 騎船格軍에게 관직을 주면서「鹽干賤者」는 그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었던 것이 그것이다.296) 이처럼 고려 이래의 세습적 천역자는 사환상의 차대를 받는 자였기 때문에 전술한 바와 같이 인원 부족으로 이러한 역에 동원되는 평민과는 호칭이나 문적을 달리 하였던 것이다.
조선 초기의 신역체제는 평민의 경우 군역이든 잡색역이든 모두 정액제를 바탕으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칭간칭척자에 대해서는 그 밖의 잡색역 부담 자와 달리 정액제가 시행될 수 없었다. 또한 이들에게는 봉족제나 분번제도 시행되기 어려웠다. 원칙적으로 그들의 자손은 외손을 제외하고는 모두 역 을 세습하여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모든 자손이 신역에 동원되는 것은 아니었다.
우선 물납역의 경우에는 그 의무가 이행되는 한, 정부는 그들의 일에 전 혀 간여하지 않았다고 보인다. 염간의 경우 자신의 소금가마를 가지고 소금 을 생산하여 지정된 물량만 소속 염창에 납부하면 나머지의 소금은 마음대 로 처분할 수 있었다. 정부는 사실상 그들의 영업에 대하여 과세하고 있었 던 데에 불과하였다. 세종대에 일시 소금세 수입을 대폭 확장하려는 義鹽法 을 추진하는 과정에서「원래 지정된 鹽漢(염간)의 挾丁」,「은폐하여 누락된 鹽戶의 자식」을 추쇄하자는 의견이 제출되었으나 은닉된 염호를 찾아내지 않는 것으로 낙착되었으며 그나마 의염법 자체가 실행에 옮겨지지 못하였다.297) 이를 보면 염간의 자손을 모두 염간으로 입역시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염간의 원액을 유지하는 선에서 그치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다시 말하면 내용적으로는 정액제에 준하여 운영되고 있었던 것이다. 신역을 세습하게 하는 원칙은 결과적으로 염세 납부 의무자로 지정되지 않은 자손으로 하여금 다른 신역에도 차출되지 않고 무역자로 남게 하는 기회를 제공한 셈이다.
노역의 경우에도 모든 칭간칭척자의 자손이 빠짐없이 입역하고 있었다고 는 보기 어렵다. 구체적인 입역 실태를 알 수는 없으나 척으로 불리우지 않았을 뿐 내력이나 성격이 진척과 똑같은 驛吏(驛子)를 통하여 진척의 입역 상황을 추정하여 볼 수 있다. 조선 초기에는 전국 각지의 역을 수 개∼20개로 묶어 驛道를 편성하고 역도마다 驛丞이나 察訪과 같은 외관을 두어 소속 역을 관할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외관은 역을 왕래하면서 감독만 할 뿐 개개 의 역에서 실제의 운영은 대대로 역에 거주하면서 신역을 세습하여 일에 익숙한 역리가 담당하였다. 역에 배정된 역노비나 조역인도 역리가 지휘하였 다. 따라서 역의 기능이 제대로 발휘되기만 하면 정부는 역리의 자손의 입 역 문제는 간여하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역의 업무가 과중하고 역에서의 역리의 역할이 워낙 컸기 때문에 역리가 부족한 역에는 조역인을 배정하는 외에 다른 곳의 역리로 하여금 이주하게 하거나 돌아가며 입역하게 하기도 하였다.298) 진척의 경우에도 사정은 비슷하였으리라 보인다. 당시의 주요 津渡에는 왕래자의 검색을 위하여 관선을 배치하고 이를 이용하여 강을 건너게 하되 도선료는 받지 않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진척이 여행자로부터 운임을 받기도 하고 관선보다 경쾌한 私船을 부리며 비싼 운임을 받아 물의를 빚기도 하였다.299) 관선을 부리는 데에 특별히 일손이 부 족하지 않는 한 진척의 자손 모두가 입역할 필요는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관할관인 渡丞은 서울이 가까운 경기도의 중요 진도 7곳에만 두어졌으므로 그 이외의 진도의 경우는 역의 경우보다 더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93) | ≪世宗實錄≫권 4, 세종 원년 5월 경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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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4) | 劉承源,≪朝鮮初期의「身良役賤」階層-稱干稱尺者를 중심으로->(≪韓國史論≫1, 서울대 國史學科, 1973) |
295) | ≪太祖實錄≫권 1, 태조 원년 8월 기사. |
296) | ≪定宗實錄≫권 1, 정종 원년 정월 경인. 다만 조선이 건국될 무렵 새로이 干이라 불리게 된 자에게는 仕宦權을 제한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공양왕 2년에 처음 설치된 水站에 차출된 水站干이 당시에 사환권의 제한을 받지 않고 있었던 자임은 앞에서 본 대로이다. |
297) | 劉承源, <朝鮮初期의 鹽干>(≪韓國學報≫17, 1979). |
298) | 劉承源, <朝鮮初期의 驛吏의 身分的 地位>(≪論文集≫10, 聖心女大, 1979). |
299) | ≪世宗實錄≫권 83, 세종 20년 11월 계묘·권 102, 세종 25년 10월 임진. ≪成宗實錄≫권 40, 성종 5년 3월 임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