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일부다처제도
고려시대의 혼인형태는 일부다처제도였다. 조선사회에서는 중국 禮敎의 영향에 의해 다처제의 금지가 법제화되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조선 초에도 고려시대와 같은 다처제의 유습이 존재하다가 중종조 이후 후기로 내려가면서 일부일처제도와 처첩제도가 확립되었다. 따라서 조선 초기는 일부 일처제를 지향하고자 하는 법제의 확립 시도와 일부다처제가 적지 않게 행해지고 있는 실제의 다처관행이 서로 상충되는 시기로서 이에 따른 쟁송과 논란이 적지 않게 나타났다. 이에 관한≪조선왕조실록≫의 사료 가운데 대표직인 것은 다음과 같다.
① 태종 10년(1410)에 品官 康順이 4처 1첩을 두고 그 중 3처를 연달아 버렸는데 이에 대하여 憲司는 엄히 그 죄를 규탄하고 또한 형조에서는 처가 있는데도 또 처를 얻은 사실을 탄핵하여 職牒을 거두고 律에 의해 그 죄를 논죄하도록 주청하였다(≪太宗實錄≫권 11, 태종 10년 정월 기묘).
② 태종 13년(1413)에 사헌부가 時弊를 논하여 前朝末에 예교가 化行하지 못하여 부부의 의가 문란하여 경·사대부간에는 有妻娶妻한 자, 첩을 처로 삼은 자가 많아 마침내 처첩이 서로 소송을 제기하는 폐단을 이루었으니 지금부터 이들을 律에 의하여 처단하고 嫡庶를 정함에 먼저 취한 처를 嫡으로 할 것을 건의하였다(≪太宗實錄≫권 25, 태종 13년 3월 기축).
위의 사료들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 초기에는 사대부들 사이에도 처가 있으면서도 다시 처를 취하는 자나 첩으로써 처를 삼는 자가 많이 있었다. 또 한 다처를 취하거나 처들 중 먼저 취한 자를 정실로 하고 나머지를 첩으로 하여야 한다는 논의 자체는 바로 당시 다처혼의 유습이 상당한 정도로 만연되어 있음을 알게 해주는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