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사찰재산과 승려의 경제활동
본래 印度의 승려들은 다른 종교의 출가 수행자들과 마찬가지로 숲 속이나 나무 밑을 수행의 근거지로 삼았으며, 때가 되면 하루에 한번씩 밥그릇을 들고 마을로 들어가 음식을 얻어와서 식사를 하였고, 헌 천이나 걸레 조각을 줏어다 깨끗이 씻어 말려서 스스로 꿰매어 옷을 만들어 입었다. 그렇게 의식주를 해결하였기 때문에 재산이 필요 없기도 하였지만 일체 소유욕을 마음에 두어서도 안 되었다.
오래지 않아 일정한 주거지인 園과 寺院이 생기면서 조금씩 달라졌으나 무소유의 정신만은 변하지 않았는데, 여러 지방으로 불교가 전파되고 시대가 바뀌는 동안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우리 나라의 경우는 삼국시대부터 국가에서 절을 세웠고, 또 귀족 부호가들이 절을 짓고 전답을 희사하였기 때문에 사원들은 경제적으로 매우 윤택하였다. 신라에서는 큰 절마다 寺成典이라는 국가적인 기구가 있어서 그 사원을 관리하였는데, 법당에 안치된 존상과 건물 등의 개수와 사찰운영의 경제적인 업무를 주로 담당하였다.
고려시대에도 국가적인 사원이 많이 세워지고, 왕족이나 고관들은 願刹을 다투어 건립하였고 또 노비나 전답을 많이 희사하였다. 따라서 절들은 매우 많은 재산을 소유하였으며 승려들은 상당한 부를 누리게 되었다. 그처럼 경제적인 여유가 지나쳤기 때문에 오히려 僧風이 문란하고 교단이 사회교화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였다. 조선의 개국과 동시에 儒士와 朝臣들이 승풍을 바로 잡는다는 구실로 寺社정비와 교단개혁을 주장하였던 것도 실은 사원 경제력을 제거하는데 일차적 목적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