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조선 시대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Ⅰ. 과학1. 전통적 자연관2) 풍수지리로 본 자연관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1. 전통적 자연관
          • 1) 재이현상으로 본 전통적 자연관
            • (1) 가뭄으로 본 재이
            • (2) 그 밖의 재이 몇 가지
          • 2) 풍수지리로 본 자연관
            • (1) 한양 천도의 논리
            • (2) 태종의 음양지리
            • (3) 세종대의 논의
            • (4) 이지함과 남사고의 유산
          • 3) 유학사상을 통해 본 자연관-유교정치와 자연
            • (1) 일식과 태양 관련의 자연현상
            • (2) 연산군의 정치 천문학
            • (3) 중종대 암탉의 수탉 되기
        • 2. 천문 기상학
          • 1) 서운관·관상감의 설치와 그 기능
            • (1) 관장업무와 직제
            • (2) 관아와 관측규정
          • 2)<천상열차분야지도>
            • (1) 그 성립과 구성
            • (2) 관측연대와 조선 천문도
          • 3) 천문대와 관측기기
            • (1) 간의대의 설치
            • (2) 간의대의 관측기기
          • 4) 해시계와 물시계의 제작
            • (1) 세종대의 해시계
            • (2) 자격루와 옥루
          • 5) 천문학 서적의 간행
            • (1)≪칠정산내외편≫과 역학서의 편찬
            • (2)≪제가역상집≫과≪천문유초≫
          • 6) 측우기의 발명과 농업기상학의 발달
            • (1) 측우기와 수표의 발명
            • (2) 농업기상학의 발달
        • 3. 물리학과 물리기술
          • 1) 도량형과 자기의 이론
          • 2) 자석과 자기의 이론
          • 3) 수리기술과 기계장치
          • 4) 화약과 화기의 제조
        • 4. 의약과 약학
          • 1) 의약정책
            • (1) 고려 의학의 계승
            • (2) 향약 장려정책
            • (3) 중국 약의 이식과 재배
            • (4) 약재의 무역
            • (5)≪신주무원록≫의 편찬
          • 2)≪향약집성방≫의 편찬과 간행
            • (1) 편찬 배경과 과정
            • (2) 특징과 의의
          • 3)≪의방유취≫의 편찬과 간행
            • (1) 편찬과정과 편집방식
            • (2) 인용문헌
            • (3) 오늘날 전하는≪의방유취≫
          • 4) 의서의 편찬과 간행
            • (1) 중국의서의 수입과 간행
            • (2) 국내 의서의 편찬과 간행
            • (3) 허준의 의서 편찬
            • (4) 의서의 언해
          • 5)≪동의보감≫의 편찬과 간행
            • (1) 편찬배경과 저술과정
            • (2) 내용과 편집체계
            • (3) 특징과 의학사적 의의
            • (4) 간본
          • 6) 다원적인 의료상황
            • (1) 의학의 분화
            • (2) 온천·냉천 및 한증욕의 발달
            • (3) 양생술의 유행
            • (4) 종교적 의료
      • Ⅱ. 기술
        • 1. 농업과 농업기술
          • 1) 농업과 그 환경
            • (1) 자연환경
            • (2) 인구와 농업노동력
            • (3) 노동수단
            • (4) 노동대상
          • 2) 농업기술
            • (1) 수전농법
            • (2) 한전농법
            • (3) 서지법
            • (4) 시비법
            • (5) 경법과 쟁기
            • (6) 농구체계
          • 3) 농업기술의 성격
        • 2. 인쇄기술
          • 1) 금속활자의 주조 및 조판인쇄
            • (1) 관주활자
            • (2) 민간활자
          • 2) 목활자의 제작 및 조판인쇄
          • 3) 목판의 판각 및 인쇄
          • 4) 서적의 인쇄
            • (1) 관판본
            • (2) 국왕 및 왕실판본
            • (3) 사찰판본
            • (4) 서원판본
            • (5) 사가판본
        • 3. 군사기술
          • 1) 화약과 화기의 전래
          • 2) 화약의 제조
          • 3) 화기제작기술의 부침
            • (1) 화기발달의 시초(태종대)
            • (2) 화기발달의 진전(세종 전기)
          • 4) 조선 중기의 화기
            • (1) 총통
            • (2) 발사물
            • (3) 화약무기의 특징
      • Ⅲ. 문학
        • 1. 한문학
          • 1) 한문학의 맥락
            • (1) 조선왕조 개국과 한문학
            • (2)≪동문선≫과 조선문학
            • (3) 문이재도론의 전개
          • 2) 사림파의 한문학
            • (1) 목릉성세와 성정미학
            • (2) 사림파의 품격론
            • (3) 사림파의 음영성정
        • 2. 국문학
          • 1) 훈민정음 창제와 국문학
          • 2)≪용비어천가≫와≪월인천강지곡≫
          • 3) 악장과 경기체가
          • 4) 시조와 가사
          • 5) 설화와 소학지희
        • 3. 언어
          • 1) 문자생활
            • (1) 한자와 한글
            • (2) 한글의 사용과 보급
          • 2) 언어
            • (1) 한글문헌과 그 언어
            • (2) 음운
            • (3) 문법
            • (4) 어휘
      • Ⅳ. 예술
        • 1. 음악
          • 1) 왕립음악기관의 역사적 변천과 활동범위
            • (1) 왕립음악기관의 역사적 변천
            • (2) 장악원의 직제와 활동범위
          • 2) 아악의 부흥
            • (1) 건국 초기의 악가제정
            • (2) 세종대의 율관제작과 악기제조
            • (3) 세종대의 아악제정과 박연
            • (4) 아악이론과 음악양식
          • 3) 향악과 향악정재
            • (1) 향악기와 향악곡
            • (2) 향악의 음악양식
            • (3) 향악정재와 민속악
          • 4) 당악과 고취악
            • (1) 당악과 당악정재
            • (2) 당악의 향악화와 음악양식
            • (3) 고취악
          • 5) 악서와 기보법
            • (1) 악보와 악서편찬
            • (2) 새 기보법의 창안
        • 2. 건축
          • 1) 건축기법과 특징
          • 2) 도성의 건설
            • (1) 도성건설의 개요
            • (2) 태조의 도성건설
            • (3) 태종의 도성건설
            • (4) 세종과 그 이후의 도성건설
          • 3) 읍성의 축조와 관아시설
            • (1) 읍성의 축조
            • (2) 관아의 시설
          • 4) 사전의 건축
            • (1) 사단의 조영
            • (2) 사묘 건축
            • (3) 학교 건축
          • 5) 사원의 건축
          • 6) 민가의 건축
        • 3. 도자
          • 1) 분청사기와 조선청자
            • (1) 분청사기
            • (2) 조선청자
          • 2) 조선백자
            • (1) 세계도자사와 조선백자
            • (2) 조선백자의 시작과 확산
            • (3) 조선백자의 변천
          • 3) 청화백자
          • 4) 조선백자의 문양
          • 5) 사옹원과 분원
            • (1) 사옹원
            • (2) 분원
            • (3) 분원의 운영개요
        • 4. 회화
          • 1) 고려전통의 계승과 중국화풍의 수용
            • (1) 고려전통의 수용
            • (2) 중국화풍의 수용
          • 2) 왕공·사대부와 회화
          • 3) 도화서와 화원
          • 4) 회화의 제경향
            • (1) 안견의 화풍
            • (2) 강희안과 강희맹의 화풍
            • (3) 이상좌의 화풍
            • (4) 이장손·최숙창·서문보의 화풍
            • (5) 이암·신사임당의 화풍
          • 5) 일본 무로마찌시대 회화에 미친 영향
        • 5. 서예
          • 1) 송설체의 유행
          • 2) 왕희지체의 전통
          • 3) 금석과 사경의 서풍
          • 4) 한글서체의 필사화
        • 6. 공예
          • 1) 금속공예
            • (1) 범종
            • (2) 사리장엄구
            • (3) 향로
            • (4) 청동운판과 대발
            • (5) 도검
            • (6) 생활용구와 장신구
          • 2) 목칠공예
            • (1) 목공예
            • (2) 칠공예
        • 7. 조각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3) 세종대의 논의

 조선 초기의 풍수설은 세종대에 景福宮의 명당 여부에 대한 논란으로 다시 큰 화제가 되었다. 원래 한양을 수도로 결정한 과정은 앞에 소개한 것처럼 여러 의견의 대립 끝에 ‘어쩔 수 없이’ 한양을 선택하게 된 점이 있다. 그러나 세종대에 들어와 경복궁의 건설이 풍수지리설의 잘못된 해석으로 이루어졌다면서 명당의 위치를 수정하여 새 명당에 궁궐을 지어야 한다는 논의가 일어났고, 이에 대해 세종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많은 논란 끝에 세종의 야심은 결국 수포로 돌아갔지만, 조선초에는 아주 큰 사건이었던 이 사건은 지금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026)

 당시 풍수가 崔揚善은 경복궁은 主山을 잘못 정하고 그 아래에 지은 것이라면서 새 명당에 궁궐을 새로 지을 것을 주장하고 나섰다. 경복궁의 북쪽 산이 주산일 수 없다는 것은 남산에 올라 보면 명확하다고 주장하면서 그는 향교동에 이어진 산맥, 즉 당시 承文院 자리가 주산이라고 주장하였다. 주산이란 명당의 주된 뒷산을 가리키는 것으로, 명당의 앞산을 案山 또는 朝山이라 부르는 것과 상응한다. 최양선은 창덕궁을 여기에 옮겨 놓으면 만세의 이익을 얻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세종은 전 청주목사 李蓁를 최양선과 함께 남산에 올라가 조사하라 시켰고 그 결과 이주 역시 같은 의견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이어 세종은 이를 재확인하기 위해 맑은 날 영의정 黃喜와 예조판서, 그리고 당대의 대표적 풍수가들이 모두 남산에 올라가 이를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세종 15년(1433) 7월 남산에 올라가 관찰한 결과는 최양선·이주·申孝昌 등이 경복궁이 잘못 건축되었다는 주장을 편 데 대해, 李陽達·高仲安·鄭秧 등은 정반대의 주장을 하였다.027)

 이 가운데 이양달은 이미 한양의 선정 과정에 참여했던 노년의 풍수가였다. 이 부분에서≪世宗實錄≫에는 이주와 신효창이 출세를 위해 최양선을 부추겨 이런 주장을 하게 하였다고 적고 있고 풍수설을 비판하는 예조좌참판 權蹈의 상소문을 길게 소개하였다. 권도는 孔子나 周公도 일찍이 풍수설을 말한 일이 없다면서 그 허탄함을 강조하였다. 아마 이 상소문은 당대의 대표적 문장으로 꼽힐 만하다고 뒤에 알려졌던 것 같다. 개국공신 權近의 둘째 아들이었던 권도는 뒤에 이름을 權踶로 바꿨는데, 그 이름 아래 이 글은≪東文選≫에 들어 있을 지경이다.028)

 그러나 세종의 풍수설에 대한 태도는 대신들의 그것과는 상당히 달라 보인다. 영의정 황희 등이 남산에 올라가 조사한 보고를 그 그림과 함께 받은 세종은 바로 그 다음날 代言들에게 전에 풍수서를 읽어보고 싶었으나 대신들의 말을 듣고 이를 자제한 바 있다면서, “지리설은 비록 모두 믿을 바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모두 폐할 것도 아니다”라고 하면서, “게다가 조상들이 도읍을 정하고 山陵을 정하는데 모두 지리학을 사용”했음을 들고 있다.029)

 또 그 후 1주일 쯤 뒤에 권도의 상소문을 읽은 다음 세종은 최양선이 교활하다는 것에 동의하기를 거부하면서, 오히려 자기 전문 분야에 대한 의견을 강하게 가지는 일은 충직한 것이라고까지 칭찬하였다. 세종은 승문원 골짜기가 명당이라는 최양선의 의견은 족히 믿을 만하지는 않으나 자신이 그 지세를 살펴 그 시비를 가리고 싶다고도 말했다. 세종은 또한 지리 관계 서적 가운데에는 간혹 虛誕한 내용도 있으나 모두 버릴 수는 없다고 하였다. 한 발 더 나아가 세종은 상소를 올린 권도의 경우 자기 아버지 권근을 장사할 때 과연 지리학을 이용하지 않았느냐고 따졌다.

 특히 세종은 당시 사람들이 조정에서는 神을 섬기는 일을 금하자면서, 집에서는 신 섬기는 일에 빠져 있는 수가 너무 많다고 지적하였다. 이처럼 임금을 위할 때와 자신을 위할 때가 서로 모순된다는 것이다. 세종의 풍수설에 대한 집착은 그 후 상당히 길게 지속되는 것으로 보인다. 관리들이 최양선의 처벌을 질기게 요구함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이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비록 최양선의 주장에 스스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라면서도 세종은 나라를 위해 자기 전문지식을 충실하게 제공하는 사람을 처벌하면 앞으로 누가 나라를 위해 지식을 제공하겠느냐는 논리였다. 최양선은 그 후에도 줄기차게 풍수설을 근거로 자기 주장을 몇 가지 각도에서 내세웠고, 그 때마다 처벌 요구가 있었으나 세종은 10년 동안이나 그 요구를 거절했다. 세종 25년 정월 당시 서운관 부정 최양선은 다시 풍수에 관한 자기 주장을 가지고 鄭麟趾 등 상관을 능욕했다 하여 의금부에 갇히게 되었다.030)

 그러나 세종은 최양선이 허황한 주장을 곧잘 한다는 사실을 시인하고, 또 자기는 이를 믿지 않는다면서 이미 앞으로 국가 대사에 나서지 말라고 그에게 지시했음을 밝혔다. 그러나 세종은 그가 다른 마음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니라며 진실로 그의 의견이 이렇기 때문에 그 의견을 밝힌 것이니 이를 죄줄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 세종은 역사 어디를 보아도 마음 속의 말을 했다 하여 죄주는 일은 없었다고 단언하고, 또 최양선을 벌한다면 그것은 아래 사람은 윗사람의 말을 거역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뜻인데, 이 어찌 나라를 위해 이익이 되겠느냐고 반문하였다.031)

 최양선을 처벌하라는 여론은 2월 내내 계속 되었으나, 세종은 23일 최종적으로 최양선을 벌할 수 없다고 단언하였다.032) 하지만 바로 그 이듬해 세종 26년(1444) 윤7월 최양선이 다시 허탄한 주장을 내세우자 임금은 승정원에 지시하여 앞으로 다시 국가사에 관여하는 상소를 올리면 처벌하겠다고 본인에게 통고하라고 지시하고, 그의 상소문을 불에 태워버리게 했다.033)

 세종 일대를 통해 최양선이 이 정도로 임금의 적극적인 두둔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은 기이한 느낌을 준다. 세종은 분명히 내심으로 최양선의 주장에 동조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하들의 강력한 반대로 승문원 자리에 이궁을 건설하지는 못했지만, 세종은 경복궁의 풍수상의 결함을 보충하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다. 경복궁의 ‘明堂無水’라는 비판에 따라 여러 곳에 못을 새로 파고, 또 파려는 시도를 했다. 이 시도 역시 뜻대로 실행되지 않자, 세종은 경복궁 안에 후궁을 짓기 시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공사 역시 세종 25년 신하들의 반대로 중단되었다.

 후궁의 건립을 단념한 후 세종은 급속도로 건강이 나빠졌는데 이에 대해 풍수설의 압박이 주요 이유가 아닌가 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또 이 때부터 세종은 경복궁을 기피하고, 왕자·사위·형제의 집으로 전전하는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이 또한 ‘풍수설의 압력’ 때문일 것이라고 보는데,034) 이는 아주 탁월한 평가라고 생각된다.

 세종은 개국 초기에 이미 논란이 되었던 경복궁의 풍수학상의 결함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최양선의 주장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러나 신하들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혀 이궁을 승문원 자리에 짓거나 연못을 만들고, 또 후궁을 짓는 등의 노력이 모두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세종의 풍수에 대한 집착은 그 후에도 계속 여러 문제를 일으켰다. 세종 26년 12월 집현전 교리 魚孝瞻은 장문의 상소문을 올려 당시 논의되고 있던 경복궁의 북쪽 길을 막고 산을 쌓아 풍수적 보완을 하자는 의견을 맹렬하게 비판하였다.035) 이 글에서 어효첨은 풍수설은 3대 이전에는 없던 것이고, 나라의 명운이 길고 짧은 것은 천명에 달린 일이어서 인심이 머물고 떠나는 일이 풍수지리와는 상관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 중국 역사의 예를 들어, 풍수설이 아직 없던 3대 이전의 왕조가 오히려 더 길었고, 같은 장소에 도읍을 해도 왕조에 따라 그 길고 짧음이 달랐다고 지적하였다. 세종은 어효첨의 상소문을 읽고 그 주장이 옳다고 승정원에 말하면서도 풍수학 책은 믿을 수 없지만, 옛사람들이 모두 이를 썼다고 덧붙였다.

 세종이 말년에 가지고 있던 태도는 조선시대를 통해 특히 왕실이 갖고 있던 풍수설에 대한 대표적 입장이었다고 생각된다. 점점 유교화해 가는 신하들이 풍수설의 허탄함을 들고 나섰지만, 왕실 입장에서는 어느 누구도 이를 무시하여 궁궐을 세우고 고치거나 묘지를 정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조선 초기의 풍수설은 일단 도읍이 한양으로 확정되고 새 왕조의 통치가 궤도에 오르자 도읍의 풍수 조건에 대한 근본적 논의는 있을 수 없게 되었다. 또 일단 안정된 정권은 몇 백년 동안은 도참적으로도 흔들릴 까닭이 없다고 보이므로 풍수설은 이제 국가풍수가 아니라 개인의 풍수설로 그 중심을 옮겨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또 이런 풍수설의 관심 분야가 달라지는 것과 함께 풍수설은 양반 지배층의 큰 관심에서 조금 거리를 가지게 되고, 그 대신 易學的 운명판단법이 그 자리를 채우기 시작하고 있었다.

026) 李丙燾, 앞의 책, 445쪽.
027)≪世宗實錄≫권 15, 세종 15년 7월 경신.
028)≪世宗實錄≫권 15, 세종 15년 7월 병인.

徐居正,≪東文選≫권 55, 奏議 請停遷明堂書.
029)≪世宗實錄≫권 61, 세종 15년 7월 신유.
030)≪世宗實錄≫권 99, 세종 25년 정월 병술.
031)≪世宗實錄≫권 99, 세종 25년 2월 무자.
032)≪世宗實錄≫권 99, 세종 25년 2월 기유.
033)≪世宗實錄≫권 105, 세종 26년 윤7월 기유.
034) 李崇寧,≪韓國의 傳統的 自然觀≫(서울大 出版部, 1985), 535∼536쪽.
035)≪世宗實錄≫권 106, 세종 26년 12월 병인. 이 글은 약간 수정된 형태로≪東文選≫에도 실려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