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세종대의 논의
조선 초기의 풍수설은 세종대에 景福宮의 명당 여부에 대한 논란으로 다시 큰 화제가 되었다. 원래 한양을 수도로 결정한 과정은 앞에 소개한 것처럼 여러 의견의 대립 끝에 ‘어쩔 수 없이’ 한양을 선택하게 된 점이 있다. 그러나 세종대에 들어와 경복궁의 건설이 풍수지리설의 잘못된 해석으로 이루어졌다면서 명당의 위치를 수정하여 새 명당에 궁궐을 지어야 한다는 논의가 일어났고, 이에 대해 세종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많은 논란 끝에 세종의 야심은 결국 수포로 돌아갔지만, 조선초에는 아주 큰 사건이었던 이 사건은 지금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026)
당시 풍수가 崔揚善은 경복궁은 主山을 잘못 정하고 그 아래에 지은 것이라면서 새 명당에 궁궐을 새로 지을 것을 주장하고 나섰다. 경복궁의 북쪽 산이 주산일 수 없다는 것은 남산에 올라 보면 명확하다고 주장하면서 그는 향교동에 이어진 산맥, 즉 당시 承文院 자리가 주산이라고 주장하였다. 주산이란 명당의 주된 뒷산을 가리키는 것으로, 명당의 앞산을 案山 또는 朝山이라 부르는 것과 상응한다. 최양선은 창덕궁을 여기에 옮겨 놓으면 만세의 이익을 얻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세종은 전 청주목사 李蓁를 최양선과 함께 남산에 올라가 조사하라 시켰고 그 결과 이주 역시 같은 의견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이어 세종은 이를 재확인하기 위해 맑은 날 영의정 黃喜와 예조판서, 그리고 당대의 대표적 풍수가들이 모두 남산에 올라가 이를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세종 15년(1433) 7월 남산에 올라가 관찰한 결과는 최양선·이주·申孝昌 등이 경복궁이 잘못 건축되었다는 주장을 편 데 대해, 李陽達·高仲安·鄭秧 등은 정반대의 주장을 하였다.027)
이 가운데 이양달은 이미 한양의 선정 과정에 참여했던 노년의 풍수가였다. 이 부분에서≪世宗實錄≫에는 이주와 신효창이 출세를 위해 최양선을 부추겨 이런 주장을 하게 하였다고 적고 있고 풍수설을 비판하는 예조좌참판 權蹈의 상소문을 길게 소개하였다. 권도는 孔子나 周公도 일찍이 풍수설을 말한 일이 없다면서 그 허탄함을 강조하였다. 아마 이 상소문은 당대의 대표적 문장으로 꼽힐 만하다고 뒤에 알려졌던 것 같다. 개국공신 權近의 둘째 아들이었던 권도는 뒤에 이름을 權踶로 바꿨는데, 그 이름 아래 이 글은≪東文選≫에 들어 있을 지경이다.028)
그러나 세종의 풍수설에 대한 태도는 대신들의 그것과는 상당히 달라 보인다. 영의정 황희 등이 남산에 올라가 조사한 보고를 그 그림과 함께 받은 세종은 바로 그 다음날 代言들에게 전에 풍수서를 읽어보고 싶었으나 대신들의 말을 듣고 이를 자제한 바 있다면서, “지리설은 비록 모두 믿을 바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모두 폐할 것도 아니다”라고 하면서, “게다가 조상들이 도읍을 정하고 山陵을 정하는데 모두 지리학을 사용”했음을 들고 있다.029)
또 그 후 1주일 쯤 뒤에 권도의 상소문을 읽은 다음 세종은 최양선이 교활하다는 것에 동의하기를 거부하면서, 오히려 자기 전문 분야에 대한 의견을 강하게 가지는 일은 충직한 것이라고까지 칭찬하였다. 세종은 승문원 골짜기가 명당이라는 최양선의 의견은 족히 믿을 만하지는 않으나 자신이 그 지세를 살펴 그 시비를 가리고 싶다고도 말했다. 세종은 또한 지리 관계 서적 가운데에는 간혹 虛誕한 내용도 있으나 모두 버릴 수는 없다고 하였다. 한 발 더 나아가 세종은 상소를 올린 권도의 경우 자기 아버지 권근을 장사할 때 과연 지리학을 이용하지 않았느냐고 따졌다.
특히 세종은 당시 사람들이 조정에서는 神을 섬기는 일을 금하자면서, 집에서는 신 섬기는 일에 빠져 있는 수가 너무 많다고 지적하였다. 이처럼 임금을 위할 때와 자신을 위할 때가 서로 모순된다는 것이다. 세종의 풍수설에 대한 집착은 그 후 상당히 길게 지속되는 것으로 보인다. 관리들이 최양선의 처벌을 질기게 요구함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이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비록 최양선의 주장에 스스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라면서도 세종은 나라를 위해 자기 전문지식을 충실하게 제공하는 사람을 처벌하면 앞으로 누가 나라를 위해 지식을 제공하겠느냐는 논리였다. 최양선은 그 후에도 줄기차게 풍수설을 근거로 자기 주장을 몇 가지 각도에서 내세웠고, 그 때마다 처벌 요구가 있었으나 세종은 10년 동안이나 그 요구를 거절했다. 세종 25년 정월 당시 서운관 부정 최양선은 다시 풍수에 관한 자기 주장을 가지고 鄭麟趾 등 상관을 능욕했다 하여 의금부에 갇히게 되었다.030)
그러나 세종은 최양선이 허황한 주장을 곧잘 한다는 사실을 시인하고, 또 자기는 이를 믿지 않는다면서 이미 앞으로 국가 대사에 나서지 말라고 그에게 지시했음을 밝혔다. 그러나 세종은 그가 다른 마음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니라며 진실로 그의 의견이 이렇기 때문에 그 의견을 밝힌 것이니 이를 죄줄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 세종은 역사 어디를 보아도 마음 속의 말을 했다 하여 죄주는 일은 없었다고 단언하고, 또 최양선을 벌한다면 그것은 아래 사람은 윗사람의 말을 거역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뜻인데, 이 어찌 나라를 위해 이익이 되겠느냐고 반문하였다.031)
최양선을 처벌하라는 여론은 2월 내내 계속 되었으나, 세종은 23일 최종적으로 최양선을 벌할 수 없다고 단언하였다.032) 하지만 바로 그 이듬해 세종 26년(1444) 윤7월 최양선이 다시 허탄한 주장을 내세우자 임금은 승정원에 지시하여 앞으로 다시 국가사에 관여하는 상소를 올리면 처벌하겠다고 본인에게 통고하라고 지시하고, 그의 상소문을 불에 태워버리게 했다.033)
세종 일대를 통해 최양선이 이 정도로 임금의 적극적인 두둔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은 기이한 느낌을 준다. 세종은 분명히 내심으로 최양선의 주장에 동조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하들의 강력한 반대로 승문원 자리에 이궁을 건설하지는 못했지만, 세종은 경복궁의 풍수상의 결함을 보충하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다. 경복궁의 ‘明堂無水’라는 비판에 따라 여러 곳에 못을 새로 파고, 또 파려는 시도를 했다. 이 시도 역시 뜻대로 실행되지 않자, 세종은 경복궁 안에 후궁을 짓기 시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공사 역시 세종 25년 신하들의 반대로 중단되었다.
후궁의 건립을 단념한 후 세종은 급속도로 건강이 나빠졌는데 이에 대해 풍수설의 압박이 주요 이유가 아닌가 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또 이 때부터 세종은 경복궁을 기피하고, 왕자·사위·형제의 집으로 전전하는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이 또한 ‘풍수설의 압력’ 때문일 것이라고 보는데,034) 이는 아주 탁월한 평가라고 생각된다.
세종은 개국 초기에 이미 논란이 되었던 경복궁의 풍수학상의 결함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최양선의 주장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러나 신하들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혀 이궁을 승문원 자리에 짓거나 연못을 만들고, 또 후궁을 짓는 등의 노력이 모두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세종의 풍수에 대한 집착은 그 후에도 계속 여러 문제를 일으켰다. 세종 26년 12월 집현전 교리 魚孝瞻은 장문의 상소문을 올려 당시 논의되고 있던 경복궁의 북쪽 길을 막고 산을 쌓아 풍수적 보완을 하자는 의견을 맹렬하게 비판하였다.035) 이 글에서 어효첨은 풍수설은 3대 이전에는 없던 것이고, 나라의 명운이 길고 짧은 것은 천명에 달린 일이어서 인심이 머물고 떠나는 일이 풍수지리와는 상관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 중국 역사의 예를 들어, 풍수설이 아직 없던 3대 이전의 왕조가 오히려 더 길었고, 같은 장소에 도읍을 해도 왕조에 따라 그 길고 짧음이 달랐다고 지적하였다. 세종은 어효첨의 상소문을 읽고 그 주장이 옳다고 승정원에 말하면서도 풍수학 책은 믿을 수 없지만, 옛사람들이 모두 이를 썼다고 덧붙였다.
세종이 말년에 가지고 있던 태도는 조선시대를 통해 특히 왕실이 갖고 있던 풍수설에 대한 대표적 입장이었다고 생각된다. 점점 유교화해 가는 신하들이 풍수설의 허탄함을 들고 나섰지만, 왕실 입장에서는 어느 누구도 이를 무시하여 궁궐을 세우고 고치거나 묘지를 정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조선 초기의 풍수설은 일단 도읍이 한양으로 확정되고 새 왕조의 통치가 궤도에 오르자 도읍의 풍수 조건에 대한 근본적 논의는 있을 수 없게 되었다. 또 일단 안정된 정권은 몇 백년 동안은 도참적으로도 흔들릴 까닭이 없다고 보이므로 풍수설은 이제 국가풍수가 아니라 개인의 풍수설로 그 중심을 옮겨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또 이런 풍수설의 관심 분야가 달라지는 것과 함께 풍수설은 양반 지배층의 큰 관심에서 조금 거리를 가지게 되고, 그 대신 易學的 운명판단법이 그 자리를 채우기 시작하고 있었다.
026) | 李丙燾, 앞의 책, 445쪽. |
---|---|
027) | ≪世宗實錄≫권 15, 세종 15년 7월 경신. |
028) | ≪世宗實錄≫권 15, 세종 15년 7월 병인. 徐居正,≪東文選≫권 55, 奏議 請停遷明堂書. |
029) | ≪世宗實錄≫권 61, 세종 15년 7월 신유. |
030) | ≪世宗實錄≫권 99, 세종 25년 정월 병술. |
031) | ≪世宗實錄≫권 99, 세종 25년 2월 무자. |
032) | ≪世宗實錄≫권 99, 세종 25년 2월 기유. |
033) | ≪世宗實錄≫권 105, 세종 26년 윤7월 기유. |
034) | 李崇寧,≪韓國의 傳統的 自然觀≫(서울大 出版部, 1985), 535∼536쪽. |
035) | ≪世宗實錄≫권 106, 세종 26년 12월 병인. 이 글은 약간 수정된 형태로≪東文選≫에도 실려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