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유학사상을 통해 본 자연관-유교정치와 자연
조선사회를 지배한 유교 또는 유학은 본질적으로 인간 중심의 사상체계였다. 동양의 전통사상 가운데 도가사상이 자연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자연 속의 인간을 성찰하는 것이었다면, 유학은 자연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은 사상체계로 출발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초에 새 왕조의 지배이념으로 확립된 유교란 춘추전국시대의 원시 유교가 아니라 이미 도교적 사상까지 적당히 포용하고 있는 수정된 유교였다.
흔히 고려말에 安珦에 의해 성리학이 처음 받아들여졌다 하여 조선초의 유교가 성리학 또는 주자학이라 말하는 수가 많지만, 형식적인 성리학의 수용이 시작되었다 하여 성리학의 자연관이 이미 이 땅에 뿌리를 내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조선초의 유학은 고려말까지 자리굳히고 있던 전통적 유학이라 규정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董仲舒 등에 의해 수정된 漢代 유학이 조선초까지의 주류였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대 유학이건 성리학이건 간에 유학의 공통적 특징으로서의 자연에 대한 무관심은 마찬가지처럼 보인다. 물론 유학의 두 가지 경향은 어느 쪽이거나 자연 그 자체에 대한 깊은 관심과 연구 태도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044)
조선초 유교사회가 교육에 어떤 교재를 사용했던가를 살펴보아도 이는 분명해진다. 조선 전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대표적 학자로 꼽을 수 있는 율곡 이이는 바람직한 교육과정을 다음과 같이 잡았다. 7살에≪小學≫을 읽기 시작하여≪大學≫과≪近思錄≫을 거쳐≪論語≫·≪孟子≫·≪中庸≫까지의 4서를 마친 다음 5경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그 다음에≪史記≫와 性理書를 공부하게 함으로써 성년이 되기까지 교육을 일단락짓는 것으로 되어 있다.045)
이들 전통사회의 중심 교과서들에는 자연현상에 대한 객관적 관찰을 말한 부분이 하나도 없다. 도대체 교육은 자연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지 가르치는 법이 없었다. 다만 정형화된 재이론적 자연관을 가지고 유교정치의 관행으로 밀고 나갈 뿐이었다. 이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반항하는 사람은 임금이라도 그 비판을 견뎌내고 살아남기 어려웠다. 자연현상을 그저 자연 그 자체에서만 일어난, 인간과는 별로 상관없는 일로 보려는 태도는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예를 우리는 얼마든지 들 수 있지만, 여기서는 태양을 둘러싼 몇 가지 재이를 중심으로 유교사회에서 자연이 어떻게 해석되었던가를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