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의약과 약학
조선은 건국하면서 사회·문화 전반에 관한 개혁을 추진하여, 세종과 성종 때에 이르러 절정을 보게 되었다. 특히 세종 때에는≪鄕藥集成方≫의 편찬으로 기존의 향약정책이 결실을 맺었으며,≪醫方類聚≫의 편찬으로 당시까지의 중국의학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정리하였다. 또한≪新註無寃錄≫을 편찬하여 裁判 의학을 수립하였다.
조선 전기에 의약분야에서 이같은 개혁이 진행되었지만, 고려시대의 전통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건국초에는 그 경향이 더욱 심해, 의료제도나 관직·의서·향약정책 등 거의 모든 면에서 고려의 것을 그대로 썼다. 그 중 특기할 만한 것은 향약정책의 계승이다. 의료의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서 약재의 수요 또한 크게 증가하였는데, 약재의 조달이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었다. 중국의서에 따른 약재를 모두 수입품에 의존한다는 것은 엄청난 비용을 필요로 했으며, 또한 상당히 많은 약재를 일일이 다 수입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조선정부는 중국약을 향약으로 대치하는 작업과 외국약재의 국내 이식·재배에 크게 신경을 썼다.
明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조선의 의약상황은 차차 바뀌게 되었다. 중국 의관과의 교류도 활발해졌고, 중국 의서의 수입과 발간이 빈번해졌다. 당시 명에서는 주자학의 영향을 많이 받은 의학이론이 유행하였는데, 이는 국내에서 사림의 대두와 주자학의 수용과 맥락을 같이 할 수 있는 것이어서 국내 의가들이 크게 선호하였다.
중국 의학의 수용은 한편으로는 조선 의학의 내용을 풍부하게 하고, 심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부작용도 컸다. 고려 때부터 계속되어 온 향약정책이 소홀하게 되었으며, 지나친 중국 의학의 범람으로 실제 임상 처방에서 큰 혼란이 생기게 되었다.≪東醫寶鑑≫은 이같은 혼란 상황을 다스리기 위하여 출간된 것이었다.
조선 전기에는 의학이 그 어느 시대보다도 크게 발달하였다.≪향약집성방≫·≪의방유취≫·≪동의보감≫ 등 종합의서들이 편찬된 한편, 의학의 전문화도 같이 이루어졌다. 침구와 종기 치료분야가 독립되었으며, 전염병학 분야에서도 뚜렷한 발전이 있었다. 또한 온천욕·냉천욕·한증욕 등의 물리요법들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었으며, 많은 온천·냉천들이 개발되기도 하였다. 한편 양반 사대부계층을 중심으로 도교적 성격이 짙은 養生術이 유행한 것도 이 시기의 특징 중 하나이다.
조선 전기 역시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다원적인 의료가 공존한 사회였다. 무속·불교·도교적인 의료는 체계적인 의학을 갖춘 의료보다도 더 널리 사회에서 실용되었다. 이들 종교적 의료는 민간에서 뿐만 아니라 왕실·양반계층에서도 널리 퍼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