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신주무원록≫의 간행
≪무원록≫이 세종 원년부터 형조에서 실제 이용되었으나, 이 책은 중국 원나라 때 검험한 조례를 중심으로 해서 편성되었기 때문에 우리 나라의 관습과 규례에 맞지 않는 것이 많았을 뿐 아니라 문장도 해석하기에 어려운 점이 많았다. 그리하여 세종 20년(1438) 11월에 崔致雲·李世衡·卞孝文·金滉 등에게 명하여≪무원록≫에 주해를 더하고 음과 훈을 붙여≪新註無寃錄≫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반포하였다. 이 책의 완성과 함께 조선 전기의 법의학적 지식은 더욱 발전을 보게 되었다. 또한 이 책은 알기 쉽게 주해되어 있기 때문에 법의학적 지식이 보편화되는 데에도 크게 공헌했다.
≪신주무원록≫의 발간상황은 강원도관찰사 崔萬理의 발문을 통해 상세히 알 수 있다. 이 책은 세종 22년에 강원도관찰사 兪孝通이 왕명을 받아 원주에서 처음으로 간행하였다. 그런데 영남의 군현들이 이 판본을 쉽게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세종 29년 영남부에서 다시 간행하였다. 이 사실은 이 간본에 붙어 있는 孫肇瑞의 발문을 통해 확인된다. 이렇듯≪신주무원록≫의 검시양식은 각 도에서 간행되어 형률관들 사이에 널리 이용되었다.
≪신주무원록≫은 상하 2권으로 되어 있으며 목차를 통해 당시 법의학적 관심을 헤아릴 수 있다.
상 권
1. 屍帳式
2. 屍帳例
3. 屍帳仵作被告人畵字
4. 死無親屬詐鄰佑地主坊正中官
5. 正官檢屍及受理人命詞訟
6. 受理人名詞訟及檢屍例
7. 自縊免檢
8. 開棺臨事區處
9. 檢驗骨殖無定例
10. 屍傷不明
11. 檢復遲慢
12. 檢屍不委巡檢
13. 作耗賊殺人免檢
14. 强盜殺傷錢主隨卽合檢驗
15. 省府立檢屍式內二項
16. 寒暑變動
17. 初復檢驗關文式
하 권
1. 檢覆總說
2. 驗法
3. 婦人
4. 小兒屍首胞胎
5. 勒死
6. 自縊死
7. 落水投河死
8. 相毆後落水死
9. 捧毆死
10. 刃傷死
11. 刺死
12. 屍首異處
13. 拳手足踢死
14. 辜內病死
15. 自割死
16. 毒藥死
17. 火燒死
18. 湯潑死
19. 病患死
20. 凍死
21. 餓死
22. 杖瘡死
23. 罪囚被勘死
24. 驚諕死
25. 攧死
26. 壓死
27. 馬踏死
28. 車碾死
29. 被人鍼灸當下致死
30. 雷震死
31. 虎咬死
32. 酒食醉飽死
33. 外物壓塞口鼻死
34. 硬物癮 麗死
35. 蛇蟲傷死
36. 男子作過死
37. 白僵乾瘁死
38. 蟲鼠犬咬傷死
39. 死後仰臥停泊微有赤色
40. 壞爛死
41. 無憑檢驗屍
42. 墳內及屋下夕贊殯死
43. 發塚
상권에는 주로 시체 검안에 관한 법규와 원의 檢驗判例文이 주로 수록되어 있다. 하권에는 시체에 난 상흔에 따른 사인들이 자세히 열거되어 있다. 여기서는 검험의 전문적 내용을 담고 있는데, 근대 법의학과 비슷한 체제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송대의≪세원록≫이나≪평원록≫에 비하여 훨씬 완비된 내용을 보이고 있다. 조선은 건국 후 모든 지도이념을 송의 유학에 두어 왔지만 검험의 문안은 송의 서적에 의하지 않고 원의≪무원록≫에 의존하였다. 이는≪무원록≫의 법의학적 가치를 충분히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시체검안서를 작성하는데 참고자료로 쓰이는 屍帳式의 앞뒷면, 즉≪신주무원록≫에 圖解된 仰面圖와 合面圖에 지시되어 있는 신체의 각 부위는 오늘날의 해부학적 구분과는 일치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 그림은 신체 표면의 각 부위를 계통적으로 열거하고 있으며, 특히 그 표면을 앞뒷면으로 구분하여 상해 부위를 명백히 지적하고 있다. 물론 원래 신체표면의 구분이 실제의 경우 경계를 엄격하게 규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 검안서 양식의 그림을 실제 사용하기에는 불합리한 점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시체의 검안서를 작성할 때 신체 각 부위의 표현을 통일되게 기술할 수 있도록 하는 데 크게 기여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