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수리사업과 수리시설
다음으로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토지개량 설비인 당시의 수리사업과 수리시설을 살펴보겠다. 벼농사의 비중이 극히 낮았던 조선 전기에서도 가뭄에 대한 기록이 115년간(1392∼1506)에 13년을 제외한 102년 동안 해마다 발견될 정도로 잦았다고 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는 국가적 행정력으로 추진된 堤堰의 신축 및 보수사업이나 신흥사대부가 주도한 川防 개발사업 등이 있었다.165) 국가권력으로 권농관과 수많은 농민을 동원하여 수축한 제언의 경우와는 달리 천방은 비교적 소규모의 관개시설이었으므로 중소지주에 의해 널리 추진되었다.
국가에 의해 축조된 제언은 중종 18년(1523)경 하삼도에 2,200여 개에 이르렀다. 그러나 조선 전기에 가장 선진적 농업지역이었던 경상도에서도 제언을 통한 관개는 대략 19.6%의 수리안전답을 담보하는데 불과하였다.166) 더욱이 이는 어디까지나 결수로 파악한 수치였을 뿐 아니라, 비교적 제언과 보가 많았던 경상도지방을 기준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의 수리안전답률은 그보다 훨씬 낮았을 것이었다. 또한 전체 농경지 가운데서 논이 차지한 비중도 극히 낮았으므로, 최대치로 계산한다 하더라도 겨우 전체의 약 3∼4% 면적만을 관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이는 당시 국가의 수리사업을 통한 토지개량이 극히 취약하였음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