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토성과 비료
조선 전기 비료에 대한 연구는 적지 않지만 여전히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다. 먼저 이 시대 농업에서 사용된 비료를 여러 농서를 통해 살펴보면,170) 크게 세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제1유형의 비료로는 가공과정을 전혀 거치지 않은 客土·綠肥·草木肥 등을 들 수 있다. 제2유형의 비료는 草灰糞·尿灰·廐肥(외양간거름) 등인데 여기에는 火糞·火耕 등의 초보적 형태에서 인분·우마분·소오줌과 이들을 腐熟시켜 사용하는 熟糞, 분말형 농후비료의 형태를 띠는 尿灰, 그리고 가는 버드나무 가지를 외양간에 깔아 만든 외양간거름 등이 있었다.
그런데 전체 농지에 시비되어 농업생산성을 크게 높이는 데 필수적이라 할 수 있는 외양간거름이 이 시대에 과연 널리 만들어졌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15세기 농서인≪농사직설≫에는 버드나무 가지를 이용한 초보적인 외양간거름이 처음으로 보이며, 16세기의≪農書輯要≫에서는 산야의 잡초나 타작 후의 부산물을 이용하여 만드는 ‘糞收貯法’이란 외양간거름 제조법이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다.171)
제3유형의 비료로는 種子·누에똥(蠶沙) 등이 있었는데 보리 파종 때 한기를 견딜 수 있도록 보리종자를 漬種하는 데 사용된 酌獎 등의 비료는 상대적으로 좁은 범위 내에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이 시대에는 전체적으로 보아 객토·녹비·초목비 등과 같이 가공을 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비료와 초회분·요회 등처럼 농업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어떠한 형태로든지 일차 가공을 가한 비료들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비료는 당시의 토양 비옥도(土性)와 함께 검토할 때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 시대 각 군현의 비옥도는 경기·충청·전라도의 경우 ‘肥瘠相半’·‘瘠’이라 기록한 군현이 가장 많았고, 그에 비해 황해·강원·함길도는 약간의 예외는 있으나 비교적 ‘瘠’·‘多瘠’이라 한 군현이 많았다. 이로 보아 조선 전기의 전국적인 토성은 척박한 열등지가 가장 많았음을 알 수 있다.172) 이러한 사정은 이 시대의 농경지가 대체로 극히 낮은 비옥도를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시비량도 극히 적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토지 비옥도는 전반적으로 척박하였으며, 비록 초보적인 비료들이 제조되었다 하더라도 여기에는 전혀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였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