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벼농사의 위치
이상과 같은 사정은 곧 한국 특유의 직파연작기술과 건경법이 주축이 된 이 시대의 벼농사가 기본적으로 노동 절약적, 토지 사용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하겠다. 아직 이앙법은 일부에서 제한적으로만 시행되고 있었고, 시비의 경우도 경작의 집약적 한계보다는 외연적 한계를 넓히는 데 집중되었다. 그런 점에서 이 시대의 벼농사기술은 수전개간에 따른 숙전화와 깊은 관련 위에서 전개되었다고 생각된다. 비록 그렇다 해도 조선 초기의 전체 농경지 가운데서 차지하는 수전의 면적은 20%에 미달하였을 뿐 아니라,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분포하였다.181) 이른바 경상·전라·충청·경기도의 경우는 수전비율이 30%대로 높았지만, 황해·강원·평안·함경도 등에서는 10%에 미달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상도의 남부지방과 전라·충청도의 일부지방에서는 50%를 넘는 군현도 존재하였다.182)
한편 조선 전기의 농서들을 분석해 볼 때 경상도의 관행농법을 실은≪농사직설≫에서는 수도에 대해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하였고(33%),≪금양잡록≫에서도 벼의 품종이 다른 작물보다 가장 다양하게 분화된 것으로 나타난다.183) 또 세종 14년(1432)경의 작물재배 범위를 보면, 벼는 기장(286군현)과 콩(282군현) 다음으로 전국 334군현 중 278군현에서 재배되고 있었다. 그러나 주로 산간지역을 대상으로 한≪撮要新書≫에는 벼의 재배기술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다.184) 이러한 사실은 이 시대의 벼농사가 매우 큰 편차를 가졌으며, 여전히 벼의 위치가 매우 불안정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조선 전기에 벼농사는 전농토의 20∼30%에 불과한 면적을 차지하였고 생산비중도 낮아 비교적 좁은 범위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벼는 단일 작물로서는 비교적 넓은 범위를 차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남부지방의 경우에는 벼의 비중이 압도적인 지역도 적지 않았다. 또한 벼는 주로 국가의 조세로 납부되었을 뿐 아니라 상류계급의 주식이자 제사음식이었으므로 그 농사가 국가의 관심대상이었다. 그리고 한국의 독특한 기후와 풍토 때문에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주류를 이룰 정도로 발달한 한전농업의 기술이 벼농사에도 건경이란 모습으로 원용되어 농사의 안정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 시대에 수전농법은 한전농법에 대해 대립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의존적이었던 것이다.
181) | ≪世宗實錄地理志≫에 기록된 수전면적을 통계처리한 결과이다. 李鎬澈,<토지파악방식과 田結>(앞의 책), 266∼269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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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 李鎬澈, 위의 책, 269쪽의<그림 2> 참조. |
183) | ≪衿陽雜錄≫ 穀品에는 모두 27개의 벼품종을 싣고 있는데, 이는 그 다음으로 품종이 많이 분화된 조(15품종)·대두(8품종)·소두(7품종) 등에 비하여 매우 특징적인 품종분화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
184) | 바로 그러한 점을 비롯하여 菊堂 朴興生의≪撮要新書≫는 산림지였던 영동지방을 대상으로 저술된 농서였다는 증거가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다(李鎬澈,<旱田作物과 그 品種>, 앞의 책, 95∼99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