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염초생산의 확대와 화약성능의 향상
세종대에 들어서면서 첫째로 주목되는 형상은 焰硝생산의 확대와 화약성능의 향상이다. 최무선이 습득한 비법의 소재는 실로 화기 자체의 주조보다 화약제조에 있었다. 화약제조의 3요소인 염초·유황·목탄의 배합도 배합이려니와 무엇보다도 염초를 굽는 기술, 즉 焰硝煮取法의 습득이 문제였다. 그런 만큼 염초자취의 발달은 화기발전의 밑바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세종 이전의 기록에서는 염초자취술을 알고 있었다는 내용 이상의 구체적인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즉 군기감에서 화약을 제조하였고, 태종 17년에는 화약 보유량도 6,980여 근이었는데, 그 원료인 염초를 중국에서 가져다 썼다는 흔적이 없으므로 염초자취술을 알고 있었음이 확실하지만, 자취방법 및 사용 등에 관한 직접적인 기록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세종대에 들어서면서 크게 달라졌다. 세종 즉위년(1418) 가을에 군기감에서 아뢴 바에 의하면 당시 염초 보유량이 3,316근이었고, 1년 소비량이 약 8,000근이었다. 또 그 해 12월에는 朴訔의 주장에 따라 염초자취의 원료인 焰硝土는 院이나 館 등 공공건물에서만 취하고 일반민가에서는 취하지 못하게 하였다. 염초토는 염초자취에서 가장 중요한 원료이다. 그런데 염초토는 건물의 樓下 等地에 있는 鹼氣가 많이 함유되어 있는 오래된 塵土라야만 되었기 때문에, 이를 채취할 때 자연히 민가에 피해를 입혔을 것이다.
염초자취는 중앙뿐 아니라 지방에서도 행해졌다. 당시 경상도에서는 병조의 지시에 따라 府官 이상은 20石, 知官(郡)은 16석, 縣官은 12석씩 염초토를 제공케 하고, 每一日程마다 都會를 열어서 염초 210근씩을 자취하였는데 金海·昌原·寧海 등 18곳의 염초토가 가장 우수하였다고 한다.357) 나아가 세종 13년(1431)경에 이르면 염초자취가 더욱 확대되어 전국적인 범위로 행해졌는데, 이는 세종 13년 6월 갑오에 병조에서 아뢴 것에 따라 ‘諸道分定焰硝煮取數’를 개정한 사실로 보아 명백하다. 즉 당시 지방에서 춘추 2회로 나누어 자취하는 총액이 3,000근이었는데, 이는 평안도와 황해도에 각 1,500근, 강원도에 940근으로 분정되어 있었다. 평안·황해 2도에 부담이 과중하였으므로, 총액을 1,500근으로 줄이고 이를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각 270근, 강원도에서 360근씩 貢案에 실어 常貢으로 상납케 하고, 나머지 부족액 700근은 개성 및 충청·전라·경상도 변두리의 각 관에 매년 軍器監員을 보내어 자취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전국에서 함경도만 빠졌는데, 함경도도 세종 14년 2월 이후에는 자취하게 된 것 같다.
염초자취가 전국적으로 확대된 것과 아울러 염초납입이 평안·황해·강원 3도에서 상공으로 규정된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세종 8년 12월 강원도감사의 關啓에서 “道에서 공물로 바치는 염초는 일찍이 영동 연해의 각 관에서 자취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염초가 처음으로 공물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358) 또 위에서 언급한 세종 13년 6월의 결정에 따라 평안·황해·강원 3도에서는 이를 다시 군현으로 나누어 상공으로 상납하였다. 그러나 당시 군현 단위로 상공화된 곳은 3도뿐이었고, 하삼도에서는 그대로 ‘差人煮取’의 방법을 취하고 있었다.
즉 당시 지방에서의 염초자취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중앙에서 관원을 보내어 都會所를 설치하고 관원의 직접 감독 아래 자취하는 방법과, 각 군현 단위로 자취량을 분정하여 상공으로 바치게 하는 방법이 그것이다. 후자의 방법에 따르면 자연히 자취기술이 보급되어 생산량이 증가할 터인데도, 되도록이면 전자의 방법을 택하려고 했던 까닭은 자취기술이 민간에 보급되면 왜인이 이를 배워갈까 우려했기 때문이었다.359) 세종 13년 6월의 개정 때에 하삼도지방을 상공으로 하지 않고 ‘차인자취’하되 특히 변두리의 각 관에서만 행하게 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이러한 경향은 더욱 강화되어 갔다. 즉 세종 14년 2월 왕이 염초의 부족이 火藥習放을 크게 저해함을 우려하여 그 증강책을 묻자, 贊成 許稠와 判書 申商이 왜인이 많이 살고 있는 하삼도보다 북쪽 멀리 동서 양계에서 자취하자고 제안한 사실을 통하여 알 수 있다.360) 또 세종 17년 5월에 柳漢은 이미 실시되고 있는 평안·황해·강원 3도의 상공마저 철폐하고 藥工을 보내어 직접 자취를 감독하게 하며 몇 사람의 관계인사 외에는 결코 기술을 배우지 못하도록 할 것을 주장하였다.361) 왜인에게 전해질 것을 두려워해서 취한 禁秘策은 이후에도 변함없이 계속되었는데, 이는 조선 화기의 기술발달과 생산증가를 크게 저해하고 억압한 중요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세종 13년 6월 각 도에 나누어 정한 염초의 수량을 개정한 이후 지방에서의 염초자취량이 3,000근에서 1,500여 근으로 줄고, 개정 당시에 외방에서 구운 것을 제외하면 1년에 1,000근이 차지 않는다고 한 것으로 보아 당시 중앙의 자취량이 약 1,000근, 모두 합하여 2,500여 근이었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당시의 수요를 충족시키기에 부족하였다. 염초와 화약은 화기에 사용되는 외에 火戲에도 적지 않게 소비되었으므로, 화희의 폐지 내지 간소화를 통한 절약이 주장되었다. 한 번의 화희에 소요되는 염초량이 1,000여 근에 달하였는데, 이는 당시 중앙에서의 1년 생산량과 맞먹었던 만큼 함부로 소모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에 세종 13년 12월 을묘에는 許稠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서 앞으로는 명나라 사신에 대한 화희도 극히 소규모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와 아울러 1년 후인 세종 15년부터는 연례로 제야에 행해지던 화희의 염초 소비량을 종전의 1,000근에서 30근으로 줄이도록 조치하였다.362)
한편 염초자취의 보급에 따라 국가통제에서 벗어나 은밀히 자취하는 사람이 생겼다. 이에 병조는 세종 5년 5월 사사로이 염초를 사용하는 것을 금하고 이를 어기는 사람은 私鹽律에 따라 벌할 것을 청하여 허락받았다.363) 10년 후인 세종 15년(1433) 11월에도 염초로 구슬을 구워 파는 것을 금지하였다.364) 당시 염초로 彩玉·靑珠·水精·靑色白珠·靑瓦 등을 燔造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서울과 지방의 工人들은 사사로이 염초를 자취하여 채옥 등을 만들어 판매함으로써 이익을 취하였다. 그러나 이는 염초가 원래 국방에 중요한 물건이었을 뿐 아니라 硝土의 부족을 더욱 부채질할 것이므로 국가에서 엄중히 금단하였고, 이로써 官營아닌 民營에 의한 염초자취기술의 발달은 억제되었다. 물론 수공업자와 상인들의 이익과 직결되는 문제였으므로 禁令이 쉽사리 이행되지는 않아, 세종 5년과 15년에 똑같은 조치가 되풀이되었으며 그 후에도 전혀 없어지지는 않았던 듯하다. 그러나 만약 이와 같은 금령이 없었다면, 염초자취 및 채옥번조 등은 여러 공인에 의하여 자유로이 성행하게 되어 기술상 커다란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염초자취와 아울러 하나 더 생각할 것은 화희 및 放砲의 성행과 화약성능의 향상이다. 화기 전래 이래 행해져 오던 화희는 세종대에 들어서서도 연말연시 행사로, 혹은 국왕의 일시적인 취향으로, 또는 외국사신에 대한 과시물로 여전히 성행하였다. 방포는 원래 鑄造시험이거나 사격훈련이었을 것이나 가끔 본래의 목적을 벗어나 진기한 완상대상으로 행해진 듯하다. 이리하여 강변놀이의 일종으로, 궁중에서 사신에 대한 과시물로, 혹은 왕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하여 밤중에 행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이 문제에 관하여 특기할 것은 명나라 사신에 대한 화희 및 방포연 시비와 이를 통하여 엿볼 수 있는 화약성능의 비약적 향상이다. 明使의 觀火는 태종 말기부터 시작되었고, 세종대에 들어서면 왜·야인은 거의 보이지 않고 명의 사신이 주로 등장하게 된다.365) 그 이유는 태종말 이전에는 중국 것에 비해 화약의 성능이 훨씬 떨어져 화희로 명사에게 아무런 위압감도 주지 못하였으므로 보이지 않다가, 그들에게 우리의 화희를 보여도 좋을 만큼 화약성능의 발달에 자신이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366) 그리고 세종 13년말경부터 명사에 대한 화희를 거절하려고 한 까닭도 역시 우리 화약성능의 비약적 진보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에 있어서 가장 강경한 태도를 취한 허조는 그 이유로 화약의 절약과 아울러 우리의 放火의 맹렬함이 중국보다 뛰어나므로 사신에게 보여주지 말아야 하며, 중국에서 변란이 있어 우리 화약을 귀하게 여겨 구한다면 처리하기 어렵다고 하였다.367) 이처럼 당시 우리 화약은 실로 본고장인 중국에서 구해갈 만큼 우수한 성능을 지니고 있었다.
이와 같은 실정이었으므로 화약의 관리 또한 보다 신중하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종 9년 7월 갑오에 이조는 軍器監 업무 중 가장 긴요한 화약의 監掌을 위하여, 祿官 2인을 임명하되 능력있는 자이면 오랫동안 근무하도록 하였다. 또 세종 13년 10월 병오에는 화약고가 市街 안에 있어 화재의 우려가 있으므로 한적한 곳에 옮기기로 결정하고, 동왕 17년 2월에 이르러 昭格洞에 옮겨 세웠다.
357) | ≪世宗實錄≫권 19, 세종 5년 정월 신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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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8) | ≪世宗實錄≫권 34, 세종 8년 12월 임신. |
359) | 위와 같음. |
360) | ≪世宗實錄≫권 34, 세종 14년 2월 임인. |
361) | ≪世宗實錄≫권 68, 세종 17년 5월 임진. |
362) | ≪世宗實錄≫권 50, 세종 15년 2월 계축. |
363) | ≪世宗實錄≫권 20, 세종 5년 5월 신축. |
364) | ≪世宗實錄≫권 62, 세종 15년 11월 신축. |
365) | 明使의 觀火는 세종 원년 정월에 명의 사신 劉泉의 요청에 의하여 베푼 火柵(火山臺)을 비롯하여, 동왕 11년 이후 빈번히 행해졌으나, 동왕 13년 이후에는 이를 거절 내지 축소하였다. |
366) | 화희를 참관한 명의 사신이 “甚奇之讚服無已”, “火發 或樂或驚 起入復出者再”했다는 표현과 아울러 그들이 세종 11년 이후 火藥·發火·蒺藜砲 등 우리의 화기를 계속 구해가려고 애쓴 사실은 그러한 추측을 뒷받침해 준다. |
367) | ≪世宗實錄≫권 53, 세종 13년 10월 병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