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화기개량 및 발명
세종 전기의 화기발달에서 주목되는 또 하나의 현상은 화기의 개량 및 신발명이다. 이에 대해서는 碗口의 개량, 火㷁名의 변경, 發火의 출현, 信砲의 사용, 小火砲·相陽砲의 출현 및 鐵彈子의 사용 등을 들 수 있다.
완구의 개량은 對馬島敬差官 李藝가 세종 즉위년 8월 자신이 대마도에서 돌아올 때 그곳에서 水鐵로 주조한 중국식 화통완구를 가지고 와서 종래 銅鐵로 주조하던 우리의 완구를 개량하자고 주장한 것에서 비롯되었다.368) 완구는 대·중·소 20位(門)를 주조하였는데, 당시까지는 주조재료로 우리 나라에서는 산출되지 않는 동철만을 사용하였으므로 쉽게 만들지 못하던 것을, 수철로 주조하는 중국식 기술을 도입하여 여러 州鎭에 널리 分置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후 상당한 시일을 두고도 수철의 性强不堅한 질을 극복하여 화기를 쉽게 주조할 수는 없었다.
화통명의 변경은 세종 5년 정월에 병조가 아뢴 바에 따른 것이다. 즉 이제까지는 본국에서 주조한 소화통도 전래 당시의 이름, 즉 唐에서 전래한 소화통이란 뜻에서 이름붙인 ‘唐小火㷁’을 그대로 따르고 있었는데, 이 때 125자루를 새로 만든 것을 계기로 ‘唐字’를 없애고 ‘소화통’으로만 부르도록 하였다.369) 물론 이는 단순한 명칭의 변경만으로도 볼 수 있으나, 다같이 본국에서 만든 것인데도 먼저 주조한 소화통을 이 때 새로 만든 소화통과는 구별하여 ‘중소화통’이라고 호칭하자고 한 데에서, 기술상의 개량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 기술상의 개량이란 바로 중국 것에서 탈피하여 우리의 독자성을 발휘하려는 노력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발화에 관해서는 세종 8년(1426) 7월 명의 사신 尹鳳의 청에 따라 蒺藜砲와 더불어 大·中 발화 각 10개를 주었다는 기록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370) 이후 발화는 명사의 청구 대상물품으로 烟臺備置 내지 軍陣用으로 빈번히 기록에 보인다. 이미 발화는 고려 중엽에 편성된 別武班의 한 부대명으로 나타난 바 있는데, 그것이 조선의 발화와 어떻게 관련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위의 기록으로 화기로서의 발화가 이미 그 이전부터 출현하였고 그 종류 역시 대·중·소의 3가지였음을 알 수 있다.
信砲는 세종 7년 11월에 확실한 기록이 처음 보인다. 군기감으로 하여금 광주성·신도성·백악에 군사를 나누어 보내서 신포를 쏘아 포성이 멀고 가까움을 실험하였다는 것이다.371) 신포가 언제 처음 출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미 당시에 신포가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그 포성이 箭串坪(현재의 서울 纛島坪 일대)에서 동쪽으로는 廣州山城, 서쪽으로는 北岳까지 각 20리 정도에 이르렀던 모양이다. 신포는 당시 野人의 서북변경지대 침습에 대비하는 신호용으로 烽烟·角聲과 더불어 크게 유효하였던 까닭으로, 세종 10년부터 각 도에 분급되었다. 그 후 적의 침입을 살피기 위해 쌓아올린 연대에는 반드시 소화포·발화 등과 더불어 신포를 갖추었고, 나아가 연대의 간격은 ‘烟火相望’과 ‘信砲聲相聞’을 기준으로 정하였다.
소화포는 세종 8년 7월에 120개를 慶源 등에 보냈고,372) 동왕 14년 2월에는 북방의 연대에 신포와 더불어 비치하도록 했다는373) 기록을 통해 그 출현을 알 수 있다. 소화포가 어떤 종류의 화기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명칭으로 보아 휴대에 간편한 소형 화기로 생각된다. 그것은 守城보다는 行陣間의 공격무기로 쓰였을 것으로 짐작되며 서북변경에서 많이 쓰여졌다는 점과 아울러 생각할 때, 그 후의 적극적인 야인정벌과 관련되는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相陽砲의 출현이다. 이에 대해서는 세종 13년 5월 吉州 사람 朱天景이 弓弩와 더불어 상양포법을 잘 알고 있으므로, 군기감에 불러 올려 작은 모형을 만들어 시험한 기록이 유일하게 남아 있다.374) 그러나 모형으로서의 시험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고, 더욱이 주천경이 궁노와 더불어 상양포법을 잘 안다고 하였는데 혹시 화기류가 아닌 弩機의 일종에 불과하였는지도 모른다.
다음은 화포의 개량 및 발명과 더불어 彈子가 발달하였다. 세종 7년 정월에 전라도감사가 唐小鐵彈子 1,578개, 次小철탄자 616개와 天字철탄자 1,104개를 새로이 주조하여 진상하였다.375) 우선 3종의 탄자가 모두 철탄자라는 점이 주목되고, 차소철탄자는 어떤 것인지 추측키 어려우나, 당소철탄자는 당소화통과 같이 중국에서 전래한 그대로의 탄자로 보인다. 이에 대하여 천자철탄자를 새로 만들었음은 확실히 새로운 기술발달의 산물이라고 생각된다. 더욱이 이보다 2년 전에 당소화통의 개칭도 있었으므로 이러한 추측이 가능하지 않을까 한다. 또 세종 14년 12월에는 서북변경지방에 皮翎箭 및 철탄자를 보내는 것이 좋은지 여부를 묻고 있으므로, 이후 철탄자가 널리 유포되어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철탄자의 등장은 이제까지의 발사물이 箭類나 石彈類가 주류였던 만큼 이후의 화기성능에 커다란 발달을 가져왔을 것이다.
이러한 개량과 진보로 화포는 그 위력이 한층 증강되어 세종 12년 6월에는 무기 중 가장 중요시되었으며,376) 동왕 15년 정월에는 放射法도 개량하여 화포 준비인과 발사인을 구분하였다. 이로써 守城에만 주로 쓰이던 화포가 ‘攻城陷陣’·‘臨敵破陣’ 등에 적합한 利器의 위치에까지 도달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