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개인비법기의 종말
최해산의 활동이 중단되고 많은 기술자가 새로이 등장함에 따라 세종 14년경을 고비로 최해산의 個人秘法時代는 끝이 났다. 최해산이 없이도 화기의 발전이 계속될 정도로 그 기술이 보급되었던 것이다. 기술의 보급으로 최해산의 지위는 떨어졌지만, 父傳의 비법을 遺失하지 않고 자신이 물러서도 좋을 만큼 많은 사람에게 전파·발전시켰던 것은, 그에게 부과된 역사적 사명일 것이며 그가 남긴 공이다.
최해산은 세종 전기에도 홀로 기술상의 우위를 점하고 있어 여러 가지 특전을 누렸다. 세종 2년에는 大護軍職에 있었으며 세종 6년말에는 이미 군기감의 최고위인 判事의 지위에 이르렀다. 세종 7년 이후의 사정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그 지위에는 변동이 없었을 것이다. 그 후 세종 13년 여름에 이르러 그는 左軍同知摠制로 임명되었지만, 역시 군기감 제조의 책임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그를 군기감 제조에서 교체하라는 건의가 나오게 되어 약 반년 후인 세종 14년 3월에는 공조 右參判으로 옮겨졌다. 그 해 4월 18일에는 判鏡城郡事로 멀리 함북지방에 나가게 되었으나, 22일에 왕이 그의 지방 근무를 재차 고려하도록 종용하여 곧바로 中樞院副使가 되어 서울에 머무를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군기감에서의 지위와 비중은 거의 부인되고 만 것 같다. 세종 14년 4월에 이루어진 그의 지방근무에 관한 논의에서 黃喜와 孟思誠 등은 “本監(군기감)에서 藥匠이 이미 그 기술을 익혔으니 최해산이 비록 1, 2년 지방에 가 있더라도 큰 폐해는 없을 것”382)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논의는 화약에서 최해산이 지니는 비중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화약기술의 보급과 신진의 배출에 따라 그의 비중이 약해지고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화기제조기술의 전래 이후 약 60년간 오로지 최무선 부자에 의하여 이어지던 비법은, 이제 여러 장인에게 전승됨으로써 새로운 비약과 획기적 발전의 터전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세종 15년 2월 제1차 야인정벌(婆猪江役) 때에 左軍節制使로 출정하였다가383) 主將의 명령을 어기고 전과를 올리지 못하여 그 해 5월 파직되었다. 그가 당시 출정 장군으로서 범한 죄과는 실로 파직으로 그칠 성질의 것이 아니어서 사헌부에서 여러 차례 치죄를 청하였으나, 왕은 그가 20년 동안 화포를 오로지 관장한 공로를 들어 허락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곡절을 겪으면서 세종 15년 9월에 一發多箭砲의 발명에 따른 수상자 명단에서는 이미 최해산의 이름을 찾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邊尙覲 한 사람만이 군기감을 관장하여 걱정된다는 우려가 나왔다.384)
<許善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