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화기주조의 증가와 방사군의 강화
화기 주조가 증가했음을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기록은 없다. 대체로 태종대까지는 그 주조자료를 廢寺의 廢鐘이나 관아의 깨진 銅器 등을 이용한 것 같다. 그러다가 세종대에 들어서면 倭人 銅鐵匠의 入來, 수철화기로의 改鑄, 왜국 동철의 貿入, 왜인의 동철과 유황의 헌납, 본국 동철생산의 증가, 군기감 납입 正鐵數의 확보 등 주조기술과 자료에 대해 획기적인 조치가 취해졌다. 특히 왜인의 동철·鉛·유황의 헌납은 무역량의 증대를 목적으로 하는 그들의 계략과 관련이 있겠지만, 세종 즉위년부터 시작하여 5년 이후 10년 말경까지는 실로 놀랄 만한 양을 도입하였다. 여기서 당시 성행하던 제기주조와 더불어 화기주조의 증가를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放射軍의 강화와 관련하여 別軍 관계의 기사가 많이 나타난다. 별군이 다른 역(樂工)으로 대용된다든지, 그 수가 1,000여 명을 넘나든데 불과하였다든가, 그들이 다른 역에 많이 종사함으로써 화포발사법을 제대로 습득하지 못한 점에서는 태종 때의 추세가 그대로 계속되는 것 같다. 그러나 세종 12년 6월 忠淸道都節制使의 牒呈에 의거하여 호조가 아뢴 바에 따라 각 도의 本營에는 10인 이상, 管下 浦鎭에는 數人의 화포방사군을 반드시 두도록 하였다.381) 이 때의 조치를 계기로 당시까지 경상도를 빼고는 방사군이 본영에 한명 정도 있고, 진·포에는 전무한 상태에서 벗어나 방사군이 한 명도 없는 진·포는 사라진 듯하다.
또 서북변경인에게 화포방사법을 적극적으로 보급시켰다. 그리하여 서북 赴防軍 중 强勇者는 火器習放을 익히게 되었으며, 경원 등에서는 관노까지 이를 배웠다 하니, 방사군의 증가와 이에 따른 기술의 향상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이미 언급한 세종 15년 정월의 放射術 개량도 이와 같은 배경하에서 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세종 전기의 화기발달은 일정한 한계를 지닌 것이었다. 우선 세종 7년 11월 箭串川邊에서 放砲했을 때, 화포에 의한 甲冑 관통의 깊이는 화살의 그것과 비슷하였다. 또 화포는 세종 15년 당시까지 대체로 守城用으로 쓰이는 정도였으며, 방사를 맡은 별군이 악공 등 다른 역에 많이 동원되어 별군으로서 화통의 粧變과 接箭放射法조차 모르는 자가 많았다. 그러나 화기가 출현한 처음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화살을 쉽게 누르지 못했으며, 특히 세종 7년의 試放은 세종 전기 중에서도 초반기에 속한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또 화기이용의 부진은 방사술이 발달하지 않은 데 연유한 것이고, 화기자체는 발달되어 있었다. 그리고 방사술도 이 때에 이르러서는 수성에만 그치지 않고, 광야에서도 이용할 수 있도록 개량되어 갔다. 별군이 다른 역에 종사한 것은 근본적으로 조선왕조의 군사 내지 역역체계의 모순에서 오는 것으로, 별군에만 한정된 현상이 아니었으며 세종 15년(1433)에는 별군을 다른 역에 사역시키지 못하도록 하였다.
381) | ≪世宗實錄≫권 48, 세종 12년 6월 기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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