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박연의 율관제작
음악이론의 학문적 연구는 樂學의 주요 임무였는데, 세종대에는 樂學別坐 朴堧이 율관제작에 직접 관여했다. 박연은 세종 7년 해주산 기장 한 알의 폭을 1分으로 삼았고, 열 알의 길이를 1寸으로 삼았으며, 9촌을 황종율관의 길이로 삼아서 黃鍾尺을 만들었다.478) 제1차로 제작한 황종율관의 소리가 중국 編磬의 황종음보다 조금 높았기 때문에, 실제로 악기제작에 쓸 수 없었다. 그후 박연은 두번째로 중국편경의 황종을 표준으로 삼아 세종 9년 그 황종율관을 三分損益하여 12율관을 제작했으므로, 제2차 율관제작의 성공 이후 악기제조가 시작될 수 있었다. 세종 12년에는 남쪽지방에서 생산된 기장으로 박연이 세번째 율관제작을 시도하였다.
478) | 李惠求,<朴堧의 律管製作 年代>(앞의 책), 300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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