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악기도감과 주종소
악기제조를 위해서 임시로 설치했던 樂器都監이 세종 6년에 설치됨으로써 아악부흥의 작업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그 때 많은 아악기들이 제조되었고,479) 세종 12년 9월에 설립된 樂器監造色에서도 아악기를 제조하였다.480) 아악기의 제조가 본격화되었지만, 특수한 아악기의 제조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졌다.
아악기 중 가장 만들기 어려운 악기가 編鐘과 편경이었는데, 그 이유는 편경의 재료인 磬石을 구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세종 7년 당시 석경이 한 틀밖에 없었고, 나머지는 흙을 구어서 만든 瓦磬이었으므로, 편경제작은 필수적이었다. 다행이 세종 7년에 발견된 남양의 경석으로 편경제작이 가능하게 되었는데, 악학별좌 박연의 감독 아래서 석경 12매짜리의 편경이 세종 9년 5월에 완성되었다.481) 그 이듬해 여름까지 종묘·영녕전 등의 제사에서 사용될 편경과 특경 모두 528매가 제작되었는데,482) 이 경석 528매는 16매까지의 편경 33틀을 만들 수 있는 숫자였고, 12매짜리의 편경 44틀을 만들 수 있는 숫자였다. 그러므로 종묘·사직·풍운뢰우·선농·선잠·우사·문선왕묘에서 필요한 편경을 세종 10년(1428)에 구비할 수 있었다. 그러나 편종제작은 편경이 갖추어진 이후에야 시작되었다. 편경과 짝을 이루는 편종제작도 쉬운 일이 아니었으므로, 편종제작을 위한 임시관청인 鑄鐘所가 세종 11년에 따로 설립되었는데, 그 다음해인 세종 12년에 주종소에서 제작한 편종을 악학제조 柳思訥이 세종대왕께 헌정하였다.483) 또 조회의 헌가에 사용될 편종을 같은 해 10월에 주종소에서 제작하자, 악학별좌 南汲이 그 편종을 임금께 올렸고,484) 회례연에 쓰일 편종은 세종 13년에 주종소에서 완성되었다. 이렇듯 주종소의 설립 이후 많은 편종이 제작되었기 때문에, 아악이 본격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