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제례아악의 정비
조선시대의 제사는 규모에 따라서 大祀·中祀·小祀로 구분되었다. 종묘·영녕전·사직은 대사에 속했으며, 중사에 드는 제사는 풍운뢰우·선농·선잠·우사·문선왕묘였고, 마조와 명산대천은 소사에 들었다. 대사 중에서도 종묘는 가장 중요시되는 제사였으므로, 새 왕조의 건국과 함께 종묘악장이 개작되었다. 그렇지만 원구·사직·문선왕묘의 악장은 태조 4년(1395)에도 그대로 사용되었고,496) 선농의 악장은 태종 원년(1401)에 비로소 제정되었다.497) 종묘제례악은 고려왕조의 것을 그대로 답습하는 전통이 세종 초기까지 전승되었음은 세종 12년(1430)에 올린 박연의 상소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498) 세종초 종묘제례악을 포함한 제례아악의 문제는 등가악과 헌가음악이 陽律과 陰呂이론에 어긋났다는 점이었다.499) 따라서 세종대의 아악정비는 필수적이었는데, 그 결과는 네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元 林宇의≪釋奠樂譜≫의 악곡을 바탕으로 삼았고, 둘째 등가의 음려와 헌가의 양율을 정립했으며, 셋째 등가악현에 편종과 편경을 추가시켰고, 넷째 종묘의 영신과 헌가악에서 악장을 사용한 점이다.500)
아악의 정비 때 임우의≪석전악보≫이외에 주희의≪의례경전통해≫가 중요한 문헌의 하나로 사용되었다.501) 아악정비 이전의 종묘제례악에서 無射宮이 등가와 헌가에 모두 사용되었으나, 등가에서는 음려인 夾鍾宮을 쓰게 했고, 헌가에서는 양율의 하나인 무역궁을 사용하도록 정비하였다. 또 종묘제례악을 위시하여 사직·원구·선농·선잠 등의 제례악도 양율과 음려에 맞도록 정비하였다. 등가악현에 편종과 편경이 추가된 점 이외에, 헌가에 晉鼓와 路鼗를 첨가시킨 것이 아악정비의 한 특징이었다. 이렇게 정비된 제례아악 중에서 종묘제례악의 등가악현과 헌가악현을≪세종실록≫에서 옮기면 아래와 같다.502)
이 때 정비된 제례아악의 틀은 대체로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크게 변천하지 않았다. 다만 종묘제례악만이 세조 때 바뀌어 세조 9년(1463)부터는 제례의식에서 연주되던 아악 대신에 보태평과 정대업이 제례악으로 연주되었으며, 그 전통이 현재까지 국립국악원에 전승되고 있다.
요컨대 세종대에 정비된 아악 중에서 조회아악과 회례아악은 세종 이후에는 연주되지 않았지만, 제례아악의 전통은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다. 제례아악 중 종묘제례악은 세조 때 보태평과 정대업으로 바뀐 이후 그대로 전승되고 있고, 문묘제례악도 현재까지 연주되는 귀중한 문화유산의 하나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비록 세종대의 아악부흥이 중국문헌을 바탕으로 삼은 것이지만, 한국사람에 의한 창조적 재현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아악의 창조적 재현은 한국음악사의 발전을 이끌어간 한민족의 창조역량 중 외래음악의 자주적 수용능력의 한 결실이라는 점에서 그 음악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