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관아의 시설
경복궁이 완공되자 정문인 광화문 남쪽으로부터 黃土峴까지 대로가 열리고, 대로 좌우연변에 의정부를 비롯한 三軍府, 六曹, 司憲府 등의 관사가 태조 4년(1395)에 세워졌다.665) 官衙는 衙舍·公廨라고도 하는데, 정치·경제·행정과 교육·의례에 소용되는 온갖 유형의 건물이 필요하였으므로 수도뿐만 아니라 전국 각 지방 고을마다 건설되었다. 관아는 신축되기도 하고 고려 이래의 옛 건물이 그대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한양에는 고려 때의 南京 離宮을 비롯하여 창덕궁을 지은 터전에 있었던 향교 등 전대의 건물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훼철되었고 새 왕조에 소용되는 관아들이 새로 지어져 태조 7년경에 일단락되었다.<新都八景> 세번째 폭의 列署星拱은 그런 관아의 즐비한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666)
태종 때 완성된 행랑으로 도성의 면모가 달라지고 필요에 따른 시설이 추가로 건설되어≪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보는 바와 같은 공해가 완성되었다. 행정조직 세분화에 따라 6조에만도 수많은 예하 관공서가 생기고 관아건물이 신축되었다.667) 또 창덕궁 등 임금의 時御所 부근에 일종의 분소인 朝房이 설치되었다.668)
당시 관아건물이 어떤 구조였는지 알아내기는 힘들다. 기록이 단편적이고 임진왜란으로 거의 소멸되어 유구가 잔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러는 초기에 구조된 것이 중도에 폐지되기도 하였다. 그 예로 태조 4년 경복궁 광화문 밖 서편에 지은 종각을 들 수 있다. 세종은 이를 동서로 5칸, 남북으로 4칸 규모의 樓로 고쳐 짓고 종을 달아 아침·저녁으로 시각을 알리게 했다. 세조는 큰 종을 주조하여 괘종하였다. 한편 태종은 종묘 앞에 다락집을 지었다. 이들 중 일부는 후대에 이르러 자취를 감추었다.
대부분이 없어지면 곧 다시 重建하되 옛 모습에 방불하도록 하는 일을 존중하였다. 그러므로 후대 기록을 통하여 전대의 형상을 어느 정도 추정해 볼 수 있다. 아주 영성하지만 일부 유구가 남아서 당시를 고찰하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그 중의 한 예가 社稷署이다.
사직서는 사직단을 관리하는 관아로 세종 8년(1426) 6월에 설립되었다.≪社稷署儀軌≫(<그림 1>)669)에는 사직서 관아건물이 배치되어 있는 모습이 수록되어 있다. 遮帳庫·祭器庫와 좌우의 月廊, 중문채가 있고, 남쪽으로 樂工廳, 部將直所가 있고 동향한 정문이 있다. 현재 정문 외에는 없어졌거나 후기에 중건된 것이다. 지금의 위치는 도시계획에 따른 도로의 신설로 이동된 것이지만 좌향을 그대로 둔 채 옮겨진 것이어서 동향한 상태는 원래와 같다. 정문은≪사직서의궤≫ 작성 이전부터 있었고 임진왜란 때 훼손되었어도 옛 제도에 따라 제자리에 중건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데≪國朝五禮儀≫(성종 5년;1474)에 수록되어 있는 社稷壇圖(<그림 2>)에는 사직서가 제외되어 있어 후대의 사직서 관아건물이 초기에도 동일하였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단지 사직단의 유구와 유지가 있어 대동소이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정만이 가능하다.670)
이 밖에 후기의 기록이 남아 있어 옛 모습의 일부나마 짐작해 볼 수 있는 관아가 있다. 그 중에서 형조의 예를 살펴보겠다. 형조의 本衙는 경복궁 광화문 밖 대로 우측에 있었다. 그 북쪽에 병조가, 남쪽에 공조가 있고 서쪽에 律學廳 일곽과 사역원이 있었으며 뒷마당에는 蓮塘이 있었다. 형조 본아의 중심건물은 10칸 규모의 堂上廳事로, 행각 2칸, 茶廚 1칸, 兒房(숙종 39년에 창건됨) 4칸, 행각 3칸, 곳간 2칸, 廚 1칸으로 일곽을 이루었다. 청의 앞뜰에 왼쪽으로 嘉石, 우측에 肺石이 있었다. 이 밖에 형조 본아는 다음과 같은 건물로 이루어져 모두 127칸이었다.
郎官廳事 6칸, 좌우방 4칸, 上直房 3칸 반, 茶廚 1칸
西廊 掌務庫 1칸, 奴婢色庫 2칸, 馬廐 4칸, 廚 1칸, 大門 1칸, 挾門 1칸
南廊 樓上庫 8칸, 樓下庫 8칸, 續案庫 7칸
東廊 續案庫 3칸, 刑房庫 2칸
書吏長房 2칸, 廳 24칸, 靑寫廳 4칸, 詳覆房 2칸
堂上三門 3칸, 郞官中門 1칸, 挾門 3칸, 大門 1칸
그리고 창덕궁 금호문 밖의 朝房의 규모는 다음과 같다.
堂上廳事 3칸, 上房 2칸, 茶廚 1칸
郞官廳事 3칸, 房 2칸, 茶廚 1칸
律學廳事 1칸, 房 1칸, 東門 1칸
書吏廳事 3칸, 房 2칸
大門 1칸, 馬廐 1칸, 厠 1칸, 北挾門 1칸
율학청은 청사 4칸, 방 3칸, 중문 1칸, 좌우공랑 2칸, 대문 1칸의 구조이다. 典獄署는 서린방에 있었는데 그 구조는 다음과 같으며 지방의 刑獄에 비해 규모가 컸다.
廳事 3칸, 房 1칸
書吏長房 2칸, 廳 1칸, 使令廳 3칸, 上直房 1칸, 軍士守直房 1칸
男獄 동 3칸, 서 3칸, 북 3칸
女獄 남 2칸, 서 3칸
獄門 1칸, 大門 2칸, 挾門 1칸, 紅箭門 1칸(이상은≪秋官志≫에 의함).
≪신증동국여지승람≫ 宮室조에 의하면 한성부에 소속된 관아로는 종루와 종각 외에 한성부 본아와 太平館·모화관·동평관·북평관과 용산의 독서당이 있었다. 개성부 궁실조에는 경덕궁과 목청전, 태평관·영빈관이 있다고 하였는데 태평관과 영빈관은 고려시대 건축물을 그대로 이용한 것이다. 이어서 개성부 공해조에는 개성부 本司와 惠民局·군기감·사포서·奉常寺·西籍田이 기록되어 있다.
≪中京誌≫에 의하면 管理營, 保勤堂, 三節軒, 百和堂, 聽候堂, 愼簡亭, 版籍庫, 乃成堂, 貳衙, 平近堂, 日哦軒, 會星軒, 태평관, 분봉상시, 서적전, 司倉, 田籍廳, 平市廳, 전수청, 수미청, 혜민청, 武庫, 工房庫, 훈련원, 禁盜廳, 巡廳 등이 있었다고 한다. 이는 비록 중기 이후의 사정을 기록한 것이긴 하지만,≪신증동국여지승람≫과 중복되는 관아가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초기에도≪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것보다는 더 많은 건물이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경기도부터 다루고 첫머리에 廣州牧을 거론하였는데 客館 동북에 있다고 하는 청풍루·무진정·압구정 등 樓亭 조항만 있고 정작 객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으며 공해의 항목조차 없다. 그런데 읍지에는 231칸의 행궁, 29칸의 左殿, 4칸의 右室, 객사(36칸), 관아(123칸), 향청(16칸), 州司(11칸), 作廳(27칸), 군기청(12칸), 관청(11칸), 종각(6칸), 刑獄(21칸) 등이 실려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관아의 기록이 생략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신증동국여지승람≫만으로는 조선 초기 각 지방의 관아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경기도편에서는 振威縣, 高陽郡, 積城縣, 長湍都護府, 江華都護府에만 궁실조를 두고 객관을 표기하였다. 강화의 경우는 객관 대신에 公衙를 싣고 새로 지은 건물을 설명하였다. 그에 비하여 황해도편에서는 여러 고을의 객관을 보완하여 수록하고 있는데 누락되었던 사실의 보충이었다고 보인다.
객관은 대부분의 고을에 있었고 고을의 핵심이었다. 全州府의 경우에는 도시계획에서 도로망을 객관 위주로 설정하고 바둑판처럼 구획하였다.671) 현존하는 객관은 殿牌(闕牌)를 봉안하는 主舍와 좌우의 翼舍가 본건물이 되는 구조인데 동쪽의 익사를 東軒이라 부르기도 하였던 것 같다.
海州牧의 객관동헌은 원래 태조 7년(1398)에 창건된 것을 성종 6년(1475)에 중건하였다.672) 東西軒으로 되어 있어 현존하는 객관의 기본과 흡사하였음을 알 수 있다.673) 동헌 앞뜰에 여러 칸의 욕실을 짓고 그 아래에 연못을 파 연을 심고 고기를 키웠으며, 동헌 옆에는 鳳地樓를 지어 사신을 맞이하였다.
현존하는 객사는 부속건물이 없어지고 본건물만 남아 있어 그 형용을 다 알기는 어렵지만, 衙舍에 비해 장대하여 고을 건물 중에서 으뜸이었다. 초기의 것이 오늘에 이어진다는 의미에서 후기 객관의 예를 들어 보자. 安城郡의 경우는 객사 동헌 12칸, 대청 6칸, 중문 3칸, 서헌 8칸, 외문 3칸, 행랑 4칸이었고, 龍仁縣 객사는 대청 3칸, 동헌 6칸, 서헌 6칸, 대문 3칸, 서문 1칸이었다. 韓山郡은 동헌 15칸, 대청 6칸, 서헌 6칸, 중대문 9칸, 외대문 6칸, 소중문 2칸이었고, 沃川郡은 璧大廳 3칸, 동대청 5칸, 허헌 4칸이었다. 陰城縣 객사는 동대청 3칸, 벽대청 3칸, 서별실 4칸, 남장랑 4칸, 중문 1칸, 대문 3칸이었고, 永春縣은 전대청 9칸, 동대청 6칸, 토대청 6칸, 남청방 6칸, 문간 3칸이었으며, 瑞山郡은 전패봉안 정청 6칸, 동헌 12칸, 서헌 10칸, 남청방 8칸, 중대청 8칸, 하마대 5칸으로 49칸의 규모였다.
객관에는 樓亭이 부설되는 예가 많았다. 밀양의 객관인 密州館에 지은 嶺南樓가 지금도 자태가 남아 있듯이 경치가 뛰어난 자리를 찾아 지었다. 세조 3년(1457)에 완성한 海州 객관의 廣遠樓나 羅州牧 객관 동편의 撫夷樓 등이 유명한데 鄭麟趾에 의하면, 누정은 노닐며 감상하는 것보다는 정무에 시달린 마음을 달래며 성정을 맑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하였다.674) 그래서 누정도 관아의 한 유형으로 받아들여졌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조선 초기 濟州牧에는 弘化閣·朝天館·右蓮亭·觀德亭·定遠樓가 손꼽힐 만하다고 적고 있다. 그 중 관덕정은 지금도 남아 있다. 이 밖에 제주목의 관아에 대해서는 숙종 때 제주목사를 지낸 李衡祥이 재직시의 지견을 토대로 지은≪南宦博物≫을 통해 자세히 알 수 있다. 여기 나오는 건물은 후기에 보완된 것이라기보다는 전기에도 있었으나≪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누락시킨 것으로 보아야 옳을 것이다. 이 책에 의하면 제주목에는 35칸 크기의 객사 영주관을 비롯하여 18칸의 관덕정, 左衛廊 48칸, 우위랑 56칸, 上衙 37칸, 연희각(東軒) 14칸, 망경루 17칸, 종루 3칸, 율림당 5칸, 愛梅軒 8칸, 우련당 10칸, 홍화각 9칸, 군관청 31칸, 공수 18칸, 영청 30칸, 군뇌청 4칸, 마방 4칸, 별청 3칸, 군기고 14칸, 장춘원 4칸, 화약고 4칸, 장관청 8칸, 향청 12칸, 州司 3칸, 司倉 50칸, 군향고 17칸, 貳衙 47칸, 운주당 9칸, 군관청 8칸, 作廳 7칸, 형옥 21칸 등이 있었다.675)
중기 이후에 편찬된 각 고을의 현존하는 읍지에 의하면, 아주 규모가 작은 산곡간이나 해변의 고을일지라도 객사와 衙舍가 있었고 鄕廳과 作廳, 鄕射堂, 훈련원이 함께 있는 수도 많았다. 규모가 크거나 감영·병영·수영과 같은 곳에는 대단위의 건축군이 집결되어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조선 초기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등에서는 종종 治地가 합당하지 않아 다른 곳으로 移邑한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이 때에는 읍내의 제반 건물이 새로 들어서게 되어 큰 역사가 진행되었다.
객사 등의 修治나 重新 등의 기록 등에서는 凉廳과 燠室이 구비되었음을 언급하고 있으며 제주목의 홍화각에 구들시설이 되어 있었다. 조선 초기에 이미 마루와 구들 들인 온돌방이 널리 보급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곧 제주도 살림집에도 구들이 채택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구들과 마루의 보급은 관이 주도하였다.
665) | ≪太祖實錄≫ 권 7, 태조 4년 9월 경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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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6) | ≪太祖實錄≫ 권 13, 태조 7년 4월 임인. |
667) | ≪新增東國輿地勝覽≫ 권 2, 京都 下, 文職武職公署. |
668) | 예컨대 刑曹의 朝房은 昌德宮 金虎門 밖에 있었다. 이는 다른 관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
669) | 藏書閣本으로 정조 7년(1783)에 편찬되었다. |
670) | 1985년에 사직단 주변의 간이발굴이 있었다. 6·25사변 이후 퇴락한 것을 다시 옛 모습대로 재현시키기 위한 조사였는데 사단과 직단, 주변의 담장, 유문 등의 구성은≪국조오례의≫ 사직단도나≪사직서의궤≫의 사직단도의 형상과 흡사하여서 초기나 후기의 것에 큰 변동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
671) | <全州城圖>(全州市立博物館所藏). 이<전주성도>는 조선 중기 작품인데, 絹本着色의 八幅大屛으로 작자미상이다. |
672) | ≪新增東國輿地勝覽≫ 권 43, 海州牧 徐居正重新記. |
673) | ≪新增東國輿地勝覽≫ 권 35, 光山縣 宮室 成俔重修記. |
674) | ≪新增東國輿地勝覽≫ 권 36, 咸平縣 樓亭. |
675) | 李衡祥,≪南宦博物≫(韓國精神文化硏究院編,≪古典資料叢書≫ 1, 1979), 148∼150쪽. 이형상은 화원을 시켜 당시의 풍물을 그리게 하고 그것을≪耽羅巡歷圖≫로 편집하기도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