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사전의 건축
(1) 사단의 조영
태종은 11년(1411) 3월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강 南郊에 圜丘壇을 다시 쌓았다. 태조 때 쌓은 단이 협소하여 불편하였으므로, 고려와 송나라 제도를 참작하여 장중하게 조성해 단과 신주, 재궁이 완비되었다.676) 태종은 卞季良에게 제문을 지어 제사지내게 하였는데, 그는 “우리 동방은 단군이 하늘에서 하강한 곳”이므로 당연히 제천단에서 치제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677)
국초에 단군에 대한 논의가 대두되었다. 예조전서 趙璞은 종묘, 籍田, 사직, 산천, 서낭, 문묘 등에 제사할 일과 함께 평양부로 하여금 ‘東方始受命之主’인 단군과 ‘始興敎化之君’인 기자에게 제사지내야 한다고 하였다.678) 또 이조에서는 명산대천·서낭신들을 鎭國伯·啓國伯·護國伯으로 봉하자고 하였다.679) 태조는 한양으로 천도하자 백악산을 진국백, 남산을 목멱대왕으로 봉하였다.680) 이에 따라 태종은 송악서낭신에 주던 녹봉을 백악서낭신에게로 돌렸다.681)
국가에서 大祀를 받드는 제천단 외에 중·소사를 받드는 雩祀·풍운뢰우·선농·선장단·靈星·노인성·司寒·馬步·厲壇 등이 조성되었다. 이 중 여단은 사직단·서낭당과 함께 지방 고을마다 설치되었다. 풍운뢰우단은 사방 2장 3척, 높이 2.7척이고 사면에 돌층계를 쌓았다. 바깥둘레에는 낮은 담장 壝를 한겹 축조하였는데 1면의 길이가 25보, 환구단의 세겹 유 중에서 제일 안쪽에 쌓는 담장 길이와 같게 하였다. 영성단은 높이 3척, 동서 길이 1장 3척, 남북 길이 1장 2척, 사방의 계단, 유 한겹 길이 25보의 규모였다.682)
도성 사직단은 태조 4년(1395) 정월에 착공하여 곧 준공하였다.≪국조오례의≫에 의하면 社는 동쪽에, 稷은 서편에 있는데, 두 단의 사면은 2장 5척이고 높이는 3척, 사방에 계단이 있었으며 3급식이었다. 이는≪신증동국여지승람≫의 규격에 대한 기록과 부합하고 현존하는 유구를 실측해 보아도 별 차이가 없다.683) 세종 때 집현전에서 사직단이 좁으므로 개축하고 周尺을 營造尺으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하였으나 세종은 태조 때의 것이 엄연한데 어찌 고칠 수 있느냐고 하면서 유보시켰다.684)
한편 태종은 태조가 정한 유의 바깥을 넓혀 남·서·북은 산기슭에 이르도록 하고 동쪽은 140보를 확보하였다.685) 또 담장을 쌓고 정문을 내 사직서가 경내에 들어올 수 있게 하였다.
사직단 단의 구성은 장대석 세벌대를 약간 되올림하면서 쌓은 것이다. 아래 위의 장대석에 비하여 두벌대의 돌은 무사석만큼 높아졌다. 마치 건물의 기단을 형성하듯이 한 것인데 이는 중국 사직단이 층급을 이루며 조성되어 있는 것과 다른 구조로 조선적인 특색을 지녔다고도 할 수 있다. 이로 미루어 지금은 보기 어렵게 된 다른 祀壇들도 그와 같은 구조였으리라 추정된다.
태종은 즉위한 지 얼마 안되어 좌명공신들과 더불어 馬巖壇에 가서 歃血同盟의 의례를 지냈고,686) 세종 때 朴堧은 환구단 부근에 風師·雨師의 단이 있었다고 하였다.687) 그렇다면 지금은 볼 수 없게 된 구조물들이 당시에는 더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676) | ≪太宗實錄≫ 권 21, 태종 11년 3월 정축. |
---|---|
677) | 李肯翊,≪燃藜室記述≫ 別集 권 4, 祀典典故. |
678) | ≪太祖實錄≫ 권 1, 태조 원년 8월 경신. |
679) | ≪太祖實錄≫ 권 3, 태조 2년 정월 임술. |
680) | ≪太祖實錄≫ 권 8, 태조 4년 12월 무오. |
681) | ≪太宗實錄≫ 권 11, 태종 6년 정월 무술. |
682) | ≪太宗實錄≫ 권 21, 태종 11년 정월 임신. |
683) | 서울特別市,≪서울社稷壇考證調査 및 復元基本計劃報告書≫(새한建築文化硏究所, 1985), 9∼10쪽 참조. |
684) | ≪世宗實錄≫ 권 57, 세종 14년 9월 병진. |
685) | ≪太宗實錄≫ 권 27, 태종 14년 4월 경신. |
686) | ≪太宗實錄≫ 권 1, 태종 원년 2월 신축. |
687) | ≪世宗實錄≫ 권 83, 세종 20년 12월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