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흥천사 동종
840)이 동종은 세조 7년(1462) 7월에 태조의 후비 神德王后를 추도하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무덤 가까이 있던 흥천사에 있었다가 화재로 광화문으로 옮겨졌고 다시 창경궁을 거쳐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이 동종은 全高 282㎝에, 구경 170㎝에 달하는 거종으로 일체쌍두형의 용뉴를 갖추고 있고 동체에는 사실적인 龍鱗과 꽉다문 입을 박진감 넘치게 처리하였다. 용통을 갖추지 않고 있으며 어깨에는 연화문대를 돌려 장식하고 있다.
상대는 어깨띠와 좀 떨어진 밑쪽에 太彫一線帶를 돌려 처리하였는데 어깨띠에 돌린 연화대와 상대의 구분이 애매하다. 유곽은 상대와 약간 떨어진 위치에 사다리꼴의 유곽에 9유를 갖추고 있고 일정한 간격으로 4곳에 배치하였는데 유곽의 내외 구획대에는 평행쌍선으로 唐草紋을 양각하였다.
유곽과 유곽 사이에는 양각된 입상의 보살상 4구가 배치되었는데 원형 두광에 寶冠을 갖추고 天衣를 걸치고 있으나 모두 선조로 되어 있다.
종신 중앙에는 태조1선대를 가운데 두고 상하에 가는 선대를 돌려 三條線帶를 갖추고 종신 중간을 장식하고 있다. 종신의 하부에는 당좌를 비롯한 별다른 조식이 없으며 하단에서 상당히 떨어진 윗쪽에 간격 13㎝를 둔 태조2선대가 돌려지고 그 안쪽에 평행좌상문과 卷雲文이 배열·양각되어 종신 하부를 장식하고 있다. 이 좌상권운문대와 종신 중앙의 3조선대와의 사이에는 아무런 조식이 없고 종신을 일주하듯이 해서체의 명문이 가득차 있다. 이 명문에는 “天順元年壬午”라고 하여 제작연대가 밝혀져 있고 제작참여자들도 나타나 있다. 즉 監鑄에는 都提調에 孝寧大君·臨瀛大君·永膺大君을 비롯하여 提調·副提調의 職名과 성명이 밝혀져 있고 이 밖에도 동종을 만드는 데 직접 관계된 郎廳·監役·鑄成匠·爐冶匠·注匠·彫刻·木手·水鐵匠·刻字·使分 등 여러 관계자들의 직종과 성명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의 동종을 제작하는 데 필요한 직제관계자 범위와 직분 등의 실상을 알 수 있다.
840) | 鄭永鎬,<한국銅鐘의 특성과 樣式변천>(≪韓國의 美 23:金屬工藝≫, 中央日報 季刊美術社, 19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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