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조선 시대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Ⅰ. 임진왜란4. 왜란중의 사회상3) 항왜와 부왜·부로(2) 부왜·부로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1. 왜란 전의 정세
          • 1) 교린정책과 왜변
          • 2) 일본의 국내정세
          • 3) 조선의 국내정세와 군사준비 실태
        • 2. 왜란의 발발과 경과
          • 1) 왜란의 발발
          • 2) 의병의 봉기
          • 3) 수군의 승첩
            • (1) 임란 전의 해방체제와 전라좌수군
            • (2) 초기 해전의 승첩과 전과
            • (3) 조선 수군의 승리 요인
          • 4) 명군의 참전과 전세의 변화
            • (1) 참전의 배경
            • (2) 제1차 평양성전투와 그 영향
          • 5) 조·명군의 반격과 전국의 추이
            • (1) 조선 관·의병의 활약
            • (2) 명군의 평양승첩과 전후의 행동
        • 3. 강화회담의 결렬과 일본의 재침
          • 1) 강화회담의 진행과 결렬
            • (1) 평양수복 전 조·명과 일본의 교섭
            • (2) 평양수복 후 명과 일본의 교섭
          • 3) 정유재란의 발발
            • (1) 조선의 일본재침에 대한 대비
            • (2) 일본의 재침
          • 3) 조·명군의 활약
            • (1) 조·명군의 활동상
            • (2) 조선 수군의 활약
            • (3) 조·명군의 추격전
          • 4) 일본군의 패퇴
            • (1) 조·명연합군의 반격전
            • (2) 조·명연합군의 4로 총공격
            • (3) 일본군의 패퇴
          • 5) 일본의 통교요청과 기유약조
            • (1) 일본의 통교요청
            • (2) 기유약조
        • 4. 왜란중의 사회상
          • 1) 군량미 조달과 농민의 실상
            • (1) 난초의 양식실태
            • (2) 명군 내원 이후의 군량조달
            • (3) 민중의 실상
          • 2) 송유진·이몽학 등의 난
            • (1) 송유진의 난
            • (2) 이몽학의 난
            • (3) 기타 민간반란
            • (4) 반란의 성격
          • 3) 항왜와 부왜·부로
            • (1) 항왜
            • (2) 부왜·부로
        • 5. 왜군 격퇴의 전략·전술
          • 1) 육전
            • (1) 관군의 군령·군사지휘권
            • (2) 전란초의 방어체제
            • (3) 관방설치와 청야책
            • (4) 의병의 지휘권과 전략·전술
            • (5) 훈련도감의 신설과 신병법
          • 2) 해전
            • (1) 해전의 전개
            • (2) 수군의 전승요인
      • Ⅱ. 정묘·병자호란
        • 1. 호란 전의 정세
          • 1) 후금의 흥기와 조선의 대응
          • 2) 숭명정책과 중립 양단외교
        • 2. 정묘호란
          • 1) 후금의 침입과 조선의 대응
          • 2) 강화 성립
          • 3) 의병의 활약
        • 3. 병자호란
          • 1) 재침 전의 조·만관계
            • (1) 정묘화약에 대한 양국의 시각
            • (2) 모문룡과 동강진문제
            • (3) 범월쇄환의 시비
            • (4) 개시와 양국간의 마찰
            • (5) 후금의 압력과 조선의 태도
          • 2) 청의 침입과 조선의 대응
          • 3) 남한산성 수어와 화전양론
          • 4) 의병의 봉기
            • (1) 호남의병
            • (2) 다른 지역의 의병
          • 5) 강화 실함과 남한산성
            • (1) 강화 실함
            • (2) 인조의 남한출성
          • 6) 전후처리와 조·청관계
            • (1) 전후처리문제
            • (2) 반청의식의 고조
            • (3) 피로인 쇄환문제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나. 부로의 납왜와 실상

가) 조선인 부로의 납치

 여기서 말하려는 俘虜는 임진왜란 중 왜군에 의해 강제로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사람을 말한다. 임란 전에도 왜구에 의해 일본으로 납치된 조선인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그것은 간혹 있었던 일이며, 피랍인들은 대개가 무방비 상태에 있던 섬사람 아니면 해변가에 살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7년 동안 자행된 조선인 납치는 그 규모나 성격이 전혀 다르다. 피랍자들 중에는 전쟁포로보다 비전투원인 어린이와 부녀자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상품가치를 추구하는 노예상인들의 의도가 드러난 만행이었다.219)

 조선인의 납치는 임진왜란 때보다 정유재란 때 더 심했다. 趙慶男은≪亂中 雜錄≫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당초 秀吉이 金吾(小旱川秀秋) 등을 출송하는 날에 指令을 하달하기를 해마다 발병하여 저 나라(조선) 사람들을 다 죽여서 저 나라를 텅비게 하라 … 사람은 두 귀가 있으나 코는 하나뿐이다. 코를 잘라 首級의 대신을 삼으라. 코는 각각 一升으로 헤아리게 하고 그런 다음에 生擒함을 허락한다(趙慶男,≪亂中雜錄≫권 3, 정유 7월).

 이와 같은 내용은 정유재란 때 섬으로 피난하다 부로로 일본에 피랍되었다가 3년만에 살아서 돌아온 前佐郎 姜沆의≪看羊錄≫에도 들어 있어 사실임이 입증된다.220)

 부로 피랍의 만행은 조선측 기록에만 보이는 것이 아니다. 정유재란 때 조선에 건너와 전쟁참상을 목격한 倭僧 慶念의 일기에도 매우 충격적인 내용이 들어있다. 즉 일본으로부터 가지가지 장사꾼들이 건너왔는데 그 중에는 인간상인도 건너와 싸움터 바로 뒤를 넘나들며 남녀 노약자를 사들이고 새끼로 목을 묶은 다음 여러 사람을 줄줄이 옭아매고 우마를 끌게 하든가 무거운 짐을 지고 가게하며, 몽둥이를 들고 가혹한 매질을 가했다는 것이다. 또 俘虜人들은 적선에 실려 끌려갈 때 울부짖는 소리가 바다와 산을 진동하는 처참한 모습이었으며, 그 중에는 울다 지쳐 신음하는 소리를 차마 들을 수 없었다고 한다221)

 임란의 7년 전쟁기간 동안에 부로로 납치된 조선인의 정확한 인원수는 알 수 없으나 어림잡아 10만 명 안팎이 될 것으로 추정된다.222) 왜군들은 조선인 을 무차별 납치하였지만 강화교섭이 진행되고 있을 때 풍신수길이 출전 중인 왜장 鍋島直茂(나베시마 나오시게)에게 조선인 細工人과 裁縫女 및 재간 있는 여자를 진상하라는 명령이 있었고 왜장들이 다투어 陶工 노략에 힘썼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일부에서는 조선인을 특수한 목적에서 특정직업인을 납치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왜군 중에는 호색적인 욕구 등으로 미색을 갖춘 조선 여인을 납치하는 예도 있었다.223)

나) 재왜부로의 실상

 일본 본토로 납치된 조선 부로는 대부분 九州·四國과 本州의 中國지방으로 납치되어갔다. 특히 구주의 薩摩·唐津·福岡·小倉과 壹岐·對馬島, 그리고 사국의 伊豫·讚岐·阿波·土佐지방과 본주의 長門·廣島·岡山·姬路·兵庫 등지에 많았고 그 밖에도 紀州지방 등 출진장병의 領地와 大阪·京都·名古屋·靜岡·江戶 등 정치적 도시나 교통요지에 많이 집중되었다고 한다.224)

 일본에 끌려온 조선 부로들은 최악의 조건에서 목숨을 이어가야 했다. 물론 그들 중에는 학문으로 비교적 예우를 받은 자도 있고, 도공으로 끌려와 그 기술을 인정받아 조선에 침략한 왜장들의 영내에서 陶窯를 이루고 도예기술의 전수에 봉사하여 재능을 인정받은 사람도 있었다. 또 여성들 가운데는 德川氏 궁내인 大奧나 諸大名들의 성중에서 굴욕적인 생활을 강요당하면서도 풍요로운 생활을 누린 자도 없지 않았으나 그것은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부로들은 전쟁노예로서의 비인격적 사역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225) 사국의 伊豫州로 끌려온 강항은 大津에 도착했을 때의 정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우리 나라의 남녀로서 전후 납치되어 온 사람이 무려 1천여 명이나 되었으며, 새로 잡혀온 사람들이 조석으로 마을에서 무리를 지어 嘯哭하였다(姜沆,≪看羊錄≫, 見我中封疏).

 이와 비슷한 장면은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다. 정유재란 때 사국의 阿渡州로 끌려온 鄭希得도 그 곳에 납치된 조선 부로인의 정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달밝은 밤이면 다리 위에 모여 혹은 노래 부르고 혹은 서로 부르며, 혹은 회포를 풀고, 혹은 신음하고 슬피 우는 등 이렇게 하다가 밤이 깊어서야 헤어지는데, 그 다리 위에는 넉넉히 백여 명이 앉을 수 있다(鄭希得,≪月峯海上錄≫, 海上日錄 3월 4일).

 그런데 조선인 被擄 문제를 악화시키고 심각하게 만든 데는 일본인과 포르투갈인으로 구성되어 있는 노예상인들의 마수가 작용한 데도 원인이 있다. 왜란중에 세계적으로 악명이 높던 포르투갈 노예상인의 앞잡이로 일인 노예중매인이 전쟁터인 한반도로 건너왔고, 포르투갈 노예선이 조선해안까지 출동했다고 하는 것은 두 나라 노예상인들의 손발이 잘 맞았음을 말해주고 있다.

 천대와 멸시 속에서 노예적 고역을 강요당하던 조선 부로들은 전쟁이 끝난 다음에도 사역을 당하다가 기회가 닿으면 포르투갈 상인에게 노예로 팔려가기 마련이었다. 포르투갈인 노예상과 일본인 노예매매업자들은 왜란으로 조선에서 다수의 조선인 부로를 받아들이고 이를 해외로 방출하여 막대한 이익을 보게 되자 더욱 활발하게 노예매매와 해외 송출을 자행하게 되었으며, 일본인 노예상뿐만 아니라 조선에 진출한 大名들도 노예매매에 간여하여 폭리를 얻게 되었다.

 포르투갈 노예상인들은 전장으로부터 보내오는 조선난민의 男婦幼少를 그들이 일본으로 실어 온 철포와 白絲의 대가로 닥치는 대로 받아들였다. 또 戰陣의 여러 적장 가운데 눈치빠른 자는 처음부터 매각을 목적으로 대량 노략하여 오는 자도 있었다. 심한 예로는 조선 남부에까지 진출하여 직접 사들여 오는 자도 있었다.226)

 조선인 부로에 대한 포악과 혹사 그리고 비인도적 인신매매행위에 대해 양식있는 일부 일본인사회에서 문제가 되었으며, 특히 서양 선교사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일본 키리시땅교회는 종교적·인도적 견지에서 비참한 조선인 부로의 문제에 구제의 손길을 폈다. 즉 종교적 구제의 방법으로 조선인 부로를 교화하여 종교적 구원활동을 전개했으며, 방매되는 조선인 노예들을 사들여 속량시켜 주는 활동을 펴기도 하였다. 또 보다 강경한 대책으로 노예매매 관계자의 破門조치를 결의하고 이를 국적을 초월하여 전가톨릭신도에게 적용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조선인 부로노예의 문제가 국제적인 문제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일본 노예상인과 포르투갈 노예상인의 노예매매를 근절시키지 못했고, 오히려 그들의 반발로 포교활동에 적지 않은 지장을 초래하였다.227)

다) 부로의 쇄환

 일본에서는 풍신수길이 죽은 뒤에 어린 아들 豊臣秀賴(도요토미 히데요리)를 關白으로 삼고 제장이 보좌케 하였으나 실권을 잡고 있던 德川家康은 철병 다음해부터 對馬島主 宗義智를 시켜 강화를 요청하는 사신을 여러 번 보냈다. 선조 32년(1599) 대마도주는 국교재개의 타개를 위한 한 방법으로 부산첨사 李宗城에게 서장을 보내고 阿波城主가 석방한 정희득을 송환해 오면서 화의성립 후의 조선인 부로의 송환을 약속해 왔다. 다음해 2월에는 종의지 등이 수호를 위한 서장을 조선의 예조 등에 보낼 때, 조선정부의 호의를 얻기 위해 柳川 調信家에서 사역하던 부로와 대마도에서 유랑하던 부로 남녀 160여 명을 송환해 왔다. 이에 대해 조선정부는 被擄人 전원을 쇄환해야만 수호에 응하겠다는 강경한 회답을 주었다. 새로운 실권자로 등장한 덕천가강은 그 자신이 왜란출병과 관계없는 인물임을 내세워 수호교섭에 적극성을 보였는데 그것은 통 상상의 이익을 얻기 위함이었다. 조선의 호의를 얻기 위하여 수호요청 사절을 보낼 때마다 피로인들을 송환해 오면서 거듭되는 일본의 요청에 조선정부에서도 수호의 필요성을 내세우는 실용론이 태동하였다. 이러한 입장을 굳혀 준것은 일본으로부터 귀환한 전직관료이며 儒者인 피로인들의 상소와 건의였다. 그들의 공통된 의견은 일본의 재침에 대해 우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일본의 계속적인 수호요청과 귀환피로인들이 전하는 정보와 상소를 통하여 집권세력이 豊臣氏로부터 德川氏로 넘어간 사실과 새 집권세력이 수교의 열의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조선정부에서도 국교재개가 국익에 도움이 되리라는 주장이 강해졌다. 그래서 선조 37년 봄에 孫文彧을 正使로 삼고, 또 난중에 의승군으로 활약이 컸고 담력과 지략이 있던 僧 惟政(泗溟堂)을 동반케 하여 피로인의 쇄환교섭을 이유로 일본에 파송하였다. 이들 일행은 다음해에 伏見城에서 덕천가강의 대를 이은 집권자 德川秀忠(도쿠가와 히데타다)을 만나고 피로인 3,000여 명을 대동하고 귀국하였다. 그 후 대마도주가 다시 대마도 인의 부산교역 허락을 감사해 하며 피로인 1,390명을 송환해왔고, 다음해 선 조 39년에 수호의 빠른 결정을 촉구하면서 부로 120여 명을 또 보내왔다.

 이로써 일본의 화의에 대한 진의는 어느 정도 알 수 있었으나 화의 그 자체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선조 40년 정월에 비로소 첨사 呂祐吉을 정사, 校理 慶暹을 부사, 佐郎 丁好寬을 종사관으로 한 일행 270여 명의 사절을 回答使로 일본에 보내 덕천수충과 회견하고 국서와 토산물을 전달함으로써 왜란후 국교가 회복하게 되었으며 피로인 1,340여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그 후 쇄환사업이 일본측의 비협조와 몰이해로 여의치 않자 조선정부는 부로인 전원의 쇄환을 요구하면서 부로인 쇄환을 위해 회답사 겸 쇄환사의 명칭으로 수차에 걸쳐서 사절을 일본에 파견하였으나 큰 실효는 보지 못하고 수백 명을 쇄환하는 데 그쳤다. 그리하여 일본에 피랍된 조선인 부로의 쇄환인원은 1만 명 미만에 불과하여 전체 10만 명 내외의 피랍자 중 겨우 1할 정도만이 귀환할 수 있었다.

<李章熙>

219)李元淳,<壬辰·丁酉再亂時의 朝鮮俘虜奴隷問題-倭亂性格貌->(≪邊太燮博士華甲紀念 史學論叢≫, 三英社, 1985), 628쪽.
220) 姜沆,≪看羊錄≫, 倭國八道州國.
221) 慶念,≪朝鮮日日記≫11월 19일.
222) 李元淳, 앞의 글, 630쪽.
223) 吳希文,≪鎖尾錄≫권 1, 壬辰南行日記.
224) 李元淳, 앞의 글, 636쪽.
225) 李元淳, 위의 글, 638쪽.
226) 山口正之,<耶蘇會宣敎師の朝鮮俘擄救濟敎化>(≪靑丘學叢≫4, 1931), 21∼22쪽.
227) 李元淳, 앞의 글, 657쪽.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