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부로의 납왜와 실상
가) 조선인 부로의 납치
여기서 말하려는 俘虜는 임진왜란 중 왜군에 의해 강제로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사람을 말한다. 임란 전에도 왜구에 의해 일본으로 납치된 조선인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그것은 간혹 있었던 일이며, 피랍인들은 대개가 무방비 상태에 있던 섬사람 아니면 해변가에 살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7년 동안 자행된 조선인 납치는 그 규모나 성격이 전혀 다르다. 피랍자들 중에는 전쟁포로보다 비전투원인 어린이와 부녀자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상품가치를 추구하는 노예상인들의 의도가 드러난 만행이었다.219)
조선인의 납치는 임진왜란 때보다 정유재란 때 더 심했다. 趙慶男은≪亂中 雜錄≫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당초 秀吉이 金吾(小旱川秀秋) 등을 출송하는 날에 指令을 하달하기를 해마다 발병하여 저 나라(조선) 사람들을 다 죽여서 저 나라를 텅비게 하라 … 사람은 두 귀가 있으나 코는 하나뿐이다. 코를 잘라 首級의 대신을 삼으라. 코는 각각 一升으로 헤아리게 하고 그런 다음에 生擒함을 허락한다(趙慶男,≪亂中雜錄≫권 3, 정유 7월).
이와 같은 내용은 정유재란 때 섬으로 피난하다 부로로 일본에 피랍되었다가 3년만에 살아서 돌아온 前佐郎 姜沆의≪看羊錄≫에도 들어 있어 사실임이 입증된다.220)
부로 피랍의 만행은 조선측 기록에만 보이는 것이 아니다. 정유재란 때 조선에 건너와 전쟁참상을 목격한 倭僧 慶念의 일기에도 매우 충격적인 내용이 들어있다. 즉 일본으로부터 가지가지 장사꾼들이 건너왔는데 그 중에는 인간상인도 건너와 싸움터 바로 뒤를 넘나들며 남녀 노약자를 사들이고 새끼로 목을 묶은 다음 여러 사람을 줄줄이 옭아매고 우마를 끌게 하든가 무거운 짐을 지고 가게하며, 몽둥이를 들고 가혹한 매질을 가했다는 것이다. 또 俘虜人들은 적선에 실려 끌려갈 때 울부짖는 소리가 바다와 산을 진동하는 처참한 모습이었으며, 그 중에는 울다 지쳐 신음하는 소리를 차마 들을 수 없었다고 한다221)
임란의 7년 전쟁기간 동안에 부로로 납치된 조선인의 정확한 인원수는 알 수 없으나 어림잡아 10만 명 안팎이 될 것으로 추정된다.222) 왜군들은 조선인 을 무차별 납치하였지만 강화교섭이 진행되고 있을 때 풍신수길이 출전 중인 왜장 鍋島直茂(나베시마 나오시게)에게 조선인 細工人과 裁縫女 및 재간 있는 여자를 진상하라는 명령이 있었고 왜장들이 다투어 陶工 노략에 힘썼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일부에서는 조선인을 특수한 목적에서 특정직업인을 납치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왜군 중에는 호색적인 욕구 등으로 미색을 갖춘 조선 여인을 납치하는 예도 있었다.223)
나) 재왜부로의 실상
일본 본토로 납치된 조선 부로는 대부분 九州·四國과 本州의 中國지방으로 납치되어갔다. 특히 구주의 薩摩·唐津·福岡·小倉과 壹岐·對馬島, 그리고 사국의 伊豫·讚岐·阿波·土佐지방과 본주의 長門·廣島·岡山·姬路·兵庫 등지에 많았고 그 밖에도 紀州지방 등 출진장병의 領地와 大阪·京都·名古屋·靜岡·江戶 등 정치적 도시나 교통요지에 많이 집중되었다고 한다.224)
일본에 끌려온 조선 부로들은 최악의 조건에서 목숨을 이어가야 했다. 물론 그들 중에는 학문으로 비교적 예우를 받은 자도 있고, 도공으로 끌려와 그 기술을 인정받아 조선에 침략한 왜장들의 영내에서 陶窯를 이루고 도예기술의 전수에 봉사하여 재능을 인정받은 사람도 있었다. 또 여성들 가운데는 德川氏 궁내인 大奧나 諸大名들의 성중에서 굴욕적인 생활을 강요당하면서도 풍요로운 생활을 누린 자도 없지 않았으나 그것은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부로들은 전쟁노예로서의 비인격적 사역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225) 사국의 伊豫州로 끌려온 강항은 大津에 도착했을 때의 정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우리 나라의 남녀로서 전후 납치되어 온 사람이 무려 1천여 명이나 되었으며, 새로 잡혀온 사람들이 조석으로 마을에서 무리를 지어 嘯哭하였다(姜沆,≪看羊錄≫, 見我中封疏).
이와 비슷한 장면은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다. 정유재란 때 사국의 阿渡州로 끌려온 鄭希得도 그 곳에 납치된 조선 부로인의 정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달밝은 밤이면 다리 위에 모여 혹은 노래 부르고 혹은 서로 부르며, 혹은 회포를 풀고, 혹은 신음하고 슬피 우는 등 이렇게 하다가 밤이 깊어서야 헤어지는데, 그 다리 위에는 넉넉히 백여 명이 앉을 수 있다(鄭希得,≪月峯海上錄≫, 海上日錄 3월 4일).
그런데 조선인 被擄 문제를 악화시키고 심각하게 만든 데는 일본인과 포르투갈인으로 구성되어 있는 노예상인들의 마수가 작용한 데도 원인이 있다. 왜란중에 세계적으로 악명이 높던 포르투갈 노예상인의 앞잡이로 일인 노예중매인이 전쟁터인 한반도로 건너왔고, 포르투갈 노예선이 조선해안까지 출동했다고 하는 것은 두 나라 노예상인들의 손발이 잘 맞았음을 말해주고 있다.
천대와 멸시 속에서 노예적 고역을 강요당하던 조선 부로들은 전쟁이 끝난 다음에도 사역을 당하다가 기회가 닿으면 포르투갈 상인에게 노예로 팔려가기 마련이었다. 포르투갈인 노예상과 일본인 노예매매업자들은 왜란으로 조선에서 다수의 조선인 부로를 받아들이고 이를 해외로 방출하여 막대한 이익을 보게 되자 더욱 활발하게 노예매매와 해외 송출을 자행하게 되었으며, 일본인 노예상뿐만 아니라 조선에 진출한 大名들도 노예매매에 간여하여 폭리를 얻게 되었다.
포르투갈 노예상인들은 전장으로부터 보내오는 조선난민의 男婦幼少를 그들이 일본으로 실어 온 철포와 白絲의 대가로 닥치는 대로 받아들였다. 또 戰陣의 여러 적장 가운데 눈치빠른 자는 처음부터 매각을 목적으로 대량 노략하여 오는 자도 있었다. 심한 예로는 조선 남부에까지 진출하여 직접 사들여 오는 자도 있었다.226)
조선인 부로에 대한 포악과 혹사 그리고 비인도적 인신매매행위에 대해 양식있는 일부 일본인사회에서 문제가 되었으며, 특히 서양 선교사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일본 키리시땅교회는 종교적·인도적 견지에서 비참한 조선인 부로의 문제에 구제의 손길을 폈다. 즉 종교적 구제의 방법으로 조선인 부로를 교화하여 종교적 구원활동을 전개했으며, 방매되는 조선인 노예들을 사들여 속량시켜 주는 활동을 펴기도 하였다. 또 보다 강경한 대책으로 노예매매 관계자의 破門조치를 결의하고 이를 국적을 초월하여 전가톨릭신도에게 적용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조선인 부로노예의 문제가 국제적인 문제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일본 노예상인과 포르투갈 노예상인의 노예매매를 근절시키지 못했고, 오히려 그들의 반발로 포교활동에 적지 않은 지장을 초래하였다.227)
다) 부로의 쇄환
일본에서는 풍신수길이 죽은 뒤에 어린 아들 豊臣秀賴(도요토미 히데요리)를 關白으로 삼고 제장이 보좌케 하였으나 실권을 잡고 있던 德川家康은 철병 다음해부터 對馬島主 宗義智를 시켜 강화를 요청하는 사신을 여러 번 보냈다. 선조 32년(1599) 대마도주는 국교재개의 타개를 위한 한 방법으로 부산첨사 李宗城에게 서장을 보내고 阿波城主가 석방한 정희득을 송환해 오면서 화의성립 후의 조선인 부로의 송환을 약속해 왔다. 다음해 2월에는 종의지 등이 수호를 위한 서장을 조선의 예조 등에 보낼 때, 조선정부의 호의를 얻기 위해 柳川 調信家에서 사역하던 부로와 대마도에서 유랑하던 부로 남녀 160여 명을 송환해 왔다. 이에 대해 조선정부는 被擄人 전원을 쇄환해야만 수호에 응하겠다는 강경한 회답을 주었다. 새로운 실권자로 등장한 덕천가강은 그 자신이 왜란출병과 관계없는 인물임을 내세워 수호교섭에 적극성을 보였는데 그것은 통 상상의 이익을 얻기 위함이었다. 조선의 호의를 얻기 위하여 수호요청 사절을 보낼 때마다 피로인들을 송환해 오면서 거듭되는 일본의 요청에 조선정부에서도 수호의 필요성을 내세우는 실용론이 태동하였다. 이러한 입장을 굳혀 준것은 일본으로부터 귀환한 전직관료이며 儒者인 피로인들의 상소와 건의였다. 그들의 공통된 의견은 일본의 재침에 대해 우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일본의 계속적인 수호요청과 귀환피로인들이 전하는 정보와 상소를 통하여 집권세력이 豊臣氏로부터 德川氏로 넘어간 사실과 새 집권세력이 수교의 열의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조선정부에서도 국교재개가 국익에 도움이 되리라는 주장이 강해졌다. 그래서 선조 37년 봄에 孫文彧을 正使로 삼고, 또 난중에 의승군으로 활약이 컸고 담력과 지략이 있던 僧 惟政(泗溟堂)을 동반케 하여 피로인의 쇄환교섭을 이유로 일본에 파송하였다. 이들 일행은 다음해에 伏見城에서 덕천가강의 대를 이은 집권자 德川秀忠(도쿠가와 히데타다)을 만나고 피로인 3,000여 명을 대동하고 귀국하였다. 그 후 대마도주가 다시 대마도 인의 부산교역 허락을 감사해 하며 피로인 1,390명을 송환해왔고, 다음해 선 조 39년에 수호의 빠른 결정을 촉구하면서 부로 120여 명을 또 보내왔다.
이로써 일본의 화의에 대한 진의는 어느 정도 알 수 있었으나 화의 그 자체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선조 40년 정월에 비로소 첨사 呂祐吉을 정사, 校理 慶暹을 부사, 佐郎 丁好寬을 종사관으로 한 일행 270여 명의 사절을 回答使로 일본에 보내 덕천수충과 회견하고 국서와 토산물을 전달함으로써 왜란후 국교가 회복하게 되었으며 피로인 1,340여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그 후 쇄환사업이 일본측의 비협조와 몰이해로 여의치 않자 조선정부는 부로인 전원의 쇄환을 요구하면서 부로인 쇄환을 위해 회답사 겸 쇄환사의 명칭으로 수차에 걸쳐서 사절을 일본에 파견하였으나 큰 실효는 보지 못하고 수백 명을 쇄환하는 데 그쳤다. 그리하여 일본에 피랍된 조선인 부로의 쇄환인원은 1만 명 미만에 불과하여 전체 10만 명 내외의 피랍자 중 겨우 1할 정도만이 귀환할 수 있었다.
<李章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