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강화회담기의 해전
명의 원군이 도착하고 이어서 평양이 탈환되자 조선조정은 이것을 왜군 섬멸의 기회로 삼기 위해 수군에 대하여 왜군의 퇴로차단을 명령하였다. 조정이 수군에게 하달한 명령의 내용은 “명군이 평양과 황해도 그리고 서울을 차례로 수복할 것이니 왜군은 결국 후퇴하여 바다를 건너가게 될 것이다. 이 때 수군은 바다를 차단하여 왜군을 섬멸하라”는 것이었다.266) 선조 26년(1593) 5월 10일 조정은 경상도에 파견된 접반사 尹根壽의 첩보에 따라 명군의 지시를 받아 부산 해안을 공격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왜군의 퇴로를 차단하여 바다에서 그들을 섬멸하라는 조정의 명령을 조선 수군은 성실히 이행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첫째 명군의 반격작전이 신속하지 못하였고, 둘째 반격을 하는 명군은 전투보다 강화교섭에 의한 전쟁종료에 주력하고 있었고,267) 셋째 조선의 군사작전이 명군에 이관되어 있었고,268) 넷째 군령체제가 다원화되어 번잡한 명령대로 군사작전을 수행할 수 없었고,269) 다섯째 일본 수군은 한산도해전에서 패전한 이후 풍신수길이‘조선의 수군과는 전쟁을 피하라’고 명령한데 따라 일본의 진지 중 가장 안전한 부산에 그들의 군선을 집결시킨 채 전투를 기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270)
한편 경상도 해안에 웅거하면서 전세를 관망하던 왜군은 명군의 주력이 철수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들의 세력권을 확장시키는 방편으로 진주성을 공격하여 선조 26년 6월 함락시켰다. 진주성이 함락되자 해전을 기피하던 일본 수군은 태도를 돌변하여 서진의 태세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선조 27년 3월 3일 고성의 望將 諸漢國으로부터 적 선단이 서진을 시작했다는 적정 보고가 도착하였다. 그 내용은 일본 수군의 대선 10척·중선 14척·소선 7척으로 구성된 선단이 영등포에서 나와 그 중 21척은 당항포로, 7척은 진해 오리량으로, 나머지 3척은 저도로 향했다는 것이다. 적 선단이 분산하여 아군의 경계수역을 침범했다는 첩보에 따라 다음과 같은 작전을 실시하였다.271)
첫째 전선 20척을 견내량에 주둔시켜 불의의 사태에 대비한다.
둘째 경쾌선 31척은 조방장 漁泳潭이 지휘해서 당항포를 침략한 일본 선단을 공격한다.
셋째 삼도 수사 휘하의 전선 30척은 학익진을 형성하여 영등포·장문포의 일본 선단을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세 곳에서 동시에 진행된 조선 수군의 해전은 모두 승리로 끝났다. 이 해전을 제2차 당항포해전이라 부른다. 당항포해전에서 이룩한 전과는 적선 31척을 격파한 것이었지만 왜군이 수륙으로 서진하고자 하는 의도를 제압함으로써 남해상의 제해권을 확보했다는 데 보다 큰 의의가 있는 것이다. 제2차 당항포해전까지 조선 수군이 연전연승하자‘조선에서 왜군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은 오직 수군 뿐’이라는 의견이 왜군에서까지 제기되었다. 따라서 조선조정에서는 수군에게 거듭된 출전 명령을 하달하였다. 그러나 조선 수군이 조정의 명령에 따를 수 없는 문제가 속출하고 있었다. 그것은 군량과 군졸의 부족과 군선 건조의 차질이었다.272)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서 수군에 내재해 있는 문제 해결에 골몰하고 있었을 때 分朝撫軍에서 활동하던 좌의정 윤두수가 수륙군에게 巨濟前進戰을 하달하였다. 윤두수의 거제 전진 명령은 명·왜간 강화회담의 영향으로 조선군의 전의가 해이되고 명군이 철수의사를 갖고 있으니 조선군이 왜군을 공격하면 조선군의 해이된 군율이 강화되고, 명군도 철수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계산에 의한 것이었다.273) 당시 왜군의 조선 잔존 병력은 5만 내지 6만이었는데 비해 조선군은 권율휘하의 3천 병력이 전라·충청도에 산재방어를 하고 있었으면, 1천여 명의 의병이 영남과 호남에서 의거하였고, 한산도를 중심으로 수군 2천여 명이 해양방위에 임하고 있었다. 군사력 비교상 열세가 분명한 상황에서 윤두수의 거제 전진 명령은 선조 27년(1594) 9월 27일 선조의 재가를 받아 하달되었다.274) 그러나 현실을 외면한 전투 결과는 패배였다. 선조 27년 10월 13일 도원수 권율의‘육군은 지휘관의 병약으로, 수군은 노젓기의 미숙으로 접전없이 군의 위엄만 손상시켰다’는 결과 보고처럼 조선군의 대항력은 극도로 약화되어 있었다.275) 그것은 전투원과 군량의 부족 그리고 전염병의 만연이 주 원인이었다.
명·왜간의 강화회담을 관망하며 총력을 경주하였던 거제 전진전이 실패하여 실의에 차 있던 조선 조정에게 새로운 위기감을 조성케 한 것은 일본의 재침설이었다. 즉 선조 29년 11월 23일 아무런 외교적 성과없이 귀국한 통신사 일행이 일본에 체류하면서 수집한 정보는 “왜정 내에 주전론이 강하게 일어나고 있으며, 재침의 전략과 방법 그리고 목표까지 걱정되었다”는 보고였다.276) 왜군이 재침할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고조된 때에 가등의 조선 영토 분할론이 전해졌다. 가등의 조선 영토 분할론이란 그가 조선을 점령하면 그 땅 을 그의 부하에게 나누어주어 영구히 지배하겠다는 것이었다. 조선조정은 가 등을 제거하는 것이 왜군의 재침을 방어하는 첩경이라고 판단하고 그를 제거하는 방안을 강구하였다. 그 결과 가등이 바다를 건너올 때 조선 수군이 해상을 차단하여 그를 제거해야 한다는 해로차단책을 수군에게 지시하였다.277) 그러나 통제사 이순신은 조정의 해로차단책에 적극성을 보이지 못했다. 그 이유는 군량과 인원 그리고 병선의 부족이었다. 이순신이 해로차단에 적극성을 보이지 못하고 있을 때 가등의 渡海說이 전해지자 그에 대한 문책으로 통제사는 이순신에서 원균으로 교체되었다.
266) | ≪李忠武公全書≫권수, 狀啓, 命率舟師截賊歸路諭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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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7) | 張學根,<講和論과 決戰論이 水軍統制史 交替에 미친 影響>(≪慶南史學≫5, 1991), 66∼72쪽. |
268) | 張學根,≪朝鮮時代 海洋防衛史≫(創美社, 1988), 191쪽. |
269) | ≪宣祖實錄≫권 27, 선조 25년 6월 병오. |
270) | 有馬成甫,≪朝鮮役水軍史≫(海と空社, 1942), 185쪽. |
271) | ≪李忠武公全書≫권 4, 狀啓 3, 唐項浦破倭兵狀. |
272) | 張學根,<壬亂期水軍에 對한 期待와 運用策>(≪제2회 국제 해양력 심포지움 발표문집≫, 해군 해양연구소, 1991), 270∼273쪽. |
273) | ≪宣祖實錄≫권 47, 선조 27년 정월 임인. |
274) | ≪宣祖實錄≫권 56, 선조 27년 10월 기묘. |
275) | ≪宣祖實錄≫권 57, 선조 27년 11월 병신. |
276) | ≪宣祖實錄≫권 83, 선조 29년 12월 기유. |
277) | ≪宣祖實錄≫권 83, 선조 29년 12월 정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