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2차 침입기의 해전
이순신이 투옥되자 조선 수군의 세력과 사기는 현저히 약화되었다 이 때 왜장 小西行長(고니시 유키나가)이 要時羅를 경상우병사 金應瑞에게 보내어 왜군의 후속 부대가 곧 바다를 건너오니 조선 수군이 그들을 기습하면 틀림 없이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정보를 제공하였다.278) 이것은 왜군이 그들의 유일한 대항세력인 조선 수군을 괴멸시키기 위한 정보였으나 조정은 이에 대한 대비책 없이 수군에게 출전 명령을 하달하였다. 당시 원균을 위시한 수사들은 지상군의 협조 없이 수군 단독작전을 할 경우 패전이 확실하다고 하여 출전 거부의사를 표명하였다. 그러나 선조와 조정대신 그리고 지상군의 장수들은‘수군이 바다로 나가 군의 위용을 보이면서 적을 칠 생각은 하지 않는다’고 수군을 힐난하였다.279)
조정의 명령을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자 조선 수군은 3도군선 200여 척에 분승하여 한산도를 출발, 부산으로 향했다.280) 조선 수군은 다대포에서 왜선 8척을 격침시킨 후 절영도 해역에 이르렀을 때 왜선 1천 척과 만나게 되었다. 세력의 현격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왜선과 격전을 벌렸던 조선 수군의 함선 일부가 서생포로 표류되어 왜군에게 나포되었고, 풍랑이 점차 강해져 격전을 포기하고 가덕도로 회항하였다. 종일 풍랑과 전투에 시달린 수군들은 휴식을 취하려고 섬에 오르던 중 왜군 복병의 기습을 받아 4백여 명이 희생되었다. 탈출에 성공한 잔여병력이 함선을 이끌고 칠천량으로 퇴주하여 전열을 정비하던 중 왜군의 기습을 받아, 전투를 회피하고 도주한 裵楔 휘하의 12척 군선을 제외한 조선 군선은 모두 격침되었다. 조선 수군이 완전히 와해된 이 해전을 칠천량해전이라 부른다. 조선 수군이 패전하게 된 것은 조정의 무리한 출전 강요가 주 원인이었으나 원균의 전술에도 문제가 있었다. 즉 이순신이 조선 군선을 집중시켜 적선이 분산되었을 때 공격하여 승리했던 것과는 달리 원균은 열세한 군선으로 다수의 적선을 분산 공격케 하는 전술을 구사했다. 이는 열세한 군사력으로 우세한 적군을 공격하는 모양이 되어 그 결과는 패배로 나타났던 것이다.
선조 30년(1597) 7월 21일 원균 함대의 패보에 접한 선조는 잔재해 있는 군선을 수습하고 결원된 통제사의 후임을 결정하여 충청·전라도에 대한 방비책을 세우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조정은 수군의 잔존 함선이 12척에 불과 하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그 세력으로는 일본 수군을 대적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수군을 파하고 육전에 참가하라”고 명하였다.281) 그러나 통제사에 재 부임된 이순신은 조정의 해양방위 포기론을 다음과 같이 반대하였다.282)
첫째 임진왜란 5, 6년간 왜군이 충청·전라도를 침범치 못한 것은 수군이 해안 요충지를 방어했기 때문이다.
둘째 현존한 전선이 12척에 불과하지만 사력을 다하면 전라도를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셋째 해양방위를 포기하게 되면 왜군은 수륙으로 전라·충청도를 거쳐 서울을 공격하게 될 것이다.
넷째 충청·전라도를 잃게 되면 실세를 회복하기 어렵다.
이순신의 해양방위 포기 반대의견에 대하여 조정은 수군력이 잔존하고 있음을 감안 수군의 해상활동을 허용하였으며, 이순신에게 수군의 재건과 방왜전략을 일임하였다.
조선 수군이 칠천량 패전으로 해체 위기에 직면해 있을 무렵, 왜군의 지상군은 남원을 점령한 후 전주에 입성함으로써 사실상 왜군이 전라도 전역을 석권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 수군은 육군의 북진에 호응하기 위하여 藤堂高虎(도토 다카도라)·加藤嘉明·脇坂安治·來島通總 등이 지휘하는 함선 330여 척이 하동에서 서진하여 그들의 지상군이 직산에서 패전한 9월 7일에는 해남반도의 남단 어란포까지 진출하였다.
수군통제사에 복직된 이순신은 왜군이 어란포에 이르렀다는 보고를 받고, 수습한 군선 12척을 명량수로 서쪽의 전라우수영으로 이동시켰다. 이는 일본 수군이 명량수로를 경유하여 서해안을 따라 북상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9월 16일 아침 일본군선 130여 척이 명량수로에 진입했다는 척후선의 보고를 받은 이순신은 피란선을 주력군 선단으로 위장시켜 왜군의 수로 통과를 차단하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왜군은 밀물을 이용하여 명량수로를 통과하려하였으나, 일본 선단의 선두가 수로를 통과할 무렵, 밀물이 썰물로 역류하기 시작하였다. 이순신은 피란선 1백여 척을 배후 주력함대로 위장시켜 왜군에게 공포심을 조성시키면서 12척의 전함으로 왜군선에 선제공격을 가하였다. 조선군이 순류를 타고 공격하자 역류를 거슬러 오르면서 공격해야 하는 왜군은 항해와 화력의 구사가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군은 공격이 용이한 순류를 타고 왜군이 전투대형을 갖추기 전에 총통으로 선제공격을 가하여 왜군을 혼란시켰다. 조류를 이용한 조선 수군의 공격으로 왜군의 선두 선단 31척이 격침되고 뒤따르던 선박들이 서로 부딪치며 파손되자 일본 선단은 조선 수군의 본대 공격을 받을 것을 꺼려 뱃머리를 돌려 패주하였다.283) 명량해전의 승리로 조선 수군은 전라도 해안의 제해권을 회복하게 되었다. 그 결과 왜군의 수륙양면 작전을 좌절시켰으며, 해체 위기에 있던 조선 수군을 재건하여 왜군에 대한 공세작전을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조선의 지상군도 9월 7일 직산전투에서 명군과 연합하여 왜군을 패 퇴시킨 후, 퇴주하는 왜군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조·명 연합군이 왜군을 압박하고 조선침략의 원흉 풍신수길이 병사하자 왜군 장수들은 본국으로 귀환하기를 희망하게 되었다. 왜군의 철수를 예측한 조선 수군은 여수반도 일원에 주둔하고 있는 소서행장군의 해상퇴로를 막을 계획을 수립하고 군선을 나로도로 이동시켰다. 이 때 명장 陳璘이 인솔하는 명의 수군이 조선 수군과 연합하게 되었다. 이순신은 해전에 소극성을 보이고 있는 진린을 설득하여 먼저 일본의 구원군을 격멸하기로 하고, 함대를 노량해역으로 이동시켜 일본 수군이 통과할 길목을 차단하였다. 진린군은 죽도 부근에, 이순신군은 관음포에 진을 치고 일본의 함대가 통과하기를 기다렸다.284) 소서행장의 구원 요청에 따라 거제의 立花宗茂(다치바나 무네시게)軍과 부산의 高橋直次(다카하시 나오츠쿠)軍까지 가세한 일본 함선 5백여 척이 島津義弘(시마츠 요시히로)의 지휘하에 19일 노량해상에 나타났다. 왜선이 나타났다는 척후선의 보고에 조·명 연합함대는 왜군의 항로를 차단하면서 화포를 이용하여 협공하였다 조·명 연합함대의 협공을 받은 일본 수군은 2백여 척의 대소 전함과 5백여 명의 병력을 상실하고 퇴주하였다. 조·명 연합함대가 島津의 일본 함대를 협공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소서행장군은 왜교성을 탈출하여 남해의 남단을 경유하여 거제도의 도진의홍·宗義智軍과 합류, 부산으로 퇴각하였다. 왜군이 12월 24일부터 26일까지 부산에서 완전 철수함으로써 7년간의 지루한 전쟁은 끝을 맺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