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수군의 전승요인
제반 전비태세, 군선과 전투요원, 군수지원체제, 그리고 전투요원의 정예도 등 왜군에 비해 전투력이 열세했던 조선 수군이 해전에서 연전 연승할 수 있었던 것은 다음과 같은 요인에 의해서였다.
첫째는 조선 군선이 왜군에 비해 장대하고 견고하였다. 전쟁 종반기에 조정에서 해전을 논의할 때, 대신 중의 한 사람이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제압할 수 있었던 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왜적이 해전에 익숙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다만 그들의 배가 멀리서 왔고 선체가 견고하고 장대하지 못하여 그 위에 대포를 안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나라 배에 제압된 것입니다(≪宣祖實錄≫권 61, 선조 28년 3월 신유).
즉 왜선은 조선 군선에 비하여 견고 장대하지 못하여 그 위에 대포를 안치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일본은 조선을 침략할 때 육군 중심의 침략군을 편성하고 수군은 수송의 임무를 주로 하였기 때문에 전쟁 시작부터 끝까지 군선에 대포를 적재하지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하여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黃愼은 “왜인들도 배부림을 일찌기 익혀온 것이지만 가볍고 빠른 것만이 좋은 줄 알고, 완전하고 두꺼운 것이 믿음직하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의 선제를 배울 줄 모릅니다. 대포는 없고 항상 조총을 쏘고 있습니다”라고 보고하고 있다.285) 장대하고 견고하여 선상에 화포를 적재할 수 있었던 조선 수군의 주력군선은 板屋船과 거북선이었다.
판옥선은 소형 경쾌선을 추구하던 조선이 三浦·蛇梁·乙卯倭亂을 겪으면서‘소형 쾌속선으로 왜선을 추격하였으나 화포를 적재하지 못하고, 전투원이 부족하여 오히려 패하고 돌아왔다’는 점이 지적되어 다시 대형 군선제로 전환되면서 출현한 신형군선이었다. 판옥선은 당시 명과 일본의 군선 중 선체에 屋을 설치하여 승조원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는 장점을 채용하였다.286) 그 결과 적이 돌입해 들어올 수 없고 선체가 높아 적이 기어오르지 못한 반면, 조선 수군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며 화포를 구사하는 판옥선을 운영하였던 것이다.287) 군선이라는 측면에서 판옥선의 우수성은 선체가 커 많은 전투원과 화포 그리고 각종 군수품을 적재할 수 있다는 장점과 아울러 선체에 판옥을 설치함으로써, 주갑판에 있는 노요원과 射手의 안전을 보장하고 상갑판에서 화포의 구사를 용이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승조원 생명의 안전을 보장하고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며 화포를 구사케 하여 전투효율을 높였다는 것이 바로 전승 요인이 되었다. 판옥선의 단점으로‘속도가 느리고 선체가 무겁다’는 지적이 있긴 하였으나‘우리 군선은 순풍·횡풍·역풍을 구사할 수 있는데 왜선은 순풍만 사용한다’는 황신의 평가가 예시하듯 돛을 사용하여 속력을 보완하였던 것이다.288) 즉 판옥선은 명과 일본의 군선을 모방하였지만 그것과는 다른 새로운 형태의 군선으로 개량하여 선체가 높아 적이 기어오르지 못하고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며 화포를 구사함으로써 적을 제지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군선이었다.
거북선은 돌격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임란 직전에 제작된 군선이다.289) 해 전 상황에서 이순신이 염려한 것은 숫적으로 우세한 적 선단의 진형을 어떻게 혼란·와해시키느냐 하는 것이었다. 전투국면에서 승조원의 안전을 도모하면서 과감히 적진으로 돌진해 들어갈 수 있는 군선이어야만 적의 진형을 혼란·와해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점에 착안하여 고안해 낸 것이 거북선이었다. 거북선은 판옥선의 장점을 유지 발전시키고 판옥선의 단점을 보완한 군선이었다. 판옥선의 장점이란 선체가 높아 적이 기어오르지 못하고 포좌를 상갑판에 설치하여 화력의 효율을 높였다는 점이다. 거북선은 이 장점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주갑판 위에 상갑판을 설치하고 노요원과 사수를 주갑판에, 포요원을 상갑판에 위치케 하고, 상갑판 위를 덮개로 씌워 전투요원까지 안전을 보장하려 하였다.290) 그리고 판옥선의 단점인 선체가 무겁고 속력이 느린 점을 보완키 위해 선체를 판옥선보다 작게 만들었다. 해전 상황에서 항해 요원과 전투원의 안전을 보장한 군선은 임란 당시 조선 군선인 거북선이 유일한 것이었다. 거북선의 활약은 두드러져 임란 당시 거북선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이 호의적으로 보고되고 있다.
水戰은 우리 나라가 보유한 장점이요, 거북선 제도는 더욱 승첩에 요긴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적이 꺼리는 바가 바로 이 거북선에 있습니다 … 거북선이 부족하면 밤낮으로 더 만들어 대포·불랑기·화전 등을 싣고 바닷길을 막아 끊는 계책이 곧 위급함을 막는 가장 좋은 계책입니다(≪宣祖實錄≫권 68, 선조 28년 10월 병인).
거북선이 전승의 한 요인이라는 평가는 바로 돌격선으로 운용할 수 있도록 승조원의 안전을 보장함으로써 승조원의 용감성을 유도해낸 船制의 장점에 있었던 것이다. 판옥선과 거북선 이외에 조선의 군선으로 포작선과 사후선 등이 있었는데 승조원이 5명에서 15명이 되는 선박으로 첩보와 보급선의 역할을 하였다.
둘째, 선상무기의 우세였다. 왜군은 조선 침략 당시 해상전투보다는 지상전에 주력하였다. 그 결과 왜군은 장창·장검·조총 등 개인 무기로 무장하였다.291) 이를 대비한 조선 수군은 銃筒과 화살을 위주로 한 선상 무기와 장창·요도·철칠려와 같은 개인 무기를 휴대하고 있었다.292) 즉 훈련과 실전 경험이 있는 왜군은 개인 무기를 휴대하고 조선 수군에 접근, 선내로 돌입해 들어오는 전법을 구사하였다. 이에 대응하는 조선 수군은 선체를 높게 하고 방패를 부착하여 왜군의 돌입을 막고 적선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총통과 화살을 이용하여 적선을 불태워 격침시키는 전법을 구사하였다.293) 다행히도 왜선은 폭이 좁고 선체가 견고하지 못하여 선상화기를 적재하지 못하였다. 단지 조총을 이용하여 공격해 왔지만 두꺼운 판자로 건조된 조선군선을 관통하거나 파괴시킬만한 위력을 갖지 못하였다. 반면 조선의 총통은 적선을 격파시킬 수 있는 위력을 갖고 있었으며 화살은 화공전법을 구사하여 적선을 불태워 격침시킬 수 있었다.
셋째 전술운용의 우수성이다. 군선의 수, 군선의 속도, 군수지원체제, 전투원의 정예도 및 전투원의 수 그리고 조선의 총통과 활을 일본의 조총과 비교할 때 포의 사정거리 및 정확도 등에 있어서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에 열세하였다. 따라서 함대함 전투를 할 경우 조선 수군에게 절대 불리하였다. 이러한 불리한 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이순신이 주축이 된 조선 수군은 해전 때마다 다음과 같은 기본 전략 전술을 구사하였다. 첫째 적이 진영을 갖추기 전에 기습공격을 가할 것,294) 둘째 판옥선으로 공격할 수 없는 해역에서는 포작선과 사후선을 이용하여 적선을 유인하고, 본대로 학익진을 편성하여 적선을 포위 섬멸할 것,295) 셋째 대양에서 적 선단을 만나게 되면 거북선을 이용하여 적 진영을 와해시켜 적으로 하여금 지휘체계의 혼란을 야기시킨 후 집중 공격을 가할 것,296) 넷째 아군의 군선수가 적 선단보다 적을 때는 적이 분산될 때까지 기다린 후 적 선단을 차례로 공격할 것,297) 다섯째 신속한 선단의 구성과 원활한 기동항해를 위해 사전에 지역별로 선단 위치를 부여할 것298) 등이었다.
이순신이 주축이 된 조선 수군은 위와 같은 전략·전술을 적절히 운용함으로써 열세한 함대 세력으로 제해권을 확보하였던 것이다. 임란 전기간을 통하여 이순신의 함대가 연전연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위와 같은 전략·전술을 적절히 운용하였다는 점과 지형·지물에 밝은 연해민을 이용하여 주변환경을 전투에 응용하는 전략을 수립하고 명중율이 낮은 총통을 학익진을 형성하여 탄착점을 중앙에 모으게 함으로써 명중율을 높였다는 점이다.299) 이와는 반대로 용감성면에서 국왕인 선조에게 신임을 받아 통제사가 된 원균은 휘하 장병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하지 못하였으며 함대함 전투를 선호하여 적세가 아군보다 강할 때 공격함으로써 적의 협공을 받아 패했던 것이다.300)
국난의 위기에서 전국회복을 가져오게 한 동력은 수군의 승리였다. 수군의 승리를 이순신의 영웅적 활동으로 집약하는 것이 학계의 통념이다. 그러나 이순신의 영웅적 활동은 조선 군선과 화포 그리고 전술전략의 응용과 이를 뒷받침하는 전투요원의 책임감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전승의 요인이기도 하다.
<張學根>
285) | ≪宣祖實錄≫권 83, 선조 29년 계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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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6) | ≪中宗實錄≫권 104, 중종 39년 9월 갑진. |
287) | ≪中宗實錄≫권 42, 중종 16년 5월 무오. |
288) | ≪宣祖實錄≫권 141, 선조 33년 정월 갑술. |
289) | ≪李忠武公全書≫권 2, 狀啓 1, 唐浦破倭兵狀. |
290) | Joe Evangelsta, “The Turtle Ship Admiral,” Surveyor(뉴욕;미선박국, 1993), 2∼6쪽. |
291) | ≪宣祖實錄≫권 25, 선조 24년 5월 을축. |
292) | 宋奎斌,≪風泉遺響≫配定遠近器械(奎章閣 藏書) 참조. |
293) | ≪李忠武公全書≫권 3, 狀啓 2, 條陳水陸戰事狀. |
294) | ≪宣祖實錄≫권 25, 선조 25년 6월 기유. |
295) | 海軍士官學校 博物館 所藏<鶴翼陣圖>참조. |
296) | ≪李忠武公全書≫권 2, 狀啓 1, 釜山破倭兵狀. |
297) | ≪宣祖實錄≫권 25, 선조 25년 6월 기유. |
298) | 海軍士官學敎 博物館 所藏<戰艦圖>참조. |
299) | 위와 같음. |
300) | 李舜臣,≪亂中日記≫, 정유 7월 18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