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사림의 득세
명종 연간은 전체적으로 보면 사림파의 실세기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명종말 선조초의 사림정치 시대의 막을 여는 시기이기도 하다.
기묘사화 이후 사림은 크게 실세하여 상당 기간동안 위축되었다가 이후 중종말부터 정계에 재등장하였지만 명종초의 거듭된 사화로 또 다시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이러한 가운데서도 사림은 중앙 정계에서 정책결정 과정에서는 별다른 영향력을 가질 수 없었지만 일정하게 명맥은 유지하고 있었다. 그것이 집권세력의 집권의 정당성 확보라는 필요에 의한 것이라는 한계는 있었지만 사림파의 정치적 역할이 잔존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 실제로 이 시기 훈척세력이 자파세력의 일부를 도태시키는 과정에서 사림의 공론을 일정하게 의식하고 있었던 것도 역시 이러한 분위기에서 나온 조처였다.
이후 소윤정권이 어느 정도 안정되어 가는 시점에도 일부 새로운 사림파가 계속해서 등용되고 있었는데 이것은 사림파가 척신집권하에서도 계속 정치세력으로 기능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명종 친정 이후 소윤세력과 이량세력간의 갈등이 표면화되는 시기에 오면 사림파의 존재가 중요한 관심사로 대두될 만큼 크게 성장하였다. 예컨대 이 시기 사림세력은 이량이 그의 아들인 李廷賓을 전랑으로 천망하려 하자 이를 적극 반대할 정도로 정치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림파의 정치적 성장과 더불어 이 시기에 오면 조광조에 대한 인식도 전시대에 비해 다소 양보적으로 바뀌고 있었고0026)≪小學≫과≪近思錄≫등 사림파가 중시했던 책들이 다시 강조될 정도로 사림파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있었다. 물론 조광조를 비롯한 기묘사림이나 을사피화인에 대한 본격적인 사면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나, 재변·왕실의 경사 등으로 을사피화인에 대한 疏放이나 죄의 경감이 조금씩 나타났다는 것도 이 시기 사림파의 정치적 성장과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분위기의 연장선상에서 비록 吏曹에 의해 제동이 걸리기는 했지만 成守琛·曺植 등 遺逸之士를 除職하도록 종용하게 되었으며, 許瞱·尹根壽 등은 국왕의「爲學」과「獎學」을 논변하면서 조광조의 무죄를 과감히 변론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으로 당시 사림은 중앙정계에서 뿐만 아니라 향촌사회에 있어서도 착실한 재지적 기반을 다져 나가면서 학문적 역량을 축적해 나갔다. 실제로 이 시기 훈구파의 계속되는 탄압 속에서도 그들의 公道論의 정당성은 그대로 살아 이것이 학문적인 면으로 승화되어 괄목할 만한 성과를 올렸다. 李滉의 학문이 바로 이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다.0027) 뿐만 아니라 이러한 학문적 발전에 따라 사림의 수적 확대도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이 시기에 이르러 성리학파의 학연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것이 바로 그것을 말해 준다. 이러한 분위기가 명종 20년(1565) 소윤 척신세력의 몰락 이후 사림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는 단서가 되는 것이다.
이 시기 재지 사림파의 성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서원의 건립 활동을 들 수 있다. 서원은 선초의 유향소 설치, 성종대의 유향소 복립운동, 중종조의 향약 보급운동 등 사림의 향촌 기반 확보를 위한 노력의 연장선상에 있었던 사림의 기구였다. 이러한 서원이 훈척 집권하인 명종대에 속속 건립될 수 있었던 것은 서원 자체가 교육기관이라는 점도 있었지만 이 시기 사림의 성장과 무관하지 않다. 중종 38년(1543) 풍기군수 周世鵬이 白雲洞書院을 세운 것을 효시로 사림파의 서원 건립 활동은 활발한 진전을 보여 명종대 20여 년간의 척신정치 아래서도 18개 곳이나 세워지는 성과를 올렸다. 이러한 서원의 건립은 향촌사회에 재지사림의 성장을 촉진시켰으며 이는 나아가 이 시기 사림의 학파의 성립으로까지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볼 때 척신정치가 지속되었던 명종 20년까지도 사림파는 그 맥이 완전히 끊긴 것이 아니었으며 다음 시대를 준비하는 자기 노력은 계속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는 이미 거의 전국적으로 유생들이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명종대 대표적인 사림파의 인물로는 영남의 李滉과 曺植 및 호남의 泰仁에 李恒, 長城에 金麟厚, 羅州의 奇大升, 海南의 柳希春 등이 있었고, 또한 조광조의 문인인 成守琛·白仁傑 등, 서경덕 문인인 朴淳·許瞱 등이 중앙정계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명종대에 활약했던 사림파의 중요 인물로는 朴謹元·尹斗壽·朴素立·尹仁涵·金弘度·金虯·金繼輝·朴啓賢·李希顔·成悌元·趙昱 등을 들 수 있다. 이중 후일 퇴계학파와 남명학파로 발전해 나가는 이황과 조식은 사림의 뿌리로 인식될 정도로 사림파 내에서의 위치가 절대적이었다.0028) 이들은 선대 이래의 확고한 사회 경제적 기반과 선배학자들의 학문적 업적을 배경으로 향촌에서 師友門人관계를 형성하여 강력한 세력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특히 이황은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을 사액받는 등 서원 창설과 보급운동에도 적극적이었다. 이 시기 사림의 성장과 확대는 영남을 비롯하여 충청·전라·경기 등 전지역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명종 연간 정국에 대한 당시 사림계쪽의 입장은 기본적으로 척족정치는 용인할 수 없다는 반척신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지만 그 내용면에 있어서는 상당히 달랐다. 척족정치에 과격하게 반대하다가 귀향가거나 죽음에 이르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온건 타협적인 노선을 견지하는 경우도 있었다. 한편 당시 사림중에는 무오·기묘·을사사화를 거치고 또한 척족정치가 장기화되자 과거를 통해 관인이 된다는 생각을 단념하는 자가 나오게 되는가 하면 아예 산림처사로서 일생을 보낸 자들도 많았다. 당시의 정국에 대한 사림파의 현실 대응 의식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예로는 이황이 명종의 잦은 징소에도 불구하고 중앙정계로의 진출을 기피했던 점이나, 조식이 문정왕후와 소윤 집권에 비판적인 상소를 올렸다는 것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0029)
이 시기 재지 사림세력의 성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명종 20년(1565)의「請斬普雨疏」이다.0030)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사림세력은 명종조 훈척 정권하에서도 꾸준한 성장을 계속하고 있었다. 실제로 이들이 주장하는 공론정치가 당시 정국에 반영되고 있지는 않았지만 특히 각 지방의 유생들의 성장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이 시기에 오면 그 이전에는 없던 이른바 退溪學派·南冥學派와 같은 학파가 형성되고 각 읍마다 향교·서원 및 동성촌의 문중이 형성되는 등 사림의 기반이 점차 확대되어 갔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도처에 사림들이 형성되기 시작하였으며, 이 儒疏는 이러한 배경에서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명종 20년 4월초에 문정왕후가 죽자 곧 언론 三司가 문정왕후와 밀착해 있던 보우의 처벌을 주청한 데 이어 관학생들의「請斬普雨疏」가 전후 30차례나 상정되었고 끝내는 空館(捲堂)에 들어갔다.0031) 이때 관학에서 유생을 동원하여 집단 상소를 올리게 하고 공관까지 감행케 한 데에는 8도 중 생진수가 가장 많았던 경상도 출신 유생이 중심이 되었다. 그 다음 달에는 楊州 儒生인 生員 李思淵 등 50여 명과 開城府 유생인 생원 吳彦仁 등 40명, 忠義衛 尹義孫 등 322명의 집단 상소가 있게 되어 보우는 끝내 제주에 유배되었다. 동년 7월에 안동 유생인 생원 權審行 등 200여 명과 南原 유생인 생원 吳夢良 등 200명의 상소가 있고 난 후 8월에 경상도 列邑 유생을 대표한 進士 金宇宏 등 300여 명이 올린 제1차 유소가 있었다.
명종 20년 4월에서 8월까지는 각 도·각 읍별로 보우의 처단과 윤원형을 탄핵하는 유소가 서로 경쟁이나 하듯이 올라왔다. 김우굉 등의 2차 유소는 8월 5일부터 25일까지 20차에 걸쳐 도내의 列邑 유생들이 入京할 때마다 해당 고을 유생들과 합류하여 상소하였는데, 20차에 湖西·館學生들과 함께 상소를 하여 명종의 비답을 받았다.
안동의 權審行 등과 상주의 김우굉 등의 영남유소는 중앙의 三司疏와 館學疏에 다소 뒤졌지만 문정왕후 사후 척신정치를 몰아내는 데 크게 작용하였다. 특히 당시 조정의 언론기관과 館學에는 화담·퇴계·남명 등의 문하를 출입한 인사들이 포진하고 있어 그들의 주동하에 그러한 疏章이 계속 상정되었고 동시에 諸道에 移文하여 유생들을 종용했던 것이다. 한편 이러한 유소는 당시 사림 주도하에 관학생과 지방 유생 및 재경 관인과 지방 유림과의 긴밀한 협조체제하에서 가능하였다.
이와 같이 공론을 바탕으로 한 반척신적 태도로 나름대로의 위상을 확보한 사림파의 정치적 영향력은 척신의 몰락 이후 을사피화인에 대한 신원이 이루어지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당시의 사림파는 명종 중기이래 정계에 진출하면서 활동해 온 부류와 을사사화때 피화되었다가 신원된 부류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신원된 을사인 대부분은 年老하여 뚜렷한 활동을 할 수는 없었으나 반척신의 입장을 견지하다 피화되었다는 점에서 사림파로서의 정당성을 갖는 반면, 명종 중기 이후 진출한 사림파는 비록 그들 나름대로 공론에 입각한 활동을 했다고 하더라도 척신지배하에서의 소극적인 행동으로 순수성은 을사피화인에 비하여 약한 형편이었다.
그러나 당시 沈家세력이 외척으로서 활동에 한계가 있었고 윤원형과 이량의 몰락이후 근신하고 있었기에 과거 정치의 청산이라는 면에서는 공론을 견지하면서 반척신의 태도를 지녔던 사림파의 입장이 더욱 정당성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사림파는 척신세력의 몰락 이후 그들 집권시의 폐단을 지적하고 이의 시정을 촉구하면서 維新정치에 대한 기대감을 갖고 있었다. 이를 위해 사림파는 언관을 통한 對王 공세에 나섰다. 언관을 중심으로 과거의 척신정치를 청산하고 새 정치질서를 수립해야 한다는 상소가 자주 나타난 것이 그 예가 된다.
이러한 사림파의 입장에 대해 명종은 새 정치질서의 수립이라는 측면에서는 공감하고 있었으나 방법론적 문제에 있어서 확고한 입장을 가지지 못함으로서 확실한 입장을 표명하지 않고 있었다. 나아가 명종은 사림파의 성장에 대한 대응책으로 이량세력을 다시 등용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었다. 이러한 불안한 형세에서 사림세력은 사림학자들을 기용하여 사림세력을 확장함으로써 권신들의 재진입을 차단하고자 하였다. 명종 21년(1566) 6월에는 李恒·成運·韓脩·南彦經·林薰·金範 등의 遺逸에게 6품직을 제수하여 명망있는 사림학자들을 조정에 배치하려 하였다.0032) 또한 문정왕후 사후 당시 신진사류들의 종장인 이황에게 계속 召命을 내려, 이황이 명종이 승하하기 직전 상경하는 것도 이황의 重望으로 명종의 마음이 동요되지 않게 하고 사림세력을 결집시키려는 것이었다.
이후 명종이 죽고 德興君의 제3자인 鈞(宣祖)이 왕으로 즉위하면서 사림세력은 마침내 정국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이후 을사사화인에 대한 본격적인 사면 등 척신정치에 대한 청산이 가속화되었다.
<李樹健>
0026) | 李秉烋,<朝鮮前期 支配勢力의 葛藤과 士林政治의 成立>(≪民族文化論叢≫ 11, 嶺南大, 19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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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7) | 李泰鎭,<士林과 書院>(≪한국사≫ 12, 국사편찬위원회, 1977). |
0028) | 李樹健,<南冥과 南冥學派>(≪民族文化論叢≫ 2·3, 嶺南大, 1982). |
0029) | ≪明宗實錄≫ 권 19, 명종 10년 11월 경술. |
0030) | 李樹健,<正祖朝의 嶺南萬人疏>(≪嶠南史學≫ 창간호, 1985), 309∼311쪽. |
0031) | ≪明宗實錄≫ 권 31, 명종 20년 4월 신묘. |
0032) | ≪明宗實錄≫ 권 33, 명종 21년 6월 경진·7월 무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