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존주론과 명분주의
16세기를 지나면서 조선사회에 유교적 윤리규범이 보편화되고 주자학적 명분론에 입각한 사회질서가 확고히 정착되면서 성리학이 차츰 교조화되어 가는 경향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조선성리학의 경직화 현상은 명분론에 대한 강한 집착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예학과 존주론으로 나타나는 명분론에의 집착은 인조반정을 통해 집권하게 된 집권세력의 정치적 정통성 확보와 관계 있다. 반정을 통해 집권하게 된 서인과 남인의 연합세력은 廢君이라는 비유교적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廢母殺弟라는 강상윤리의 폐기를 내세우고 성리학적 명분론을 더욱 강화해 나갔다. 이들은 안으로 성리학적 명분론을 강화시켜 나갔을 뿐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주자의 尊華攘夷的 명분론에 입각한 존명사대의 외교정책을 취함으로써 자신의 정통성을 구축하고자 했다. 이러한 명분론에 입각한 대내외적인 정책의 고수는 청의 발호라는 새로운 국제질서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현실적 대처능력을 상실하게 하였고 마침내는 병자호란을 초래하게 되었다. 병자호란을 당하여 오랑캐로 여겼던 청의 무력에 굴복하게 되자 소중화로 자처하던 조선의 자부심은 큰 상처를 입게 되었고 뒤이어 중화인 명이 오랑캐인 청에 멸망함으로써 기존의 국제질서가 붕괴되어 버리자 명에 의존하고 있던 조선의 정통성은 크게 손상받게 되었다. 주자학적 명분론에 입각하여 대내외적 질서를 확립해가던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이러한 전통적 중화질서의 붕괴를 천지대란으로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치열한 사상적 노력을 경주하였다. 이 과정에서 청을 새로운 국제관계의 중심으로 인정하는 主和論은 배제되고 종래의 주자학적 이념에 입각한 斥和論이 국론으로 되면서 조선성리학은 더욱 강고한 명분주의의 틀을 고수하게 되는데, 이는 청에 굴복한 현실을 관념적으로 극복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였지만 병자호란 이후 심양에 억류되어 있다가 귀국하여 왕위에 오른 효종과 그에 의해 발탁된 산림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서인정권의 정통성을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효종과 송시열은 임진왜란 때 再造之恩을 입은 명에 대해서는 對明義理論을, 조선에 굴욕을 가하고 명을 멸절시킨 청에 대해서는 對淸復讐論을 견지하고 스스로에 대해서는 기존이 소중화 의식을 더욱 강화하여 조선만이 중화문화의 유일한 계승자라는 자부심으로 무장함으로써 당시의 난관을 극복하고자 했다. 청에 대한 復讐雪恥의 염원은 北伐論으로, 대명의리론은 尊周論으로 이론적 틀을 갖추면서 주자학적 명분론은 국가의 대의와 맞물린 이념으로 한층 강화되었다. 효종과 송시열이 신담대의로써 뜻을 합하기는 하였으나 두 사람의 의도하는 바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효종이 북벌을 강조하여 조정을 군사정국화함으로써 왕권의 강화를 도모했던 반면 송시열은 군비의 증강보다 민생의 안정과 성리학적 명분의 실현이 시급하다고 주장하였다. 북벌론과 존주론은 청의 중원지배를 받아들이자는 현실론을 폈던 윤선거, 박세당 등의 일부 소론계 지식인들에 의하여 그 허구성이 간접적으로나마 지적되기도 했지만 당시 조선지식인들의 공론으로 형성되어 갔다.0555) 북벌론과 존주론은 표리관계를 이루고 있는 같은 사상의 양면이지만 효종이 즉위 10년만인 1659년 승하하고 현종 3년(1662) 명의 명맥을 잇고 있던 三皇이 멸절됨에 따라 북벌의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북벌론은 퇴색하고 존주론만이 사림파의 전통적인 정치이념인 유교 근본주의의 맥락과 연결되면서 일층 강조되었다. 존주론의 주창자인 송시열은 “天經地義(존주대의)는 民彛의 큰 것이니 어기면 금수가 될 것”0556)이라고 하여 존주론에 입각한 대명의리의 준수야말로 성리학적 이념실현을 위한 대전제라고 하면서 오랑캐의 나라였던 원에서 벼슬한 허형을 문묘에서 축출해야 한다고 요구하기까지 하였다. 명이라는 나라는 이미 사라지고 없는데 존주론에 입각한 대명의리론을 계속 고수하는 것은 사실 관념적인 명분추구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시열을 중심으로 노론계 학자들이 대명의리론을 계속 주장하여 마침내 국가적 차원의 공인된 제의로까지 발전시키게 되는데 이는 조선만이 중화문화의 유일한 계승자로서 성리학적 이념을 끝까지 고수해야 한다는 자존의식과 더불어 은연중 청에 대한 현실적 노선을 견지하고 있던 소론에 대한 노론의 정치적 입장강화와도 관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성리학적 명분추구의 노력 끝에 마침내 1704년 명이 멸망한지 60년이 되던 해 임진왜란 때 재조지은을 입은 명의 神宗과 명의 마지막 황제 毅宗을 제사지내는 제의가 국가적 차원에서 마련되었으니 大報壇의 설치가 그것이다. 이 제의는 송시열이 煥章庵을 설치하여 사적으로 송의 황제에게 제사지내도록 한데서 시작되었는데 송시열이 정쟁에 희생된 후 그의 제자 권상하가 유지를 이어 萬東廟의 건립을 주도했고 이것이 국가적 공인을 획득하여 대보단의 설치로 이어지게 되었다. 대보단을 설치할 때 신하인 조선국왕이 천자인 명황제에게 직접 치제할 수 있는가 하는 의례상의 문제가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강행한 것은 조선이 명의 적통임을 자부하는 조선중화주의 의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임과 동시에 송시열의 유업인 만동묘의 건립과 대보단의 설치는 존주대의가 복수설치의 실현을 단념한 채 노론정권과 보수유림의 허울좋은 명분이 되고 기념물화한 하나의 상징이었다 하겠다.0557)
<許南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