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한역 천문서와 역산서
예수교선교사들이 가지고 있던 서양과학과 기술 가운데서 중국 황실과 사대부들의 관심을 모은 것은 서양천문학과 그 관측기술이었다. 유교전통사회에서 황제는 천문을 정확히 관측하여 曆書를 작성하여 백성들에게 내려주는 것이 ‘敬授民時’라는 堯典의 말과 같이 역서는 제왕의 책임이었던 것이다.0624) 농업국가에 있어 계절의 변화와 그에 따른 농업생활에 도움을 줄 기본 정보를 실은 역서의 편찬을 뒷받침하는 曆算推步의 학문은 ‘帝王之學’이었던 것이다. 유교전통사회에서는 ‘天人感應思想’의 영향으로 천문의 이변을 君德과 연결지어 생각하는 믿음이 있었다. 군왕이 有德할 때 天象과 자연은 순조로우나 정치적 과실을 저지르는 부덕한 군주에 대해서는 하늘의 경고와 징벌이 천지현상의 이변으로 나타난다는 믿음이 확고하였다. 정확한 역서의 제작, 반포가 제왕의 책무였기에 그 정확한 역서제작의 기초학·기초기술인 천문학·천문관측이 문제되는 것이며, 관측기록에 의해 정확한 역서를 제작할 수 있는 기초학문인 曆算學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예수회 東洋巡察使 바리니아노(Valingiano;范禮安)가 시달한 補儒論的 문화주의의 전교방침을 준수하던 마테오 릿치는 북경주재의 허가를 받은 후 전교의 전제적 방법으로 서양의 천문·역산술을 전할 수 있는 책들을 부지런히 漢譯하여 간행, 유포시켰다. 마테오 릿치가 중국사회에 전파하고자 하는 크리스트교 신앙과 그 가치를 담은 윤리사상체계는 유교사회의 군주로는 반가운 것이 아니었으나 그의 머리 속에 담긴 서양의 천문역산학과 손 끝에서 이루어지는 천문·역산술은 당시 전통적인 중국 역법의 오차 때문에 고민하던 중국으로는 매우 필요한 것이었다. ‘奉敎士人’이며 禮部右侍郞이었던 徐光啓의 노력으로 명나라는 1629년 북경에 西洋曆局을 개설하고 적극적으로 서양 역산법을 도입, 활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마테오 릿치를 위시한 예수회 전교자들과 그들을 적극 보좌한 봉교사인 李之藻의 합동 노력으로 방대한 양의 漢譯西洋曆算書의 집대성인≪崇禎曆書≫가 이루어져 5차에 걸쳐 황제에게 進呈되었던 것이다.0625)≪숭정역서≫에 포함된 각종의 한역서양역산서가 赴京使行員들에 의해 조선사회로 재래되었다.≪숭정역서≫는 명나라가 후세에 남긴 가장 위대한 과학유산일 뿐만 아니라, 청나라 초기에 이루어지는 時憲曆의 기초 자료로 주목되는 방대한 한역역산서로 집성되었다.
중국에서 명·청 교체가 진행되는 와중에 중국에서 활동하던 예수회는 중대한 위기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아담 샬의 적절한 시국 대응과 서양 역산기술의 유용성을 인식한 청국의 호의적 조치로 예수회는 서양 신법에 의한 역서 작성의 업무를 계속 담당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시헌력을 이루어 중국사회에 실용시킬 수 있었다. 1600년의 ‘欽天監敎案’으로 중국전통 역산학세력의 반격을 받아 한때 북경에서 예수회선교사들이 체포, 추방되는 일도 겪었으나 서학에 대한 학문적 취향이 대단했던 康熙帝가 친정케 됨으로써 위기를 벗어나 다시 연경에 들어와 역산의 책무를 담당할 수 있었다.0626)
마테오 릿치의 북경 입성부터 약 반세기 후인 17세기 전반에 조선으로 도입된 漢譯西學天文曆算書에 대한 조선지식인들의 반응은 어떻게 나타났을까.
한역서학서를 통해 가장 먼저 서양 天體論을 언급한 사람은 이미 앞에서 논한 바와 같이 김만중이다. 그는 ‘天圓地方’의 설을 주제로 하는 동양사회의 전통적 우주관인 ‘蓋天說’ 내지는 ‘渾天說’ 등 동양 고래의 우주관에 대해 ‘地圓說’을 수용하였고, 그 지구설을 의심함은 ‘井蛾夏虫之見’이라고 규정하였다. 나아가 그는 다음과 같이 서양의 지구설을 평가하였다.
명나라 만력년간에 서양의 지구설이 나옴으로써 渾天·蓋天의 두 설은 비로소 서로 통하게 된 것이 하나의 큰 일이었다. 생각건대 고금의 天을 논하는 자들을 비유적으로 설명한다면 코끼리를 쓸어보고 그 일부분만을 알고 있음과 같은 것이었으나 서양의 역법에 의해 비로소 그 전체를 알게 되었다(金萬重,≪西浦漫筆≫下).
김만중은 그에 앞서 정두원이 도입한≪利瑪竇天文書≫일부를 접한 것으로 생각되며, 그가 열람한 천문서란 李之藻가 筆述하여 1607년에 북경에서 간행한≪渾蓋通憲圖說≫일 것이다.0627) 이 한역서양천문서는 마테오 릿치가 로마의 대학에서 배웠던 유명한 수학자이며 역사가이던 크라비우스(Cravius)가 지은 천문교과서를 한문으로 번역하여 엮어낸 것이었다. 한편 연행사 정두원이 조선으로 도입한 한역서학천문서로≪天問略≫이 있었다.≪천문략≫은 조선 유학자들의 전통적 천체관을 근본으로부터 뒤흔들게 하는 한역서학천문서였다. 비록≪천문략≫은 코페르니쿠스(Copernicus)의 地動說이 나타나기 이전까지 오랫동안 서양에서 수용되어 온 크리스트교적 천체관에 입각한 것이며, 지구 중심의 天動說에 터전한 천체관을 담은 것이었으나 천원지방의 개천설·혼천설 등 동양 고래의 천체관에 변화를 촉구하게 된 한역서학천문서였던 것이다.0628)
진주사 정두원 일행이던 역관 李榮俊은 서양천문역산학에 관한≪천문략≫·≪治曆緣起≫등을 정두원으로부터 넘겨받아 큰 놀라움을 가지고 통독한 후 그것을 그들에게 전해주었던 로드리케즈에게 서양 천문관에 대해 질문하는 서한을 보냈다.
그는 중국을 중심으로 작성된<坤與萬國全圖>를 보고 천하의 渾元淸淑의 氣가 응집되어 많은 성인이 배출되고 仁義禮樂之敎가 성하며 그 기가 이어 내려오고 있는 중국과 비견할 수 있는 나라가 ‘中國之外’에도 있음을 알게됨으로써 대단히 놀랐으며, 자기가 지금까지 믿어오던 화이론적 세계관에 큰 충격을 받았음을 전하고, 서양역법의 정밀한 推算術을 검토하고 중국역서의 잘못을 알게 되었음을 전했다. 그러나 다만 동양의 전통적인 개천설이나 혼천설과 전혀 다른 우주관으로서의 十二葱頭論(十二重天說)에 대하여는 이해하기 어려움이 많으니 뒷날 가르침을 줄 것을 요청하였다.0629)
이영준의 솔직한 서한에 접한 로드리케즈는 중국을 중심으로 제작한 세계지도는 중국인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며, 지구론에 의하면 세계의 모든 나라가 세계의 중심이라고 밝혀 화이론적 세계관이 잘못임을 지적하였다. 한편 중국인들이 이 지도 때문에 세계를 넓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는데 조선도 그렇게 될 것을 희망하며, 동방의 모든 성인의 가르침을 자기들도 이해하고 있으며 삼강오행이나 오륜치국의 가르침은 서양에서도 알고 있는 일임을 지적하면서 서양의 ‘天學’을 내세웠다. 끝으로 중국에서 한·당 이래로 정확한 역법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 왔으나 아직 완전을 기하지 못하여 황제의 칙명으로 자기들이 역법 개수에 힘쓰고 있으나 그 ‘天文綱理’ 즉 자세한 점은 몇 마디의 글로 플이할 수 없으니 뒷날 만날 기회를 얻어 그 일에 대해 논의하자고 답신하였다.0630) 이 두 사람의 면담이 이루어졌다면 매우 흥미있고 유익한 천문·역법 토론이 있었을 것이나 서간이 두 사람 사이에 교환된 다음 해인 1632년에 화북에서 전란이 일어나게 됨으로써 무위에 끝났음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이상과 같이 17세기 초부터 부연사행원에 의해 조선으로 도입된 서양천문도, 중국한자로 작성된 이른바 한역서양천문·曆象 관계의 서학서가 기회있을 때마다 조선사회에 도입되었다. 17세기 초부터 여러 종류의 한역세계지도가 조선의 선각적인 지식인이나 천문·역상 기술관직자들에 의해 검토되고 논평되어 왔던 것이다. 이러한 자료를 접하고 검토하게 됨으로써 17세기 종래의 세계관·우주론이 동요할 수 있는 소지가 조성되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 그것이 근대적 깨우침으로까지 질적인 변화를 일으킬 정도로 그 이해 수준이 높은 것은 아니었다.
0624) | ≪書經≫권 1, 虞書 堯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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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5) | ≪崇禎曆書≫는 崇禎 2년(1629) 역법개정을 목적으로 서양역법서의 번역과 改曆 편찬을 목적으로 개설된 曆局의 督領 徐光啓와 그의 後任 李天經 등이 Adam Shall(湯若望), Giacomo Rho(羅雅谷) 등 예수회선교사의 협조로 1634년까지 5차에 걸쳐 明帝에 進呈된 漢譯西洋曆算書로서 집성된 叢書, 新法曆書, 新法算書로도 불린다.≪숭정역서≫는 명이 후세에 남긴 가장 위대한 科學遺書이며 조선의 時憲曆의 기초가 되었다(姜在彦, 앞의 책, 57쪽). 5차에 걸쳐 진정된≪숭정역서≫의 총권수는 刻版에 따라 異同이 있다(103∼137권). 崇禎初版(1634) 順治 2년 補刊版本, 康熙 17년 又補刊版本(1678)의 세 가지의 판본이 있다(徐宗澤, 앞의 책, 239∼256쪽). |
0626) | ‘欽天監敎案’은 順治帝 이래 欽天監曆局을 중심으로 예수회선교사와 奉敎士人 중심의 西洋曆法 세력에 대해 중국 전통 回曆法 세력이 康熙 초에 楊光先 등 闢邪斥西세력의 謀反告變上疏를 기회로 일어난 천주교박해 사건이며 구법세력이 흠천감을 장악하게 되고 大統曆法과 回回曆을 부활하게 된 政變이다. 이 때 북경에서 예수회선교사가 추방되고, 체포되었던 아담 샬은 겨우 사형을 면했으나 병사했다(1644). 그 후 1668 양광선이 제작한 역서의 오류가 문제되어 구법세력이 숙청되고 예수회선교사들이 북경에 복귀하여 역법사업을 주관하게 되었다(矢澤利彦 譯,≪東西曆法の對立≫, 日本, 平河出版社, 1986). |
0627) | 姜在彦, 앞의 책, 69쪽. |
0628) | 蓋天說에는 天·地 모두 平面이며, 천은 圓이요 지는 方이라고 생각하는 天圓地方說(一次 蓋天說)과 천지가 모두 曲面이며 북극지방이 높은 삿갓(蓋笠) 모양이라는(二次 蓋天說)의 두 가지로 나누어 지며, 渾天說은 後漢의 천문학자 張衡의≪渾天儀≫의 설이며, 천·지의 모양은 鳥卵(새알)과 같은 것으로 天이 地를 둘러쌓고 있으며, 하늘이 수레바퀴 모양으로 돌아감이 渾然하다고 한다. 漢代 이후 모두 혼천설을 신봉하고 조선에서도 이 혼천설은 추종하고 있었다 한다(全相運,≪韓國科學技術史≫, 30∼34쪽). |
0629) | 安鼎福,≪雜同散異≫, 與西洋國陸掌敎若漢書. |
0630) | 安鼎福,≪雜同散異≫, 西洋國陸若漢 答李榮俊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