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산중승단
조선시대의 불교는 그 시기적 특성에 따라 다음과 같이 3기로 구분되기도 한다. 개국에서부터 명종 20년(1565)까지의 종파 및 僧科 존립기, 명종 21년부터 淸虛休靜(1520∼1604)의 시대를 포함한 山僧家風확립기, 그리고 이 시기 이후 조선 말까지 禪·敎·念佛이 통합적으로 행해지던 三門修業 존속기가 그것이다.0751)
이상의 3기를 통해서 볼 때 정확하게는 제2기와 3기가 산중승단의 시대에 해당한다. 그러나, 조선 일대의 불교를 전반적으로 산중승단의 불교로 특징짓기도 한다. 초기 억불정책의 방향이 결과적으로 산중불교화를 재촉하였고, 마침내 명종 21년 이후로는 오직 산 속에 들어가 승단을 이룩하고 불교의 명맥을 유지해 갔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산중승단의 형성과정을 조선 전기에서 중기에 이르는 기간 중의 억불정책을 통해 간략하게 살펴 보려고 한다.
태종대의 대불교정책은 조선왕조에 있어서 최초로 단행된 본격적인 억불정책이었다는 점에서 일단 주목된다. 그러나, 그 광범한 대상이나 파급 영향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국가의 경제적 현실 타개책으로서의 성격이 더 짙게 느껴진다. 무엇보다도 대대적인 사원토지의 감축 및 노비의 屬公 등 억불의 내용이 주로 불교에 대한 경제적 제재 형태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최초 단계의 억불정책은 국가의 종교적 이념 문제로서 보다는 오히려 태종 초의 증대된 軍國的 수요를0752) 충당하기 위한 경제적 조치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과정에서 11宗에 달하던 종파가 7종으로 폐합되고 있다는 점이다. 종파의 폐합, 축소와 같은 일은 이후 산중불교의 출현 문제와도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의미를 내포한다. 이는 불교 각 종파의 특성이 무시되고 그 활동 또한 제약 봉쇄당함으로써, 결국 불교교단이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이다.
7종으로 폐합된 종파를 다시 禪·敎 양종으로 대폭 축소시켜버린 세종대의 억불정책 또한 같은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사원·승려·토지 및 노비의 대폭적인 감축으로부터 시작된 세종대의 억불정책은 이와 표리의 관계를 이루는 종파의 파격적인 축소로 이어져 갔다. 이로 인해 불교의 경제적, 인적 기반의 상당 부분이 해체되고,0753) 교학사상 및 그 활동의 다양성도 거의 사라지게 된다. 국가의 현실적 요구와 행정편의에 따라 강행된 이 같은 종파폐합의 정책은 이후 불교계의 향방을 어느 정도 가늠케 해준다. 그 연장선에서 이미 산중불교의 출현이 예견되는 것이다. 한편 이 시기의 억불정책 가운데 승려의 入城禁令 또한 산중승단 형성의 한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이 조치는 원래 無度牒僧의 단속을 위해 내려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의 확대 실시로 산중불교화의 경향이 더욱 가속화되었을 것임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태종, 세종대의 억불정책을 통해 어느 정도 예견되고 있던 산중승단의 출현은, 성종대의 억불정책을 거치는 동안 거듭 확인된다. 유학진흥과 유교의 이상정치 구현에 진력했던 성종은 본래 숭유배불적 성향이 강한 군주였다. 여기에다 과격한 배불론자들이었던 당시의 新進士類들까지 가세하여, 이 시기의 억불정책은 더욱 강경하게 추진되어 갔다. 그것은 특히 성종 7년(1476) 왕의 친정 이후, 여러 방면에 걸쳐 불교계에 대한 핍박으로 나타난다. 그 중에서도 대규모의 僧尼축출과≪經國大典≫에 명시되어 있던 度僧法의 정지는0754) 성종대 억불정책의 핵심을 이룬다.
이 두 가지 조치는 기존 승려에 대한 강제 축출과 병행하여 새로 승려가 되는 길까지 법적으로 차단하려는 것이었다. 불교의 자멸을 유도하고 있는 그런 정책들은 신진사류들의 강경한 요구와 정책 입안에 따라 결행된 것으로, 이 점은 특히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는 곧 사림세력의 성장이 불교계의 수난으로 직결되고, 또 그것이 산중승단의 출현에도 무시할 수 없는 한 배경이 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억불의 단계를 넘어선 이같은 배불정책으로 피폐해진 불교계가 다시 연산군대에 이르러서는 그 존립 자체마저 위협받는 처지에 놓인다. 연산군 10여 년 간에 걸친 폭정하에서의 불교박해는 가히 ‘破佛’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특히 선교 양종의 都會所(本寺)인 興天寺를 폐하여 公廨로 삼은 일은 불교계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불교교단의 근거지인 양종의 본사가 없어진 상태에서 僧科 또한 실시되었을 리가 없다. 연산군대에는 이 외에도 祖宗의 願刹이던 大圓覺寺를 폐하여 掌樂院으로 삼고, 승니를 환속시켜 官奴나 官房의 婢로 삼는 등 철저한 파불이 계속되었다. 물론 이러한 박해가 일정한 대불교 정책의 틀 안에서 수행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것은 연산군의 무도함과 횡포로 인한 불교의 수난이라 해야겠지만, 어쨌든 그 결과는 마침내 불교교단을 산중으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그리하여 도성 안에서 근거지를 잃은 선교 양종은 廣州 淸溪寺로 물러나, 다만 이름 뿐인 양종을 扶持할 수 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산중승단의 시대는 사실상 연산군 말경부터 개막되고, 그것은 다시 중종대의 억불정책을 통해 돌이킬 수 없는 현실로 고정되어 갔다. 사림세력의 정계진출과 그 영향력이 막대했던 중종대에는 연산군대의 억불에 비해 진일보한 경향을 보여준다. 연산군대의 억불이 원칙 없는 파불의 형태였다면, 중종대의 그것은 철저한 폐불정책으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다. 이미 폐사된 흥천·흥덕 양사의 大鐘과 경주의 銅佛로 統筒을 주조케 하고 있는 일이나,≪경국대전≫에서 아예 度僧條를 삭제하고 있는 데서도 그런 의지가 느껴진다. 이보다 앞서 중종 2년(1507) 기묘 式年에 승과를 실시하지 않음으로써 그 폐지를 공식화하고 있음은 이를 더욱 뒷받침 해준다.
승과의 폐지는 국가와 불교와의 공적인 관계 단절을 의미하는 동시에 선교 양종이 국가로부터 인정되지 않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0755) 이로써 이후 불교교단은 자연히 무종파의 산중승단으로서 존재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중종대에 산중승단이 현실로 고정됨으로써, 조선 전기의 억불정책은 일단의 결론에 이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중종의 승과 폐지 이후 40여 년이 지난 명종 5년(1550)에 文定大妃의 흥불 노력에 힘입어 선교 양종이 복구되고 이듬해에는 승과가 부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존속기간은 15년에 불과한 것이었다. 명종 20년 대비의 死去와 함께 불교는 다시 산중승단의 형태로 되돌아 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으로, 이는 중종대에 이미 내려진 결론에로의 복귀인 셈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산중승단은 태종·세종대의 억불정책에서부터 그 출현이 예견되고, 이 후 그것은 다시 성종대의 배불과 연산조의 파불을 거쳐, 중종대의 폐불정책에 이르러 구체적인 현실로 나타나 있다. 이같은 산중승단의 형성은 국가정책에 의한 타율적 결과임에 틀림 없다. 그러나 이런 山間叢林의 불교에도 그 의미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이제 조선불교는 순수한 수행승단으로서의 새로운 면모를 지닐 수 있게 된 것이다. 반면에 바로 이 점 때문에 불교의 은둔화 경향이 더욱 심화되어간 것 또한 불가피한 일이었다.
0751) | 金煐泰,≪韓國佛敎史槪說≫(經書院, 1986), 165∼16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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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52) | 韓永愚,≪朝鮮前期 社會經濟硏究≫(乙酉文化社, 1983), 190∼191쪽. |
0753) | 寺院토지의 경우, 合宗 전에 11,100결이던 것이 종파 축소에 따라 선·교 양종에 도합 7,950결만 분급되었다. 전국 사원토지의 약 30%가 감축된 숫자이다. |
0754) | 임시조치적 성격을 띤 度僧法의 정지는 성종 23년 2월부터 11월까지 적용되다가 그 이후로는 無度牒僧 단속에 중점을 둔 禁僧節目의 시행으로 다소 완화되었다. 이는 仁粹·仁惠 양 대비의 간곡한 요청에 따른 것이다. |
0755) | 각 宗에서 주관하는 宗選에 합격한 자에 한해 국가 시행의 大選에 응시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僧科는, 국가와 불교(각 종파)와의 공적인 관계를 가장 잘 반영하는 제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