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수련도교
≪海東傳道錄≫에는 修練的인 도교의 도법을 전수한 인물과 그 道脈이 밝혀져 있고 그 도법을 해설한 道書가 많이 제시되어 있다. 최근에는 그 單卷 完帙의 필사본이 나와 임진왜란 때까지도 살아 있던 韓無畏가 저술한 것임을 알게 되었으나, 전에는 李圭景의≪五洲衍文長箋散稿≫의 도교 관계 辨證說에 인용된 것을 통해 그 내용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전해지기로는 인조 때에 관동에서 체포된 한 중의 몸을 수색해서 이 단권으로 된≪해동전도록≫을 얻었는데, 그 곳의 수령이 그것을 李植(1584∼1647)에게 보내 그의 손을 빌어 정착된 것으로 되어 있다. 말하자면 이≪해동전도록≫에 실린 내용은 조선 중기에 와서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해동전도록≫에서 전하는 도법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구래의 金丹으로도 불리던 복용하면 신선이 된다는 仙丹을 煉造한다는 外物의 효능에 의존하는 外丹에의 집념에서 탈피하고 자신의 수련을 통해 功行을 쌓아 자기 몸에 단을 이룩하여 장생불사한다는 본성적인 것으로 전환시킨 이른바 內丹을 추구하는 金丹道를 고취하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이것을 丹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본성에 연결시킨 단학의 기본 이론은 金時習의 龍虎에 관한 해설에 잘 해명되어 있다. 鼎器에 납과 수은을 넣고 불을 지펴 두 가지가 不飛不走하여 하나로 합치게 만드는 것이 선단을 연조하는 방법이다. 이것을 상징적인 것으로 취해가지고 인체에 적용시켜서 풀어나가는 것이다. 정기는 사람의 몸인데 머리는 乾이 되고 배는 坤이 되고 배꼽 아래에 있는 단전이 그 중심이 되므로 단전을 기준으로 하여 몸을 안정시킨다. 납과 수은은 용호에 비기는데 그것은 인체의 一呼一吸하는 호흡이다. 이 일호일흡을 잘 해서 천지간 元氣를 훔쳐 체내에 단을 이룩한다. 지피는 불은 服餌, 즉 양생을 위한 식물로 잡는데 그 복이도 용호를 굴복시켜 하나로 합치도록 조절하는 것이다. 이러한 단학의 궁극적인 목적은 장생불로하는 신선으로 화하는 데 놓여 있으므로 자연 그것에 관련된 설화도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조선 중기에는 내단수련에 관한 전적의 주석과 해설서가 나오기도 하였다. 權克中(1560∼1614)의≪參同契注解≫, 鄭(1506∼1549)의≪丹家要訣≫과≪北窓秘訣≫, 李之菡(1517∼1578)의≪服氣問答≫, 郭再祐(1552∼1617)의≪服氣調息眞訣≫등이 있다.
≪해동전도록≫의 도맥은 金可紀, 崔承佑, 僧 慈惠 등 신라 말의 留唐學人들로부터 시작되나 조선시대에 내려와서 김시습에 이르러 크게 번성하였다. 도맥이 김시습에 이르러서는 洪裕孫, 鄭希良(1469∼?), 尹君平 3사람에게로 전해졌는데 전수된 도법의 내용도 각기 다르게 갈라져 나간다. 홍유손에게는 天遁劍法鍊磨訣이 전수된 것으로 되어 있다. 홍유손은 비천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金宗直(1431∼1492)의 문인으로, 세조가 왕위를 찬탈한 후, 호를 狂眞子라 하고 南孝溫(1454∼1492) 등과 죽림칠현으로 자처하며 老莊을 토론하고 세간에서 淸談派로 불리고 戊午士禍(1498) 때 제주에 유배되어 노예로 있다가 中宗反正(1506)으로 풀려났다. 그가 한 번은 금강산에 가서 이런 시를 지었다.
몸은 단군 무오년보다 먼저이고
눈은 기자가 마한을 칭한 것까지 보았다
지금 永郞과 함께 水府에 노닐고
또 봄 술에 끌려 인간 세상에 머물러 있다
(趙汝籍,≪靑鶴集≫8).
홍유손에게 전수된 도법은 密陽孀婦 朴氏妙觀과 張道觀으로 이어져 내려간 것으로 되어 있다.
정희량에게는 玉函記內丹之法이 전수된 것으로 전해진다. 정희량 역시 김종직의 문인으로 호를 虛庵이라 하고 연산군 초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待敎로 있다가 무오사화로 의주로 유배되었고 다시 김해에 이배되었는데 연산군 3년(1502)에 행방불명되어 세상에서는 신선이 되었다고 전해졌다. 정희량은 특히 음양학에 밝아 먼 앞 일을 미리 잘 알았다고도 한다. 정희량의 도맥은 僧 大珠, 鄭·鄭碏(1533∼1603) 형제, 朴枝華(1513∼1592)로 이어져 내려간 것으로 되어 있다. 정염은 내단호흡법을 다룬≪北窓秘訣(龍虎訣)≫의 저자로 널리 알려졌고, 정작은 형 정염으로부터 도법을 전수받아 도교의학에 조예가 깊어≪東醫寶鑑≫의 편찬에 참획하였다. 박지화는 徐敬德(1489∼1546)의 문인으로 유·불·선 3교에 두루 조예가 깊었고 임진왜란 때 왜병에 더럽혀지지 않으려고 냇물에 투신자살하였다. 일설에는 박지화가 水尸解 했다고도 한다. 시해는 죽는 형식만 취하고 실제로는 죽지 않고 신선이 되는 것을 이른다. 금·목·수·화·토 다섯 가지 시해가 있는 것으로 전하여진다.
≪芝峯類說≫과≪淸江語≫에 윤군평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윤군평은 군관이었는데 異人을 만나≪黃庭經≫을 전수받아 수련법을 터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과식을 삼가라고 경고하면서 모든 질병은 다 음식을 절제하지 않는 데서 생긴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늘 鐵片 4매를 가지고 번갈아 가며 양 겨드랑이에 끼고 있었는데, 겨드랑이에 낀 철편은 잠깐 사이에 불같이 뜨겁게 달아올라 자꾸 식은 것으로 갈아껴야 했고 그렇지 않으면 편안치가 않았다. 추위와 더위를 가리지 않고 늘 목욕을 해서 어깨와 등을 식히고는 했고 동짓날에도 우물물 한 동이를 등에 부어야 했다. 80여 세에 죽었는데 그 시체가 퍽 가벼워서 사람들은 그가 시해했다고 말했다. 윤군평에게는 김시습으로부터 參同龍虎秘旨가 전수된 것으로 되어 있다. 그의 도맥은 郭致虛와 한무외가 이어 내려간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밖에도 師承이 분명치 않은 수련도교 신봉자가 적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름이 알려진 사람으로는 南趎, 崔氵島, 張世美, 姜貴千, 李光浩, 金世麻, 文有彩, 鄭之升, 李廷楷, 郭再祐, 金德良, 李之菡, 鄭斗, 許米 등이 있다. 이렇듯 조선 중기에도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 수련적인 도교가 신봉되어 직접 수련에 종사한 사람도 생겨나고 또 그 방면의 道書의 주석과 해설이 나와 특이한 사조를 조성하였음을 짐작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