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수경신(경신수야)
도교의 장생법과 司過神의 신앙에서 출발된 행사 중에서 경신일에 행하는 일들이 있다. 그 가운데서 守庚申 또는 庚申守夜가 가장 널리 행해졌다. 경신일 밤에 잠을 자지 않고 하룻밤을 뜬 눈으로 지새는 수경신의 습속은, 도교에서 주장하는, 일종의 눈에 보이지 않는 벌레인 三尸의 활동을 약화 또는 절멸시켜야 장수를 누릴 수 있다는 설에 따라, 각 개인에 주어진 2周甲 120년의 수명이 단축되어 천수를 누리지 못하는 것을 막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삼시충은 눈에 보이지 않는, 형체가 없는 괴물로, 인체 내에 기생하면서 사람의 죄과를 빠짐없이 살펴서 60일에 한 번씩 돌아오는 경신일 밤에 宿主가 잠든 사이에 그 몸에서 빠져나가 천상의 상제에게 정례적인 보고를 하고 돌아온다는 것이다. 그 경신일 밤에 자지 않고 뜬눈으로 새우면 삼시충이 상제에게 죄과를 보고하지 못하고 만다는 생각에서 수경신의 습속이 시작되었고 그것이 결국은 축제적인 행사로 변모되기에 이르렀다. 수경신은 ‘守三尸’라고도 한다.
수경신은 고려시대부터 민간과 궁중에 두루 유행하였고, 조선시대에 내려와서는 건국 초기부터 궁중에서 규모를 갖추어 행하여졌다.≪龍飛御天歌≫제78장 大注에 “경신일 밤에 태조가 판삼사사 鄭道傳 등 여러 훈신들을 불러 술을 차리고 풍악을 잡혔다”라는 기사가 있고, 小注에는 삼시와 경신수야에 관한 비교적 상세한 해설과 당시의 경신수야하는 나라 풍속에 대한 설명이 들어 있다. 조정에서 수경신이 논란된 기록은≪成宗實錄≫에 처음 보인다. 성종 때에는 경신일에 수야하는 행사의 규모가 커져서 임금과 신하 사이에 경신수야를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졌던 것이라 여겨진다. 성종 17년(1486) 11월에 경신수야의 행사를 3일 앞두고 사헌부 장령이 임금에게 간했다.
사헌부 장령 李季南이 와서 아뢰기를, ‘신 등이 듣자옵기에는 19일 밤에 종친을 향연하고 수경신을 하시리라고 합니다. 한밤중에 종친들이 妓工의 무리와 궁금 엄밀한 곳에서 남녀가 뒤섞여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또 종친 등이 혹 술취함으로 해서 예를 어기는 자가 생길 것이고, 하물며 밤을 새우며 歡宴하고 성체가 피로해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신일 밤에 종친을 접견함은 오늘날만의 일은 아니다. 너희들은 이것을 가지고 流連荒妄하다고 하는 거냐’라고 했다. 계남이 이르기를, ‘신 등은 전하를 황망하시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엄한에 성체를 피로하게 할까 두려워서이고 또 남녀가 뒤섞여 논다는 것이 궁금의 엄밀한 체통을 자못 손상시키게 되기 때문에 아뢰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임금이 이르기를, ‘조종조에는 있던 일이니 다시는 말하지 말라’고 했다(≪成宗實錄≫권 197, 성종 17년 11월 정사).
그 다음날에도 대사헌 李瓊仝 등이 箚子를 올려 역시 2일 후에 있을 경신수야의 행사를 세조 때의 고사를 들어가며 중지할 것을 간했으나 임금은 여전히 들어주지 않았다. 성종은 경신일 밤에 종친과 조정 관원들에게 仁陽殿 內外庭에 妓樂을 곁들인 대규모의 주연을 베풀고, 양사의 반복되는 간쟁을 물리치면서 잔치를 치렀다. 양사의 合疏는 임금의 경신수야가 불가한 이유 7가지를 늘어놓고서, 이미 차려 놓고 시작한 연회의 중지를 간청하였는데, 거기에는 삼시에 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성종은, “불교가 근리한 데도 나는 그것조차 믿지 않는데 하물며 삼시를 겁내서 수야하겠는냐. 다만 종친을 친근하게 하기 위해서일 뿐이지 액을 피하고자 해서가 아니다”라고 대답하고, 대사헌 등에게 殿庭으로 들어가서 술을 마시라고 명했다. 이날 마침 천둥이 치고 비가 왔는데 성종과 간쟁하는 신하들 사이에 天變에 대한 논란이 벌어지기까지 하였다. 성종 22년(1491)에도 대사헌 이경동 등의 상서에서 경신수야의 행사를 포함한 각종 환락연회의 폐풍을 고치고 遊逸하지 말기를 간청하였으나, 성종은 경신일의 행사는 그 유래가 오래되었으므로 폐지할 수 없고 그 밖의 몇 가지는 조정할 데가 있으면 고치도록 하라고 응수하였다.
성종의 뒤를 이은 연산군도 궁중에서의 경신수야 행사를 계속하였다. 연산군 3년(1497) 11월 경신일의 실록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주효, 호피, 녹피, 각궁 등의 물건을 승정원에 내리고 이르기를, ‘오늘은 경신일이니 함께 수야하고 장난삼아 노름들이나 하라’고 했다. 대사헌 李諿 등이 아뢰기를, ‘임금에게는 장난이란 없는 것입니다. 수경신하는 놀이는 閭巷의 豪俠兒들이 숭상하는 것입니다. 이제 승정원에서 그것을 본뜨게 하시다니, 금중은 놀이하는 곳이 아니옵고 측근의 신하들은 도박하는 부류들이 아닙니다. 그만두도록 명하십시오’라고 했으나 들어 주지 않았다(≪燕山君日記≫권 28, 연산군 3년 11월 경신).
연산군 11년 12월 경신일에는 승정원 예문관, 병조의 都摠府 당상, 密威廳 당상에게 명해 빈청에 모여 수야하도록 하고 御製絶句와 율시를 내려 그것들에 和作하여 바치도록 하였다. 이렇듯 경신수야의 습속은 조선시대 궁중행락의 하나로 지켜져 내려왔다. 전해지기로는 영조 때에 내려와 비로소 궁중에서의 경신수야 행사가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