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 과수와 나무
과일나무의 재배도 농민들에게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 과일나무를 잘 재배하여도 생계를 유지할 수가 있었고, 나아가 부를 축적할 수도 있었다. 과일나무의 재배는 1년 동안의 경작으로 결실을 맺는 것은 아니었고, 많은 노력과 시간과 자금이 필요한 작물이었다. 그리하여 곡물과 소채 등의 다른 작물보다는 일정한 계획하에 재배하여야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18세기 중엽 이후에는 특정 지역에서 과일나무와 약재·나무 등이 특산물로서 재배되었고, 그 지역의 농민들은 그것을 재배하여 판매함으로써 생계를 유지하거나 부를 축적해갔다. 이제 각 종류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0112)
가) 대추나무
18세기 중엽 충청도의 靑山과 報恩지방에서는 농민들이 대추나무를 재배하였고, 이 지역의 대추나무는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보은은 토지가 척박한데도 대추나무가 잘 자랐고, 그 지역의 농민들은 대추나무를 잘 재배하고 판매하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해갔다.
19세기에도 이 두 지방에는 “계곡이 깊어서 특별한 산업이 없는데, 대추나무를 심어서 극히 번성하게 되니 사방의 장사꾼들이 모두 모여든다”0113)고 할 정도로 대추나무가 잘 재배되었고, 그 지역의 농민들은 그것을 판매함으로써 이익을 얻었다.
나) 닥나무
종이를 만드는 재료가 되는 닥나무를 재배하여 판매함으로써 생계를 유지해가는 농민들도 있었다. 닥나무는 전라도와 경상도지방에서 재배가 활발하였고, 충청도와 경기도 동북지방의 농민들도 재배하였다. 특히 전라도지방에는 닥나무를 재배하는 곳이 많았다. “전라도 동북 산간지대의 10여 개 고을에는 개인의 닥나무밭이 65개소나 되었다. 그 곳 농민들과 일부 절간에서는 닥나무를 생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0114)고 할 정도였으며, 닥나무도 몇 頃만 심으면 충분히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전라도지방에서도 특히 닥나무 재배에 유명했던 지역은 全州의 萬馬洞이었다. 이 지역은 전국적으로 이름이 날 정도로 유명하였다.0115)
닥나무를 바탕으로 종이를 만드는 수공업은 경상도와 전라도가 전국에서 유명하였다.0116) 그 중에서도 전라도지방의 농민들이 닥나무를 재배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종이를 만드는 데 뛰어났다. 특히 전주와 南原의 紙는 전국에서도 으뜸이었다.0117)
다) 감나무
감나무는 경상도지방과 경기도 南陽·仁川·安山·江華와 충청도 溫陽 등에서 재배되었다. 특히 경상도지방은 곶감(乾柿)의 생산으로 유명하였고, 곶감이 전국에서 가장 많이 산출되었다.0118) 아울러 그 곶감을 판매하여 돈을 벌기도 하였다.0119)
라) 배나무
배나무는 날씨가 서늘한 곳에서 재배가 잘 되었고, 지역적으로는 황해도와 함경도에서 재배가 많이 되었다. 황해도에서는 신계·곡산·수안·토산·황주·봉산 등이 배나무의 재배지로 알려져 있었다. 특히 황주·봉산지역은 전국에서 이름난 배의 산지였다.0120)
마) 밤나무
밤나무는 한강 북쪽지방과 경상도 密陽지방 및 함경도지방에서 많이 재배되었다. 특히 “한강 북쪽지방의 농민들은 돈이 긴급히 쓸 경우가 생기면, 집안에 보관하고 있던 면화나 양잠 또는 배와 밤 등을 판매하여 마련한다”0121)고 할 정도로 밤 등의 상품화를 쉽게 할 수 있었으므로, 그것을 판매하여 생활에 필요한 돈을 마련할 수 있었다.
바) 기 타
울릉도에서는 복숭아 재배로 유명하였고, 전라도지방의 興陽과 南海·濟州 지역에서는 귤나무와 유자나무를 재배하여 이익을 얻고 있었다. 이 물품들은 이전에는 왕실 등의 진상용으로 사용되는 데 그쳤지만, 18세기말에 이르러서는 진상품 이외에도 재배가 성행하여 판매함으로써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대나무도 여러 가지 죽제품으로 만들어져 상품화되었다. 특히 전라도에서는 대나무밭을 재배하여 여러 가지 죽제품을 만들어 판매함으로써 이익을 얻고 있었다. 그리하여 심지어는 “대나무를 1頃을 심으면 100畝의 농사를 짓는 것과 맞먹는다”0122)고 할 정도였다. 농민들은 벌을 쳐서 꿀을 만들어 장시에 판매함으로써 생계를 유지해가기도 하였다. 이것은 전국적으로 모든 지역에서 행해진 일이었다.
지역별 특산물 재배는 이전 시기에도 있었지만,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상품화폐경제의 발달로 인하여 이전 시기와는 달리 한 지역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상품화되어서 전국적으로 퍼져갔다는 데 의미가 있었다.
<李永鶴>
0112) | 이 부분은 李永鶴,<조선후기 상품작물의 재배>(≪外大史學≫5, 1993)을 주로 참고하였다. |
---|---|
0113) | 徐有榘,≪林園經濟志≫倪圭志 권 3, 貨殖 및 相宅志 권 2, 八域名基. |
0114) | ≪增補文獻備考≫권 147, 田賦考 7. |
0115) | 徐有榘,≪林園經濟志≫倪圭志 권 2, 貨殖 貿遷. |
0116) | 禹夏永,≪千一錄≫권 1, 建都 嶺南. |
0117) | ≪備邊司謄錄≫175책, 정조 13년 11월 22일. |
0118) | 禹夏永,≪千一錄≫권 1, 建都 嶺南. |
0119) | 徐有榘,≪林園經濟志≫倪圭志 권 3, 貨殖 八域物産 總論. |
0120) | 徐有榘,≪林園經濟志≫倪圭志 권 2, 貨殖 貿遷. ≪京都雜志≫권 1, 果瓜. |
0121) | 禹夏永,≪千一錄≫권 1, 建都. |
0122) | 禹夏永,≪千一錄≫권 1, 建都 湖南 生利. |